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가 유즈루

平賀讓
1878년 3월 8일 - 1943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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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인, 공학자이자 교육자이다.

1 생애

1878년에 도쿄에서 출생. 1898년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조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 양친의 사망으로 인해 집안이 곤궁해지자 해군의 조선학생 응모시험에 합격하여 학비를 만들었다.

1901년에 해군 조선기사(중위)로 해군에 입대하여 요코스카 해군공창에 착임하였다. 1905년 영국 왕립 그리니치 해군대학 조선과에 유학하고, 1908년 동 학과를 졸업하고 유럽의 여러 조선소들을 견학한 후에 1909년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해군함정본부의 부원 및 도쿄제국대학 강사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1918년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이듬해에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히라가는 1916년부터 88함대의 기본계획 작성에 참가하여 1920년 88함대의 예산 성립과 동시에 설계를 담당하는 제4부 부원으로서 계획주임으로 발탁되었다. 2년후 해군 조선소장으로 승진하였으나, 1922년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의 발효로 인하여 88함대 계획은 취소되고 1923년 1년간의 해외시찰에 나섰다. 귀국후 1년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1925년에 해군장관에게 시찰보고서를 제출한 후 원래 보직인 제4부가 아닌 해군기술연구소 소장겸 조선연구부장에 취임하였다. 1926년 조선연구부장에서 해임되었지만 해군중장으로 승진하였다.

1928년 폐함된 구축함을 실험함으로 사용하여 선체 저항을 실험하였고, 이를 정리한 논문은 영국 조선협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1935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협회에게서 금메달을 받았다. 1929년에는 설계부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고 대체함을 개인적으로 설계시안을 작성하여 해군기술회의에 제출하였다.

1931년에 예비역이 되고 미츠비시 조선(나중에 중공업으로 개칭)의 고문으로 취임했다. 1934년 발생한 수뢰정 토모즈루 전복사고로 인하여 설치된 임시함정성능조사회에서 함정 복원성 개선을 지도하였으며 다음해 발생한 제4함대 사건에서는 용접사용의 제한을 제안하여 1936년 실질적인 용접전폐에 이르게 하였다.

1938년 도쿄제국대학 총장에 취임하고 이듬해 히라가 숙학을 발동, 경제학부 교수들의 대립을 문제를 일으킨 파벌 교수들의 사직으로 해결했다[1]. 이후에도 계속 총장으로 재임했으나, 1943년에 결핵으로 인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히라가의 뇌는 적출되어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보존하고 있다. 뭐하러 보관해 ㅅㅂ..

2 평가

유학 후에 함정본부에서 설계에 종사하고 제4부 계획주임으로 기이급 전함, 유바리급 순양함, 후루다카급 순양함, 센다이급 순양함, 묘코급 순양함 및 가미가제급 구축함과 와카다케급 구축함의 설계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경량화 구조 설계로 외국 해군 조선관들의 주목을 받는 등, "조선의 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군 중심부나 다른 조선관들의 반대 의견에는 완강히 양보하지 않아서 "平賀不讓"으로 비아냥 받았고, 업무상의 문제로 충돌이 생길 때는 논의의 상대가 누구든 호통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바로 빨갛게 달구어진다는 의미에서)"니크롬선"이라고도 불리었다. 이러한 태도는 주위의 반감을 사게 되어 한때 좌천당하기도 하였다.

직무에는 열심이어서 해군 근무시 사복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지 않거나 식사도 잊고서 설계작업에 몰두하였지만 집안에서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체 하지도 않았으며, 휴일에는 목욕, 장기두기, 영화감상 등으로 보내거나 국화재배에 몰두하였다. 1200 가까운 국화송이를 재배하고 몇 차례 상도 받는 등 국화재배에는 프로급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지식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쾌활한 면도 있어서 총장 재임시절 쇼와 덴노에게 강의할 때는 소매에 글을 적어 놓고 "난생 처음으로 컨닝을 했다"고 기자회견장에서 발설하여 회견장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동안 육군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대학내 영어 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었고, 도죠 히데키 총리의 졸업식 참석은 끝까지 반대하였다. 결국 참석한 도죠가 웅장하지만 공허한 연설을 한 반면, 히라가는 개전 이래의 들뜬 분위기를 부정하고 미국의 공업력과 학문적 실력을 인정하면서 " 공적을 다투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다툰다는 뜻인 것이다. 이를 숭상하는 것은 나라를 잘못되게 한다"고 발언하여 은연중에 군부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2.1 비판

