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 9. 27 ~ 1464. 8. 1)

1 개요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뒤를 계승했으며, 사후에는 파테르 파트리아이(국부)라고 불렸다.

2 코지모에 대한 묘사

주변의 인문주의자처럼 박식하지 않았지만 피렌체 인들을 무시하는 피우스 2세에게서 매우 교양이 풍부한 지식인으로 보통 상인보다 학식이 있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며, 어려서부터 고전 원고를 수집했다고 한다. 인문주의자들이 주로 배우는 수사학 등을 완전히 섭렵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학문에 박식한 자들은 그가 피렌체 사회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고 하며,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보통 인문주의자들과 다르게 되도록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시내 거리를 돌아다닐 때 수수한 복장으로 시종 하나만 대동하면서 노인들에게 길을 양보하거나 행정장관들에게 극도의 예우를 갖췄으며, 언제나 다른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했다.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사업상의 조언을 구하면 조용히 신중하게 경청하면서 우정을 거부하듯이 퉁명스러울 정도로 짧게 대답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면서 신뢰했다고 한다. 츤데레

아버지 조반니가 임종 시에 부자와 강자를 거스르지 말면서 빈자와 약자에게 항상 자비로우라고 했던 것처럼 아들들에게 충고했지만 코지모는 외향적인 겸손과 조심성을 가지면서도 아버지보다 훨씬 더 야심이 많았으며, 자기 재산을 다른 용도에 사용했다.

은행가로서 아버지만큼이나 기민하면서도 가족 사업을 계속 확장해 조직자로서의 명민성과 놀랄 정도의 기억력, 가끔씩 밤을 새고 일할 정도의 근면성으로 유명했으며, 지점 경영자들을 현명하게 선택해 면밀히 감독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요구했다. 지점 경영자들이 피렌체 활동 사항을 규칙으로 자세히 보고하자 그 대가로 상당히 수익을 분배했으며, 아버지 조반니의 동업자인 바르디 가문의 방식이 구식이라 여겨 로마의 지점장 안토니오 디 메세르 프란체스코 살루타티와 제노바의 지점장 조반니 다메리고 벤치를 동업자로 삼았다고 한다.

노년기에는 창백한 표정이 냉소적으로 보이거나 짤막하고 애매모호한 논평이 비난이나 조롱을 뜻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의 태도는 경외감보다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한다. 사스가 츤데레

3 생애 초기

초기 기독교 성인인 코스마스와 다미아누스의 축일인 9월 27일에 태어나 자신이 의뢰하는 그림이나 자신을 기념하는 그림에 코스마스와 다미아누스를 자주 등장시켰다고 하며, 어린 시절에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의 카말돌레회 수도원 학교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우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도 대충 익혔다고 한다. 이후 다른 부유한 피렌체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당대의 주도적인 학자인 로베르토 데 로씨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로씨의 지도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의 토론 모임으로 고전 학문과 고전적 이상을 존중하면서 지구상의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져 인문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아버지인 조반니의 동업자인 조반니 데 바르디의 장녀 콘테시나 데 바르디와 혼인해 바르디 궁으로 이사하면서 각 방에는 메디치의 표상을 눈에 띄지 않게 장식했으며, 3년 이상 로마 지점을 경영하면서 가끔 피렌체를 방문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티볼리에 있는 저택에서 보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서 대리인이 사온 마달레나는 노예 소녀가 뒷바라지를 해주어 마달레나와 동침해 카를로 디 코지모 데 메디치를 얻게 된다.

한동안 사업상 로마에 체류하여 가문의 경쟁자들이나 피렌체의 적대국들의 질시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피렌체로 돌아온 이후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미누토 포폴로에 대한 지지도로 알비찌 가문의 의혹을 불러오게 되었다.

