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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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사업가.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 초대 회장

6.25전쟁 발발 당시 20세였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한 후 보병학교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잠시 육군본부 감찰실에서 대기 중이었던 상태였다. 서울에 있던 그는 한강다리가 폭파되어서 고립된 서울을 떠날 수 없었고, 친구집에 숨어있었다. 일단 의용군에 들어가 탈출하려고 공산당 간부인 친구의 형의 보증을 받아서 북한군으로 들어갔다. 이후 북한군의 남하를 따라 내려오던 중 낙동강 전선 9월 총공세 작전에 대한 정보를 입수, 탈출하여 국군과 유엔군에게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방어작전에 성공한 후 오히려 간첩으로 몰려 구타와 고문 협박등을 당하고 결국 사형판결을 받는다. 나중에 무기징역, 최종으로는 10년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55년 5년 복역 후 가석방으로 나오고 가정을 꾸렸는데 가족들에게는 지난 5년간의 일을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감시 속에서 그는 시멘트 공장과 석산등에서 일하다가 1973년 12월 유신정부가 좌익 경력자 예비 검속을 위한 ‘사회안전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식료품점과 식당 등을 운영하며 정착했다. 나중에 버클리 대학 체육지도사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1989년 정보제공자가 자신이 아닌 북한군 소좌 김성준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수십년에 걸쳐 자신이 간첩이 아닌것과, 국군에 큰 정보를 제공한 사실을 밝혀달라고 재심을 요청했으나 묵살 당하다가 결국 2013년 2월 13일 무죄판결을 받는다. 2014년 6월 24일 국가로부터 4억원의 보상을 받게되었으나 80대 중반나이에 돈은 중요하지 않고 사회환원계획이 있으며 내가 원하는것은 내가 제공한 정보가 국가에 도움이 되었다는것을 인정받는 것이라며 항소를 하였다.


그는 한국프로야구창설에도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1975년 11월 귀국해서, 한국에도 미국처럼 여가선용을 위한 프로스포츠가 있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의견을 모았다. 추진비용 20만 달러를 마련하려 미국으로 돌아간 뒤 다음해 다시 한국으로 와서 가칭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직에 올랐다. 1976년 2월 청사진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의 반대와 대한야구협회의 비협조로 프로야구창설은 무산되고 말았지만 홍씨가 만들어 놓은 '한국성인야구재건안(한국직업야구계획)'을 토대로 1982년 마침내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할 수 있었다.


자료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128993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64703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8&aid=0002995206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29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