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법전쟁

당시 중국의 판세, 남쪽의 분홍색 지역이 쑨원의 광둥 군정부 세력이다.

1 소개

1917년 10월 6일 돤치루이의 무력 통일 방침에 반발한 남방 군벌들이 반발하여 호법군 사령부를 세우고 반란을 일으키자 무력통일을 원하던 돤치루이와 평화통일을 원하던 펑궈장이 충돌함으로 직계와 환계의 대립이 폭발한 사건이다.

2 배경

2.1 호법운동과 돤치루이 내각의 출범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죽자 북양군벌 내부에서는 그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 군벌들 간에 알력이 발생했다. 6월 7일 국무총리 돤치루이는 신약법에 의거하여 대총통령으로 부총통인 리위안훙을 대행으로 삼았다. 6월 7일에 리위안훙은 대리총통에 취임했고 여기까진 모두가 납득하였다. 하지만 남방의 군무원[1]은 1912년 임시약법과 1913년 10월 4일에 발표된 대총통 선거법에 따라 리위안훙이 선출된 것으로 보았고 베이징의 북양정부는 1914년 12월 29일 위안스카이가 수정한 신약법의 대총통 수정선거법에 따라 리위안훙이 대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신구약법 싸움이 발생하고 구 약법을 따르라는 호법운동이 벌어졌는데 이 호법운동에는 쑨원이 있었다. 상하이에서 국회의원과 혁명당원들이 모여 위안스카이의 신약법은 위안스카이 개인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였고 쑨원은 리위안훙에게 구약법을 회복하고 국회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탕지야오, 잠춘훤 등이 민국 원년의 약법을 회복하고 구 국회를 다시 소집하고 제제 추진파들을 징계하고 군사대책회의를 소집하라는 4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만약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군무원을 폐지하고 서남 각 성의 독립을 취소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돤치루이는 6월 29일 국무원을 소집하여 구약법의 회복과 신약법 폐지를 결정하고 국회를 8월 1일에 다시 소집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제제 추진파들을 징계하겠다며 그 명단을 발표했다. 이에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데 앞장선 탕지야오를 비롯한 서남군벌들은 이를 납득하고 군무원 취소를 알렸다. 8월 1일 임시약법에 따라 국회가 소집되었고 임시약법 체제가 다시 열렸다. 리위안훙이 국회에서 다시 대총통에 취임했고 펑궈장이 부총통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위안스카이의 중화제국 선포로 분열된 것 같았던 중국은 다시 합쳐진 것으로 보였으나 실질적인 권세는 국무총리이자 환계의 수령인 돤치루이에게 있었다. 처음에 돤치루이 내각은 국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돤치루이의 권력 야욕 때문에 돤치루이와 리위안훙은 격렬히 충돌하기 시작했다. 소위 여단지쟁 혹은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양자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으며 1917년의 대독 선전포고 문제로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했고 국회은 돤치루이의 면직을 요구했다. 1917년 6월 23일 리위안훙은 돤치루이를 면직해버리고 오정방을 총리대리로 삼았다. 이 와중에 장훈복벽 사건이 일어나서 전국이 떠들썩해지기도 했다.

2.2 호법정부의 수립과 남북대립

장쉰이 변자군을 일으키고 청실을 복고하자 돤치루이는 토역군 사령관이 되어 이를 진압하였고 북양정부는 대총통에 펑궈장, 국무총리에 돤치루이를 선출하여 다시 돤치루이가 권세를 잡았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이 해산해버린 구 국회에 대해서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법은 필요치 않다. 국회는 필요치 않다. 옛총통도 필요치 않다."라며 안하무인으로 무시하여 쑨원 등의 큰 반발을 샀으며 여세를 몰아 독일에 선전포고하였고 이를 빌미로 참전군이란 군대를 만들어 자신의 세력을 크게 강화했다. 그의 독단적 행동에 펑궈장을 비롯한 직계 군벌들은 불만을 품었다. 펑궈장은 강소, 강서 등지에 자신의 사람을 심었고 돤치루이도 지지 않고 호남, 사천에 부하들을 배치하여 대립했다. 동시에 돤치루이는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그것으로 무장을 강화한 다음에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하려 했고 이를 경계한 펑궈장은 서남 군벌들을 끌어들여서 돤치루이를 견제하려 했다. 돤치루이는 호남을 거쳐 양광을 점령하여 남방의 호법정부를 해체한 다음에 그 여세를 몰아서 운남, 귀주까지 모두 장악할 심산이었다. 당연히 그의 무력통일 계획에 서남 군벌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량치차오 등은 장훈복벽으로 중화민국은 한번 멸망한 것이니 새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신해혁명의 전례에 따라 임시참의원을 소집하고 국회조직접과 선거법을 다시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돤치루이는 이를 수용하여 1917년 11월 10일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1918년 2월 국회조직법과 의원선거법을 제정, 공표하였다. 이때 환계의 왕읍당 등은 직계에 대항하여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1918년 3월 8일 안복구락부를 만들었고 1918년 8월 12일 선거에서 470석의 의석 중 342석을 이들 안복계가 차지하였다. 국회가 돤치루이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한편 펑궈장의 임기가 끝나서 새로운 대총통을 뽑아야 했는데 돤치루이와 펑궈장의 대립이 심하여 둘은 자연스레 총통 후보에서 제외되었고 돤치루이의 추천으로 쉬스창이 어부지리로 9월 4일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0월 10일에 취임한 쉬스창은 돤치루이를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후임으로 전능훈을 임명했으나 참전독판이 된 돤치루이가 여전히 북양정부의 실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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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쑨원.