4 알비찌 가문과의 대립

긴급 위원회인 전쟁 위원회의 10인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1429년 루카 시와의 전쟁에 알비찌 가문의 지휘 아래에 참전했으며, 알비찌 가문의 지휘 아래에서는 피렌체 군대가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냈다.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1430년 가을에는 불리하면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면 안된다는 것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도 전쟁 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를 줄 것으로 주장하면서 피렌체로 떠나 베로나로 갔다.[1]

1432년 가을에는 또다시 피렌체를 떠나 베로나에 가서 무젤로 지방의 일 트레비오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피렌체 은행에 있는 막대한 재산을 로마와 나폴리 지점으로 신중하게 이동시켰으며, 주화 꾸러미들을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베네딕투스회 은둔자들과 산 마르코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사들에게 맡겼다. 무젤로에 머무르고 있을 때 9월 첫째주에 피렌체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아 1433년 9월 4일에 피렌체로 귀환했으며, 알비찌 가문이 퍼뜨린 악성 소문 때문에 7일에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 갇히자 시뇨리아 궁의 감옥에서 독살 위험을 구실로 식사는 바르디 궁에서 조달받았으며, 경비원 페데리고 말라볼티는 코지모에게 동정적이라 방문객을 상대로 여러 전언과 뇌물이 오고 갈 수 있었다. 알비찌 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찌가 반역죄를 부과하여 사형시키려고 하자 곤팔로니에레 구아다니에게 뇌물로 1000플로린를 먹여 투표권을 마리오토 발도비네티에게 위임하게 하자 마리오토에게도 뇌물을 먹였으며, 이러한 뇌물과 함께 무젤로에서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군대가 모집되자 28일에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사촌 아베라르도와 함께 재판을 받아 10년간 파도바로 추방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유배 길에서 칭송을 많이 받아 페라라에서 후작 집안의 융숭한 대접을 받거나 파도바에서 권력층으로부터 영빈 대우를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두 달간 지내다가 베네치아에 있는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합류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 산 지오르지오 마지오레 수도원에 정착해 도서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또한 자신이 위임했던 피렌체의 건축 작업이 잠정적으도 중단되자 베네치아까지 동행한 건축가 미켈로쪼 미켈로찌에게 건물 설계를 맡겼으며, 베네치아에 머무르면서 피렌체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자세히 들었다.

피렌체에서 알비찌 가문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1434년 늦여름 무렵에 밀라노의 용병이 피렌체의 군대를 격파하자 반정부 감정이 격화되면서 1년 만에 유배령이 철회되었으며, 9월 28일에 출발해 베네치아 병사 300명의 호위를 받아 피렌체로 귀환하면서 알비찌 가문을 추방했다.

5 권력 장악과 외교

알비찌 가문을 추방하자 수년간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표면적으로 부유하고 관대하면서도 친근한 은행가 행세를 했으며, 정치, 외교적인 업무가 나오면 무조건 떠맡거나 국가의 경제 정책을 지도했다. 시에서 누구보다 더 높은 이율의 세금을 내면서도 다른 신중한 부자처럼 부채를 강조하면서 납세 가능한 수입을 축소시켜 정확한 재산액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세 번만 곤팔로니에레에 선출되어 가식이나 허세를 피해 말보다 노새를 타고 다녔다.

국가 안보와 조세 제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콘실리오 마지오레라는 위원회를 새로 조직하면서도 루카 피티를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시켰으며, 1439년에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의회가 페라라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동생 로렌초의 설득과 페라라에서 역병이 생기자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열게 되자 위신이 높아졌다.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화합은 얼마 안 가 깨졌지만 시의 무역업에 도움이 되거나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리면서 고전 문서, 역사, 미술, 철학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30년 동안 외교 정책을 통제해 중요한 일을 메디치 궁에서 결정했으며, 외국 대사들은 종종 궁을 오가 임무를 착수하기 전에 무조건 코지모를 방문했다고 한다. 밀라노에 대한 적대 정책을 부적절하게 여겨 피렌체인들을 설득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고생하던 이탈리아의 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자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피렌체 납세자들에게 추가 보조금을 받도록 해주어 정치, 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해 1450년 3월에 밀라노 공작이 되는데 도움을 줬다.[2]

