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상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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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Isidore Noël Sankara (1949년 12월 21일 - 1987년 10월 15일)

4년만에 부르키나파소에게서 최빈국 타이틀을 떼어내는 데 성공한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

그러나 전우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하고, 끝내 조국의 개혁도 끝까지 이루지 못한 비운의 혁명가.

부르키나파소의 5대 대통령.

오트볼타(부르키나파소의 옛날 이름)의 야코에서 출생한 그는 19살에 공군에 입대해 낙하산 부대의 장교가 되었다. 수도 와가두구에서 이름난 밴드의 기타리스트였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젊은이였지만 오트볼타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여성, 황폐해지는 자연환경과 사회전반을 보고 남들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카라는 이런 오트볼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주목했고 군부내에 "공산주의 장교그룹"이라는 비밀단체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트볼타는 당시 자고 일어나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불안정한 체제였는데 쿠데타로 집권한 사예 제르보 군부가 상카라를 1981년에 정보부 장관에 임명하면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혁적 성향의 상카라는 집권세력과 마찰을 빚었고 노동자 정책을 비판하며 "민중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게 저주를!(Malheur à ceux qui bâillonnent le peuple!)"이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사임했다.

그러나 1982년 11월, 군부였던 장 밥티스트 우에드라고에 의해서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된 우에드라고는 1983년,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상카라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상카라의 개혁적 성향을 두려워한 우에드라고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방문한 직후 상카라를 가택연금했다. 그러자 대중들은 상카라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와 함께 당시 차드를 방문하고 있던 리비아의 카다피의 지지를 얻고 쿠데타를 일으켜 우에드라고를 축출하였다. 이후 그는 오트볼타의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후 상카라는 자신이 구상한 개혁정책들을 추진해 나갔다. 우선 오트볼타라는 프랑스 식민지배 잔재의 국명을 버리고 "부르키나파소"로 개명했다.(부르키나 파소는 현지 모시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그전까지 쓰이던 국기와 국가를 버리고 단 하나의 빛(Une Seule Nuit)이라는 국가를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새 국가를 좋아했을지는 의문이다. 정부가 민중들과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호화 리무진들을 전부 매각하고 값싼 경차(르노 6)로 바꾸었다.

또한 상카라는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통해 부르키나파소의 경제를 일으키려 하였다. 행정개혁을 통해 과감하게 전국을 30개 자치구로 나누고 각각의 자치구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자치구를 관리하게 하는 "자주관리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배이후로 계속 이어져왔던 과중한 인두세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토지 재분배정책을 시행했다.

한편으로 부정한 관리들을 처벌하고[1] 국가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여 도로, 상하수도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었고 각 지역의 특산 수공예 산업 육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사회정책에서도 상당한 개혁적 조치들을 단행했다. 법적으로 일부 다처제를 금했으며,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너무도 가혹했던 풍습인 여성의 할례의식을 금지시켰고 여성의 날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또한 피임을 장려하고 예방접종도 대대적으로 시행했으며 에이즈의 실체를 아프리카 최초로 정부차원에서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황폐화된 부르키나파소의 자연환경을 복구하기 위한 재녹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아니 이 양반 안 한게 뭐야

상카라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부르키나파소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각 자치구에 부여한 자주관리제도는 성공적이어서 그 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부족갈등이 사라지고 토지재분배 정책도 큰 효과를 거두어서 농업 생산량이 두 배 넘게 증가하여[2] 부르키나 파소는 상카라 집권 4년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될 정도로 경제가 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카라의 개혁정책들은 주변국의 독재자들(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 가봉의 오마르 봉고, 토고의 에야데마 등)에게는 위협적으로 비쳐졌다. 이들은 상카라의 존재로 인해서 자국에서도 개혁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권좌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 역시 상카라를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상카라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개혁가였고 미국은 상카라가 부르키나파소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에 반미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퍼뜨릴 것을 우려했다. 결국 부르키나파소 인근 국가들의 독재자들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미국 CIA는 상카라의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3]

상카라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지 1987년 장 지글러를 만난 자리에서 "체 게바라는 몇살까지 살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4] 또한 체 게바라 20주기 추모식에서 그는 "혁명가 개인을 죽일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상은 죽일 수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87년 10월 15일, CIA에 포섭된 블레즈 콩파오레는 반혁명 쿠데타를 단행했고 상카라는 맞서다가 결국 수도 와가두구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해되고 말았다. 블레즈 콩파오레는 상카라를 살해한 이후에 대통령직에 올랐고, 자신이 토마스 상카라를 살해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고 우기면서도 그간 실행되어가던 개혁정책을 하나 하나 중단시켜나갔다.

상카라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죽음 이후 세계 최빈국으로 추락한 부르키나파소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상카라 사후 그의 개혁정책들은 모두 후퇴했고 상카라 집권 이전으로 돌아갔다.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웃의 코트디부아르로 나갈정도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5] 한편, 블레즈 콩파오레는 이러한 형편없는 경제실적에도 부정선거와 편법을 통해서 27년간 장기집권을 해왔다. 2014년에 임기연장법안에 분노한 시민들과 군부에 의해 쫓겨났다. 새로 들어선 신 정부에선 토마스 상카라와 그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을 할 방침이다.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아프리카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때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둘수 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1. 다만 이 과정에서 인권침해적인 일이 많이 발생하다보니 뒷 말이 많았긴 했다. 국제사면위원회나 옥스팜, OECD에서 이 문제로 토마스 상카라를 까댈정도.
  2. 농업생산량을 보면 헥타르당 평균 1.7톤을 생산했었던 것이 헥타르당 3.8톤으로 증가했다.
  3. 당시의 미국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소련과 중거리핵포기조약을 맺어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이 공으로 2011년 갤럽 여론 조사에서 링컨을 제치고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창 오바마가 인기 없었을 시절인 건 감안하자 하긴 외교적으로는 국내의 국방비 감축 여론을 일축시키기 위해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지원 등을 한, 제3세계에 있어서는 악당 그 자체인 대통령이긴 했다.
  4. 지글러는 "39세 8개월"이라고 대답했고, 상카라는 그해 38세 생일을 2개월 앞두고 죽는다.
  5. 1987년의 부르키나파소의 1인당 GDP는 303$였고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 수준이 회복된 건 2003년에 이르러서야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