이때 쑨원은 1917년 7월 호법운동을 실시한 이래로 광저우를 근거지로 삼고 호법을 호소하고 있었다. 광서와 광둥의 지배자였던 계계 군벌 루룽팅과 윈난의 지배자인 전계군벌 탕지야오는 쑨원의 명망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는 한편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을 견제하기 위해 쑨원을 지원하였다. 국회의원들도 쑨원에 동조하여 13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이 광저우로 남하했다. 8월 18일 쑨원은 국회의원들의 건의에 따라 정부를 조직하기로 하였고 1917년 8월 25일 비상국회을 개회하여 중화민국 군정부 조직대강 13조를 통과시키고 임시약법 회복을 위해 행동하기로 결의했다. 9월 1일 쑨원이 육해군 대원수로 당선되었고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9월 2일 루룽팅과 탕지야오가 원수가 되었고 내각이 조직됨으로 베이징의 북양정부와 광저우의 호법정부가 대립하는 남북대립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3 호법정부의 약점

대원수 제복을 입은 쑨원.

하지만 쑨원의 호법정부는 독자적인 군사력이 없으며 재정력이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양정부라고 훗날의 장제스나 더 훗날의 마오쩌둥 정권에 비하면 취약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최소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재정과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쑨원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초청한 탕지야오, 루룽팅 등의 군사력에 얹혀사는 처지였다. 즉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퇴출될 수 있었고 나중에 2차례나 그런 일을 겪게 된다. 자신들이 실세임을 아는 탕지야오, 루룽팅 등은 쑨원이 내각도 구성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일삼았으며 호법정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이들은 호법정부를 애초에 이용할 생각이라서 쑨원이 외치는 북벌과 호법운동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쑨원이 푸젠 성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자 이를 방해하며 무산시키기도 했다. 호법정부가 거느린 병력은 기껏해야 쑨원의 친위부대 조금과 약간의 해군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호법정부는 고정된 수입이 없어서 오로지 기부금에 의존하였다. 즉 쑨원의 남방정부는 사실상의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호법군은 명목상 광서사단 4개 사단, 광동사단 10개 사단, 운남, 귀주사단 6개 사단 등 15만 정도의 병력을 갖추었으나 쑨원이 통제할 수 있는 병력은 앞서 설명한 듯이 거의 얼마 되지 않았고 이들은 탕지야오와 루룽팅의 휘하에 속해 있었다. 반면 북양군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돤치루이는 비록 북양군 내부가 직예파, 안휘파, 봉천파 내부로 갈라지긴 했어도 직속에 참전군을 비롯한 강력한 병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북양군벌 전체를 합칠 경우 64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지나친 친일행위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북양군벌 내부의 파벌 갈등 및 관할해야 하는 전선이 너무 넓어 병력이 분산되어 있다는 약점이 있었고 이는 실제로 북양군벌 내부의 파벌 싸움이 심해지면서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4 전개