프란체스코를 원조한 일로 네리 카포니, 지안노쪼 마네티 등 피렌체 사람들의 반발을 샀지만 베네치아는 레반트 지방 때문에 서로 충돌한 문제와 지중해 동부 지방을 소유하면서 투르크 족과 적대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상호 이득이 되는 무역 관계를 즐겨 믿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했으며, 베네치아가 나폴리 왕과 동맹을 맺으면서 코지모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베네치아 대사들이 밀라노와의 동맹을 항의하자 이들에게 정부의 공격자라 비난했다. 7월에 밀라노와 동맹국 협정을 맺어 이 협정으로 베네치아와 독일 황제가 동맹을 제안하면서 나폴리와 베네치아에서 피렌체 상인들을 추방하거나 동로마 제국 황제가 피렌체 상인들의 특권을 모두 철회했으며, 이에 맞서 베네치아 지점을 철수해 밀라노에 새 지점을 열면서 동방 무역에 관련된 담당자들을 불러 그리스인들이 철회해 간 피렌체 상인들의 특권을 투르크 족에게 대신 승인받았다.

또한 피렌체의 전통적인 우방인 프랑스와 교섭해 1452년 4월에 몽틸레투르에서 피렌체나 밀라노가 공격하면 원조할 것과 스포르자의 밀라노 공작을 인정하는 것을 약속받았으며, 그 보답으로 샤를 7세가 나폴리를 공격할 경우 피렌체나 밀라노가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에 베네치아, 나폴리가 반발해 프랑스가 영국과의 문제로 정신이 없는 동안 동맹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 피렌체, 밀라노에 전쟁을 선포하자 코지모는 피렌체인들의 반발을 사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뒤늦게 프랑스군이 개입[3]한데다가 1453년 투르크 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투르크족의 위협이 보이자 피렌체, 밀라노, 교황, 베네치아가 연합체를 구성하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평화가 찾아왔지만 시민들이 적대적인 발언을 하거나 200여 개의 훌륭한 가문들이 형편이 나빠져 세금을 내기 위해 소유물까지 팔 정도인데다가 새로운 세금이 부여되자 코지모가 돈을 모두 빌려줬으며, 관련자들이 모두 만족할 때까지 부채 상환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대중의 인심을 얻기 위해 물가가 올라 불평하는 이들에게 많은 양의 옥수수를 배급했다. 베네치아는 투르크 족에 고전해 제지를 당하면서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으며, 피렌체의 동맹인 밀라노의 프란체스코는 밀라노 공작으로 인정받거나 나폴리도 평화 협정에 승인하면서 코지모의 선견지명을 빛을 보게 되었다.

이외에 토스카나 의사의 아들 토마소 파렌투첼리를 후원했다가 볼로냐 주교를 역임해 교황 니콜라우스 5세로 등극하자 메디치 도서관 확장에 대해 여러 충고를 받거나 그를 존중해 융자 부탁을 받으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다가 파렌투첼리가 교황이 되자 상호 이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1458년에 니콜라우스 5세의 친구인 교황 피우스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교황청과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1469년에 교황 피우스 2세를 만나 유대를 돈독히 했으며, 이 당시에는 통풍에 걸렸다.

6 수집과 건축

대리인들을 시켜 유럽, 근동을 헤매면서 희귀본, 귀중본, 원고들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 모으거나 자신의 도서관에 엄청난 돈을 퍼부으면서 피렌체에도 치장했으며, 1437년에 코지모에게 큰 빚을 진 니콜로가 죽자 800권의 장서가 수중에 들어와 종교서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 기증했지만 나머지는 코지모가 가졌다. 메디치 가의 돈을 퍼부어 피렌체 전체와 인근 지역의 교회, 수도원, 자선 단체의 건축, 복원, 장식에 힘을 쏟아 자신의 자취를 확실히 남겼으며, 아르테 델 캄비오가 임명한 4인 위원회의 일원인 코지모는 기베르티를 은행가의 수호자인 성 마태오를 조각하는 일을 위촉했다.