1916년 함정본부 제4부장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카이조가 구상한 88함대 설계안은 41cm 연장포탑 58기를 동시에 조달하여 전함 12척을 만드는 등 건조비 절감과 공사기간 단축을 노린 것으로 이는 순양함과 구축함에게도 적용된 개념이었다. 그런데, 히라가는 카가의 설계를 연장포탑 2기 3연장 포탑 2기 조합으로 변경하자고 제안하였다. 선체를 소형 경량화하고 운행을 안정화한다는 이점은 있지만, 양산효과를 망치기 때문에 야마모토에 의해서 거부되었다.[2][3][4]
계획주임이 된 후에는 기이급 전함의 현측 주장갑의 두께[5]를 증가시키고, 센다이급 순양함의 보일러를 석탄-중유 혼소식으로 바꾸고 안정성 증가를 이유로 구축함의 선체 폭을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야마모토 카이조의 함형 정리에 따른 양산 효과 증대를 부정한 것이어서 최종적으로 88함대용으로 건조된 5500톤 순양함은 20척에서 12척으로 줄어들고, 구축함의 속력도 2~3노트 저하되었다.

3500t으로 5500t의 순양함과 같은 전력을 발휘하려고 한 경순양함 유바리는 예정 중량을 10퍼센트 초과하면서 속력이 감소하였으며 함정 규모가 부족한 것으로 인하여 악천후 항해성능이 열악하였으며 경순양함의 임무인 수뢰전대 사령부의 기능과 인력의 여유가 부족한 현상이 일어났으며, 항속력 부족(14노트 3300해리. 참고로 5500톤 순양함은 15000해리)및 항공기 운용 능력의 부재를 초래하였다.[6]

후루타카급 순양함은 20cm포 단장 6문의 장전에 있어서 함정본부 제1부의 반대를 누르고 인력장전을 채용한데다 포탑내 즉응탄도 10발로 제한하여 지속사격시 급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예정 배수량 7500t에서 1000t을 초과하면서 속력도 감소하였다.

묘코급 순양함의 설계에 있어서는 조약체제하에서는 전함의 보유가 제한되기 때문에 20cm포 장비형 순양함은 준전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여서 결국 20cm포 10문에 어뢰병장을 전폐하는 설계로 만들었다[7] 이는 함을 실제로 운용하는 군령부와 연합함대의 의사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8]. 결국 히라가의 설계는 화력과 방어력 에서 확실히 타국의 조약형 중순보다 뛰어난 것이었지만 그마저도 배수량 초과에 따른 것이어서, 결국 조선소 현장에서 온갖 시행착오 끝에 개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히라가의 이러한 실태를 더 이상 감싸줄 수 없게 된 야마모토 카이조는 결국 히라가를 계획주임에서 해임하고 해외 기술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외유를 보내고는 해군에서 퇴역하였다. 그리고 후임자인 후지모토 기쿠오가 수행한 최초의 업무는 묘코급 순양함에 어뢰병장을 추가하는 일이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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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한 이후에도 히라가는 함정본부의 공식 설계안과는 달리 개인적인 설계안을 작성하고 공고 대체함의 설계를 심사하는 해군기술회의에 이를 제출하여 회의를 혼란 상태에 몰아 넣었다[10]. 조약 실효와 동시에 선체를 연장하여 18인치포 연장포탑 4기 전함으로 개수한다는 함정본부의 공식입장[11]인 후지모토안과는 달리 얼핏 본다면 16인치 연장 2기 3연장 2기에 집중방어구조라는 보수적인 설계안은 파격적인 후지모토안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포곽식 부포의 배치 및 여분의 사격 지휘소가 부재한다는 등의 약점도 보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12]

