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호

틀:코레일의 열차 등급


역관광호
신칸센 0계
신칸센+기관차
구원 0계
관칸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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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진 및 관광호 역사 참조
과거에 존재했던 한국 철도의 열차 등급. 1969년에 등장해서 1974년 새마을호로 이름이 바뀐, 즉 새마을호의 전신이다.

흔히들 저 사진을 보면서 "할 게 없어서 신칸센이나 따라하던 흑역사"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사실은 그보다 꽤나 복잡한 사연이 있는 열차인 것이다. 1970년대의 마인드와 자금사정으로 어떻게든 선진국 형태의 철도를 구현해보려고 했던 당시 철도청의 고민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1]오구오구 우리 철도청

부산역 1번 승강장이 관광호 전용 승강장이었고 KTX가 개통되고 새마을호ITX-새마을로 바뀌었음에도 지금도 전용 승강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VVIP급 고객의 계단 수고를 덜기 위한 배려.(...) 그런데 ITX-새마을은 말만 새마을호 계열이지 럭셔리함은 온데간데 없다[2]

2 구조

특이점으로 "고급 of 고급"을 표방하면서 객차를 국산객차가 아닌 전부 일본산으로 질렀다. 이때 원조자금이라든가 이런 게 아닌 정부보유외환자금을 사용해서 정식으로 사왔다고 한다.

식당차 운용에다가 차축발전기로 선풍기 돌리고 간신히 전등이나 켜던 시절에 전용 발전차를 달아놓고 에어컨[3][4](!)을 장비했다. 거기에 이후 새마을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전용 컴파트먼트[5]까지 딸린 초호화 열차였다. 이 과정에서 흔히 "신칸센 기관차"라고 하는 위 사진속의 기관차가 등장했는데, 저런 괴악한 물건이 등장한 이유가 바로 객차를 전부 일본에서 들여오면서 디자인까지 같이 의뢰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자세한 내막은 불명이지만). 저 기관차는 한동안 관광호 전용 견인기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전두부를 뜯어내고 보통의 7500호대의 호랑이 도색(검정+주황 줄무늬 도색)으로 재도색돼서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저 기관차가 있던 당시에도 관광호 견인에는 저 짝퉁 신칸센스러운 물건보다는 호랑이도색 기관차가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1971년에 7100호대 기관차가 들어오면서 일부 기관차에 흰색+파랑색의 관광호 견인기 도색을 해서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위 사진속의 기관차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참고로 사진의 기관차는 7500호대이다.

좀 더 자세한 관광호 내부묘사와 당시 상황에 대해 잘 나온 신문기사가 있다.

2월 8일 하오 1시 20분 -「관광호」가 시험운행을 시작함으로써 24년 만에 우리나라에 1등 객차가 부활되었다.「살롱·카」「비즈니스·룸」등「딜럭스」시설을 갖춘 이「달리는 응접실」은 오는 4월부터 경부(京釜)간을 4시간 45분에 달려「꿈의 초특급」구실을 할 예정.

엷은「오린지」빛 바탕에 하늘색 띠를 두른 이「딜럭스」열차는 특1등 1량, 1등 8량,「살롱·카」1량, 발전차 1량 모두 11량으로 편성된 호화판 객차로 우선 그 내부시설을 살펴보면 -

◇ 특1등 = 푸른「카페트」가 깔려 있고 전기「히터」32개와「쿨러」(냉방시설) 6개가 달려 있어 자동온도조절. 좌석마다 안내원을 불러낼 수 있는 초인종이 달려있고 베개, 휴지통, 간이탁자 등이 있다. 뒤에 마련된 3석의「비즈니스·룸」에선 사무를 볼 수 있는 탁자와 칸막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변소는 양식(洋式).
◇ 1등 = 종래 1량에 72좌석이던 2등에 비해 좌석 56개로 좌석 간격이 넓어서 좋다. 모든 시설이 특1등과 같으나 초인종,「비즈니스·룸」, 베개가 없으며 변소는 재래식.
◇ 발전차 = 종래의 객차발전은 객차마다 직류전원이 달려 있었으나「관광호」엔 따로 발전차량을 달아 4백kw의 발전량으로 전력 공급. 이 전력은 2천 세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것.