바르디 궁에서 증개축된 두오모 광장의 아버지 조반니의 저택으로 이사하면서 건축가인 미켈로쪼 미켈로찌를 고용해 메디치 궁과 무젤로에 새 별장을 지었으며, 전원 생활을 즐겨 시간이 날 때마다 피렌체를 떠나 일 트레비오나 카레지의 별장에서 독서를 즐기면서 포도가지를 자르거나 올리브와 아몬드나무를 키워 시골 사람들과 대화했다고 한다. 도시로 올라와 시골에서 들은 속담이나 우화를 인용해 자신의 대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거나 카레지에서 방해받지 않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몬테베키오 별장에 불러 같이 지내면서 식사하거나 체스를 즐겼다.

파리의 피렌체 유학생을 위한 대학을 복원하거나 예루살렘의 산토 스피리토 교회를 수리해 아시시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을 증축했으며, 1436년에 성당 지붕이 완성되자 교황 에우제니우스 4세의 간청으로 4만 두캇에 이르는 거액을 지불해 1437년에 미켈로쪼가 산 마르코 수도원을 새로 건축하게 했다. 코지모가 산 마르코에 너무 관대해 검소한 수사들이 항의하자 하느님을 내 장부에 채무자라 기록할 만큼 많은 것을 드릴 능력이 없다고 응수했으며,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의 소수도원장 안토니오 피에로찌와는 절친한 사이라 코지모가 사적인 용도로 마련한 큰 수도원실에서 고리대금업자와 은행가의 죄가 어떻게 속죄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 토론했다.[4]

카레지의 별장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문제가 발생해 역병이 돌면 은둔하거나 무젤로의 시골 사람들을 그의 가족에 더 가까이 귀속시킬 수 있도록 더 먼 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싶어해 1451년에 카파지올로에 미켈로쪼의 설계로 새 별장을 건축했다. 몇 년 후에 아들 조반니가 미켈로쪼를 통해 벨칸토로 알려진 별장을 재건축하려고 하자 그 주변에 땅이 경사가 심하면서 돌이 많아 농사에도 소용없기 때문에 전망의 목적으로 돈을 너무 많이 허비한 것에 못마땅했지만 1463년에 완성하게 된다.

1434 ~ 1471년의 회계 장부에 따르면 66만 3755플로린이 건축과 자선 기금, 세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7 학문과 예술가 지원

피렌체 공의회로 수많은 그리스 학자가 몰리면서 학자들 가운데 제미스토스 플레톤의 강의를 경청해 플라톤 연구를 위한 아카데미를 세워 연구에 정진하려고 했지만 플레톤이 고향이 돌아간데다가 다른 일로 바빠지자 한동안 그 계획은 연기되었으며, 몇 년 후 주치의 아들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양자로 삼아 피치노가 플라톤에 열의를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연구 자금을 마련해줬으며, 나중에는 몬테베키오라는 별장을 제공해 피치노가 그리스어를 공부해 플라톤의 글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게 배려했다.

1456년에는 그리스 학자 요한 아르기로포울로스를 불러 피렌체로 이주시켰으며, 피치노가 나이가 들고 학식이 높아지자 몬테베키오의 별장에서 인근 카레지 별장으로 불러 단둘이서 만나거나 때로는 여러 친구들과 철학적 문제를 밤늦게 토론했다고 한다.

조각가 도나텔로(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바르디)에게 직접 일감을 주거나 친구들에게 추천해 일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도나텔로가 다른 후견인들과 관계가 좋지 못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중재했다. 도나텔로가 허술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자 어느 축제날에는 말끔한 복장과 붉은색 외투나 모자를 선물로 줬으며, 도나텔로가 노쇠해서 일할 수 없을 때 카파지올로 근방의 메디치 소유지에 작은 농장을 주었다가 농장에서 생기는 문제 때문에 싫증이 나자 코지모는 도나텔로가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금만 받아가도록 해줬다.