1932년에는 해군 일각에서 제기되어 채용직전까지 갔던 구축함의 주포를 대공-대함 모두 쓸 수 있는 고각포화하자는 제안을 일축하여 폐기시켰으며,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구축함들의 대공 전투에 심각한 열세로 작용하였다.[13]

도모즈루 전복사고 대책에 분주하던 후지모투 기쿠오가 급사한 후 후임으로는 동갑의 에사키 이와요시와 후쿠다 케이지가 올랐지만 히라가의 제자인 후쿠다가 계획주임에 임명되었다. 그 해 7월, 특형 구축함이 너울에 의해 선체에 주름이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조사한 마키노 시게루 조선소령은 선체 강도상의 중대한 결함으로, 동형함 모두를 입거 수리를 하자고 상신했지만 수락되지 않고 정기 수리로 대응할 예정이었다. 9월에 제4함대 사건이 발생하자, 히라가는 마키노의 상신을 묵살한 다음, 후지모토와 콤비를 끼고 있던 에자키를 "사전 조치를 도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레 공창에 전출시키는 사령을 내고 에자키에게 "장래를 생각한다면 민간 회사로 옮기면 어떨까"라고 "충고" 했다고 한다.


히라가는 영국을 비롯한 해외의 군함 설계에서 사라지고 있던 선체 중심선 격벽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데, 선체가 다소 공고하게 된다는 장점과 함께 어뢰 명중 등으로 침수가 발생할 경우 선체 중심의 격벽으로 막히면서 편현으로 침수과 집중되어 용이하게 경사, 침몰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약점이 있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중 일본 순양함들은 한발 정도의 피뢰(어뢰 명중)에서 빈번히 경사, 전복하는 등 비교적 손해가 많았다.

게다가 야마토급의 설계에서는 대미지 콘트롤에 관한 연구를 태만히 하여 야마토급의 방수격벽은 나가토급과 같은 23개에 불과하였다.

또한 용접 공법과 블록 건조 공법, 디젤 기관 등 신기술의 도입을 반대[14]하고 리벳팅과 같은 피탄시 손해가 많거나 건조시 낭비가 많은 기술을 고수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선소 현장에서는 자신의 설계상 실수로 인한 중량 증가나 공기 지연 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지도했다고 한다.


히라가보다 연상이면서도 1950년대까지 살아남은 야마모토 카이조는 일본해군의 패전 원인 중 하나로 자신이 등용한 히라가의 독단에 가까운 행태로 인해 일본 해군 군함들의 성능이 낮아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일본 조선협회가 자신을 명예회원으로 추대하려는 것에 대하여 맹렬히 반대하고 결국 추대되자 기어이 협회를 탈퇴하였다고 한다.


일본 내에서 히라가는 꽤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일본 군함연구가들의 시각차이에서 기인한다. 후쿠이 시즈오와 같은 군출신 기술사관들은 히라가에 대해 일본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신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엔도 아키라와 같은 연구가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히라가를 깎아내리고 훨씬 우수했던 후지모토 기쿠오를 정치적으로 매장한 부정적인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다.[15]
본 문서는 일본 위키피디아 히라가 유즈루 페이지를 거의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다른 일본 사이트에서도 비판일색의 이 페이지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위키피디아 문서에도 "독자연구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와 "참고문헌과 출전이 불분명하다"는 틀이 붙어있으니 너무 맹신하지 말고 가려서 읽고 평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저서