탕지야오 등은 일찍이 호국전쟁이 터졌을 때부터 사천을 지배하려고 사천 군벌 류존후와 대치하고 있었다. 돤치루이는 류존후와 탕지야오를 모두 날려버리고 자신이 사천을 차지하기 위해 사천성 성장대리 겸 사천독군으로 대감을 임명하여 파견했는데 류존후가 반발함으로 대감과 류존후의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대감은 1917년 7월 전계군벌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사천은 환계, 전계, 사천, 운남, 귀주의 군벌들이 모조리 얽힌 대혼란의 싸움터였다. 그러던 중 장훈복벽 사건이 터졌을 때 탕지야오는 이를 토역한다는 구실로 병력을 모았고 쑨원이 호법운동을 벌이자 이번엔 사천을 차지하기 위해 쑨원을 등에 업고 호법운동과 북벌을 외치고 있었다. 탕지야오는 사천의 안정을 구실로 삼아 사천에 진공했는데 이에 북양정부는 류존후를 사천독군에, 장란을 사천성장에 삼아 탕지야오의 사천 진입을 막았고 오광신이 북양군을 거느리고 충칭을 점령함으로 사천은 북양정부의 휘하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사천군 웅극무가 탕지야오에게 붙으면서 오광신을 축출하고 사천정국각군총사령관에 추대되어 유존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탕지야오는 1917년 12월 15일 충칭에서 전검천 3군 장군회의를 소집하여 정국군을 일으켰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정부 수립 직후인 1917년 9월 18일, 영릉진수사 유건변과 형양의 호남군 여장 임수매가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에 반대하며 자주를 선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자신들을 호법군 호남사령관이라 일컬으며 10월 6일 호법군 호남사령부를 세우고 정잠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북양정부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돤치루이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남하하자 돤치루이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펑궈장 휘하 직계 군벌 범국장과 왕여현은 11월 14일 일방적으로 철수했고 중과부적에 빠진 돤치루이는 패배하여 물러나야 했다. 결국 그는 패전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 자리에서 하야했다.

11월 25일 펑궈장은 정전명령을 내렸고 원래 목적인 사천과 호남을 얻은 탕지야오, 루룽팅도 쑨원의 반대를 무시하고 이에 호응하면서 1918년 2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물러났어도 베이징 정부 내부의 환계는 아직 강성하였고 쉬스징 등이 주도하여 안휘독군 예사충, 산동독군 장회지, 직예독군 차오쿤 등을 사주하여 톈진에서 북양군 독군 회의를 소집, 다시 호법군을 칠 것을 요구했고 이에 옌시산, 장쭤린, 차오쿤 등이 모두 연명으로 호법군 토벌을 건의하여 펑궈장은 하는 수 없이 3월에 돤치루이를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호법군을 공격하였고 3월에 호법군은 호남에서 패퇴했다.

하지만 계속된 내전에 중국 내부에서도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4월 전국상인연합회가 톈진에서 회의를 소집, 정전을 요구했고 10월에는 장건, 채원배 등의 명사들이 평화를 호소했다. 10월 23일 웅희령, 채원배, 장건이 평화기성회를 발의하였고 이에 직계의 펑궈장이 지지를 보냈다. 주전파였던 예사충도 입장을 전환해 평화를 지지했다. 이들은 11월 3일 성립대회를 개최, 각 지역에서 기성회를 성립하여 1919년 3월 2일 전국평화기성회연합회를 개최하였다. 이외에도 평화통이로히, 5족평화합진회 등이 설립되어 평화를 요구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중국 내부에선 전쟁을 그만두고 중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힘쓸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1918년 10월 10일 취임한 쉬스창 총통은 주화를 결정, 1918년 10월 24일 평화령을 선포하고 10월 30일 남북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쉬스창은 여러 독군들을 소집하여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독군단은 남방에서 가혹한 조건을 붙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총통의 방침에 따를 것을 결정, 11월 16일 정전령을 내렸고 남방정부도 호응하여 11월 22일 정전명령을 내림으로 호법전쟁은 끝났다.

5 결과

1919년 2월 20일 남북화의가 개최되었으나 베이징 정부의 태도가 완고하여 4월에 이르러 화의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5.4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에서 빨리 화의를 종결하라는 압력이 들어와 쉬스창은 왕읍당을 대표로 교체하여 회의를 속개하였다. 하지만 남북 모두 서로를 불신했고 남북 내부에도 분열이 일어나 결국 남북화의는 8월에 완전히 결렬되었다.

6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직환전쟁과 봉천군벌의 관내진출, 송한용, 전남대학교
  • 오사시기 중국의 군벌정치와 5.4운동 연구, 최지현, 한국외국어대학교
  • 민국 원년을 전후로 한 ‘약법’과 손문의 호법운동, 이승휘, 명지대학교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7 관련문서

  1.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포한 각 성이 광둥에 모여 위안스카이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조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