수도사 필리포 리피가 색을 밝히는 사기꾼이라는 악명을 알았음에도 제단화를 그리는 솜씨를 높이 사 코지모 궁에서 일할 것을 요청했으며, 프라토에서 작업을 맡게 해 코지모의 사생아인 카를로를 그리게 된다. 코지모는 필리포에게 결혼 특면장을 얻었으며, 필리포가 호색성 때문에 작업을 하다가 여자를 찾아 나가는 경우가 있자 방에 가두어 약속된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나갈 수 없도록 방에 가두었다가 탈출하자 애정과 친절로 돌보면서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도록 약속했다.

조반니 다 피에졸레에게는 산 마르코의 성당 회의소와 회랑 벽 등에 프레스코 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으며, 성당 회의소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 대한 조언과 도움을 주면서 메디치 방의 프레스코 화의 주제로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추천했다. 1455년에는 관절염과 통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냉소적이면서 신랄해졌으며, 1458년에는 미켈로쪼에게 차남 조반니를 위해 피에졸레 기슭에 메디치 별장을 건축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8 교우 관계

니콜로 니콜리, 포지오 브라치올리니, 레오나르도 부르니, 암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 카를로 마르수피니 등 당시 피렌체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랑 친했으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니콜로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자 수집을 시작했다. 포지오가 사용한 필체로 자신의 책들을 모두 필경시켰으며, 레오나르도와는 인문학 교우였다.

트라베르사리는 겸손하고 성자 같았기에 코지모가 매우 존경했다고 하며, 트라베르사리와는 코지모를 위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전 작품의 불순한 내용까지 모두 번역해 줄 정도였다. 코지모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레에 있는 트라베르사리의 방을 자주 방문했으며, 카를로와는 인문학 교우로 카를로가 코지모의 모친의 장례 연설문을 써줬다고 한다.

9 최후

죽기 몇 년 전에는 시뇨리아가 코지모를 카포 델라 레푸블리카(공화국의 지도자)라 불렀으며, 1461년에 손자 코지미노, 1463년에 아들 조반니를 차례로 잃다가 1464년에는 통풍, 관절염 이외에도 방광염으로 자주 고열이 나 고통을 겪다가 8월 1일에 죽었다.

사후에는 파테르 파트리아이(국부)라고 부르자는 법령이 통과되어 그의 묘소에 새겨졌으며, 죽기 전에 어떠한 허세나 과시 없이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 요구는 무시되어 묘소는 화려하게 장식되면서 그의 시신은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1. 그러나 코지모가 피렌체에 없는 사이에 알비찌 가문이 코지모가 엄청난 재산을 이용해 공화국을 침범할 장군을 고용하여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으며, 이런 소문을 믿은 자도 있었지만 대개 지나치게 성공한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라 보았다.
  2. 당시 밀라노의 상황은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공작이 사위 프란체스코에게 밀라노를 넘겨주기로 한 약속을 어겨 나폴리의 아라곤 왕 알폰소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 일로 오를레앙, 독일 황제, 베네치아와 프란체스코가 서로 자기 것이라 주장해 밀라노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시의 주인이라 선언했다.
  3. 프랑스로 파견된 아뇰로 아치아이우올리가 샤를 7세에게 원군을 요청했다가 영국이 보르도 지방을 침략해 설득할 수 없었으며, 아치아이우올리가 앙주의 르네를 설득해 동맹국의 원조를 받기로 했으며, 그 보답으로 르네는 알폰소의 아라곤 족을 나폴리에서 축출하는데 원조를 받기를 해 프랑스군이 개입하게 되었다.
  4. 당시 교회법으로 고리대금업자는 부당한 방법을 취득한 것을 모두 환원해야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