『平賀譲遺稿集』(牧野茂 監修・内藤初穂 編 出版協同社、1985年) ISBN 4-87970-041-X

또한 디지탈 아카이브가 존재한다 : http://rarebook.dl.itc.u-tokyo.ac.jp/hiraga/index.html
  1. 문부성의 대학내 간섭 압력과 경제학부내 파벌 다툼으로 인해 전임자인 나가요 마타로가 사임한 후, 히라가가 물방에 오르자 제일 심하게 반대한 학부가 공학부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공학자를 지저분한 파벌 항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써먹으려다가 히라가의 명예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으로, 히라가의 총장 취임을 위해서 법학부가 나서서 공학부 교수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2. 심지어 히라가는 나가토급 2번함 무츠의 설계를 변경하여 주포를 3연장 2기 연장 2기로 변경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3. 이러한 설계는 미국이 네바다급 전함에서 채택했다. 근데 네바다급 전함은 3연장 포탑을 시험하는 프로토 타입의 성향이 강했다.(실제 미국은 사우스다코다급(1920)에 3연장 16인치 주포 4기를 올리기로 했다.)
  4. 꼭 나쁜 건 아닌게 이러한 배치는 3연장포 개발의 초석이 되어 높은 방어력과 화력을 가진 전함을 생산할 수 있고 기존 2연장 포 5기의 문제점인 '3번 주포탑의 유폭 위험과 사격 각도의 280°제한'을 해결할 수 있다. 이건 오히려 잘한 점.
  5. 강화해도 타국 전함에 비해 얇다. 이는 HMS 인컴페러블과 비슷한 두께로 어드미럴급 순양전함보다도 얇다.키이급 전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조해도 순양전함 수준 방어력인 놈인데, 원래대로 했다면 적의 14인치 포 탑재 전함의 포(대표적으로킹 조지 5세급 전함)도 방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참고로 KGV의 포는 22km에서 현측장갑 280mm을 관통하고 25km에서 갑판장갑 125mm을 관통하니 일제사격으로 키이를 굉침내지 대파시킬 수 있다. 그런데 키이의 포로는 20km에서 KGV의 장갑에 피해를 많이 입히지 못한다.)
  6. 그러나 유바리 자체가 실험함적인 성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나중에 일본해군 중순양함 건조에 많은 기술적 참고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의의는 중대하다고 보는 의견이 다수이다.
  7. 사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일어난 해상전투에서 중순양함의 어뢰병장이 실전에서 도움이 된 일은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 없었고, 주포 만이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는 히라가의 견해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조약형 중순중 중반기와 후반기 설계함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조약형 중순이 어뢰병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히라가의 발상은 당시 순양함의 이념과는 좋게 말해서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신에 이상이 있는지 의심될 판이었다.
  8. 원래 군령부와 연합함대등 용병측은 8인치포 8문에 어뢰병장 필수 였다.
  9. 그 결과 함내 거주성이 열악해지고 말았다. 원래 거주구역이던 곳에 억지로 어뢰발사관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10. 일설로는 히라가는 해군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도고 헤이하치로와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의 전함 취향에 부합하는 설계를 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심사에 참가한 것이라고 한다.
  11. 이는 일본 군함연구가 엔도 아키라의 주장으로 사료와 근거가 부족해 정설은 아니다.
  12. 비판측에서는 "배는 잘 만들지만 정작 군함은 못 만드는 조선관"이라고 야유하기도 한다.
  13. 그러나 히라가가 구축함 주포의 고각포화를 폐기시켰다는 1932년은 히라가가 해군에서 퇴역한 다음해이기 때문에 과연 퇴역 장군에게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을지 의심하는 이들도 많다.
  14.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확립된 사실이지만, 1920년대까지 제조된 강재로는 용접 상태가 불량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해결할려면 용접 특성에 맞는 고장력강을 도입해야 한다. (현재는 KS규격 강재만 해도 일반구조용 SS계와 용접구조용 SM계가 나뉘어져 있다.) 미국도 리버티/빅토리 선의 건조에서 기존의 강재로 용접을 실시하자 용접품질이 낮아진 탓으로 한랭한 해상에서 선체에 균열이 발생하는 등의 피해가 속출하였다고 하며, 용접 전폐를 주장한 히라가의 발상은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합리적인 것이었다. 사실, 일본 해군은 나중에 용접으로 선체를 만들어야 하는 잠수함을 위해서 고장력강의 개발에 나서서 먼저 저렴하면서도 고품질인 고장력강을 대량 양산하는데 성공한 독일의 기술도 도입하는 등 많은 노력끝에 자체적인 고장력강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15. 엔도 아키라는 이것이 심해 2ch 군사판과 같은 곳에서 히라가와 그 제자인 후쿠다를 깎아 내릴 수 있으면 뭐든지 한다, 저서의 문맥에서 히라가를 증오하는 냄새가 팍팍 난다는 평가까지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