胡廣
(91 ~ 172)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백시(伯始).
남군 화용 사람으로 효렴으로 뽑혀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맡았고 안제는 호광을 천하제일로 여겼으며, 131년에 상서복야를 지내면서 순제가 황후를 세우기 위해 총애하는 귀인 4명 중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4명의 성씨를 모아 신령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신령에게 선택하도록 해 결정하려고 하자 곽건, 사창 등과 함께 덕을 보고 깊이 생각해 뽑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132년에 상서령 좌웅이 인재 등용이나 관직을 물러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상소를 올리자 곽건, 사창 등과 함께 글을 올려 이를 반박했지만 순제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외직으로 나아가 제음태수가 되었다가 여러 군수 십여 명과 함께 인재의 천거를 잘못한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143년 10월 7일에는 대사농에서 사도로 옮겨졌고 146년 2월 26일에 질제가 붕어하자 후사를 논의하면서 이고, 조계와 함께 양기에게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6월 5일에 태위가 되었고 환제의 뜻을 받들어 등무를 쫓아내는 상주문을 올려 등무를 쫓겨나게 했으며, 147년 6월에 태웨에서 파직되었다가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151년 겨울 10월에는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태상에 임명되었다가 153년 10월에는 태위가 되었으며, 154년에 면직되었다가 이후 태상에 임명되고 158년 가을 7월 20일에 태위가 되었다. 환제가 즉위하면서 환제를 옹립한 공로로 안락후에 봉해졌으며, 겨울 10월에 사공이 되었고 유문이 남군의 도적인 유유와 왕래한 일을 이용해 양기가 후사를 세우는 일을 권신인 양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낸 이고가 무고당해 감옥에 갇히고 죽게 되자 조계와 함께 편지를 받아보고 슬퍼했다.
태상을 지내다가 153년 10월에는 태위가 되었고 155년에 면직되었으며, 태상을 지내다가 158년 가을 7월 20일에 태위가 되었다. 159년에 양기가 주살되자 한연, 손랑 등과 함께 양기에게 아부하고 궁궐을 호위하지 않고 장수정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로 사형에서 일 등급을 감해 면직시켜서 서인이 되었으며, 이 일로 옛 관리와 빈객 중에 면직되어 쫓겨난 자가 삼백여 명이어서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
이후 복직되었고 165년에 태상을 지냈고 166년 5월에 사도가 되었으며, 168년에 태부 겸 녹상서사가 되었고 172년 3월 8일에 사망했다. 호광은 태부, 삼공 등을 여러 차례 거쳤고 30여 년 동안 안제, 소제, 순제, 충제, 질제, 환제, 영제 등 역대로 일곱 황제를 섬기면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파면을 당해도 한 해를 채우지 않고 번번이 일찍이 다시 승진했다.
그가 부른 사람 중에는 진번, 이함 등 천하의 명사들이 많았고 경사에서는 만사에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백시(호광)에게 묻고 천하의 중용이라면 호공(호광)에게 있다고 말하는 속언이 있었다. 그러나 온유하고 삼가면서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고 얼굴색을 공손히 해 시대에 아첨하고 충직한 기풍이 없는 지라 천하에서는 호방을 야박하게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