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희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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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熹皇后 鄧氏

후한 화제의 두 번째 황후이자, 후한 왕조에서 임조칭제하였던 두 번째 황태후.

화희황후 등씨의 이름은 수(綏)이고, 화희(和熹)는 시호이다. 후한(後漢) 화제(和帝)의 두 번째 황후로 <후한서 황후기>에 기록이 남아있다. 태부(太傅) 등우(鄧禹)의 손녀이자 호강교위(護羌校尉) 등훈(鄧訓)의 딸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공(女工)보다는 유학(儒學)에 관심을 보여서, 집안 사람들이 그녀를 제생(諸生;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화제 영원(永元) 7(95)년,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갔는데 미색이 출중하니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이 되었다. 항상 공손하고 조심스러우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고, 황제의 후사가 많지 않음을 염려하여 자주 재인(才人)을 뽑아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의 총애가 더욱 커졌다. 이때 정후(正后)였던 화제황후 음씨(和帝皇后 陰氏)는 등씨를 질투하여 무고하고 저주하다가 폐위되니, 등씨가 정후가 될 수 있었다.

화제 원흥(元興) 원(105)년, 화제가 붕어하고 태어난 지 100일 밖에 안된 상제(殤帝)가 즉위하니 황태후(皇太后)가 되어 임조칭제[1]하였다. 상제는 즉위 1년을 간신히 넘기고 붕어하니, 공석이 된 제위에 안제(安帝)를 옹립하고 여전히 임조칭제하였다.

그녀는 유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어서 비교적 덕정(德政)을 펼친 편이었다. 외척들의 발호를 항상 경계하였고, 재물을 아끼는 등의 훌륭한 조처를 내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황제만이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권능을 많이 침해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한나라 황실의 역대 황제들이 모셔져있는 태묘(太廟)에 대한 제례를 등씨 본인의 주도로 이루어진 점, 황태후 명의의 조서로 사면령을 발한 점, 자신의 친족인 외척 등씨일가 뿐아니라 황족인 유씨에 대한 통제를 가한 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임조칭제하였던 황태후들의 전형적인 통치 행위이다.

화희황후 등씨는 약 17년 동안 임조칭제하였는데, 후한이 존속한 196년의 약 8.67%에 해당하는 긴 시기였다.

안제 영녕(永寧) 2(121)년 3월에 붕어하니 나이 41세였다.
  1. 臨朝稱制;수렴청정-섭정과 동일한 의미, 조회에 임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칭한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