이「관광호」의 모든 객차, 발전차는 새로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총 236량)「관광호」의 도입값을 따져보면, 특1등 1량 2,250만원, 1등 8량(1량 2천만원) 1억 6천만원, 발전차 1량 3,598만원,「살롱·카」1량 2,520만원으로 총 2억 4,368만원이 된다. 가위 시설뿐만 아니라 가격면에서도「수퍼·딜럭스」열차.
철도청은 관광「시즌」에 대비, 외국인 국내관광객이 단체로 이용할 때에는 전세 운행도 할 방침. 한편 이「관광호」의 운행에 앞서 철도청은 12만 7천 입방m의 도상(道床)자갈을 보강하고 경부간만 약 12만개의 PC침목을 바꾸어 끼어 침목의 84%를 PC화 했다. 또 앞으로 1등 객차엔 그 시끄럽던 이동판매원을 타지 못하게 할 방침이라고.
8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떠난「관광호」의 행운의 첫 시승(試乘)기관사는, 서울은 경력 15년에 32만여km를 무사고로 달린 김교원씨(서울기관차사무소소속), 부산에선 경력 16년에 70만km를 무사고로 달린 이동진씨(부산기관차사무소소속)가 몰았다.
시승 당일 철도청은 국내외 귀빈들을 초청, 시승케 하고 여행용「백」, 기념「메달」, 맥주,「토스트」,「코피」,「카라멜」, 신탄진 담배, 과자 등 푸짐한 선물. 여기에 든 비용만 6백만원이란 얘기다.
운행 도중 시승권 추첨놀이를 하여 가수 김「세레나」양이 추첨결과 1등 1377번의 이한용씨가 당첨, 3개월간 전선(全線)무임승차권을 받고 2등은 1258번, 3등엔 1053번 등이 각각 당첨.
최연소 시승객은 L국회의원의 아드님인 6살짜리 꼬마. 이 꼬마귀빈은 수원역을 지나자 그만 잠에 골아 떨어져「카라멜」을 손에 쥔 채 특1등객차 2좌석을 점령하고 단잠에 녹아 떨어졌다.
한편 철도병원에서 나온 의무반(의사 1명, 간호원 2명)에 첫 신세를 진 사람은 17세의 소하물(小荷物)운반원 서(徐)모군. 서군은 소하물을 나르다 왼손 식지 끝을 다쳐 응급처치를 받았다.
김기형 과기처장관, 이훈섭(李勳燮) 철도청장, 김「세레나」양이 한편에서 한담을 나누는가 하면 가수 최희준,「디자이너」「조세핀」조(趙), 김비함씨 등이 모여 앉아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지만 경부간 특1등 4,700원, 1등 4,200원으로 보리쌀 한 가마 값이 넘는 이 엄청난 운행요금은 서민(庶民)들에겐 아직 그림의 떡.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2.1 객차등급

2등칸 3등칸같은 근성없는 등급은 다 짤라버리고 특1등칸과 1등칸(...)이라는 구성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서울역-부산역 요금은 특1등칸 4700원, 1등칸은 4200원. 2000년대 물가로 치면 서울-부산간 요금이 25만원정도 하는 셈이다. 2015년 기준으로 서울-부산간 KTX 특실 왕복요금이 16만 7400원이고, 김포-김해간 국내선 비즈니스석 항공권이 27만 2400원, 김포-제주간 국내선 비즈니석 항공권이 29만 6400원이므로 지금 물가로도 충분히 사치스러운 가격인데다가 관광호 내부에 달린 에어컨이란 물건 자체가 가정에 거의 보급되지 않던 60~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수준을 감안하자면 1%만을 위한 열차인 셈. 이 당시에 국내에 에어컨이 달린 곳이라면 연구소(극히 일부), 병원 특실, 외국계 특급호텔, 경주 석굴암, 관광호, 여객기[6], 그정도 뿐이었고 청와대조차 에어컨이 없었다.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는 것부터 지금으로 따지면 금수저만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이다. 고속버스도 그 당시에 에어컨이 있다보니 부가가치세 과세대상, 즉 초호화 교통수단이었고 관광호와의 직접 경쟁 대상이었다.

관광호 타봤다거나, 80년대에 새마을호를 타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로서는 금수저 반열에 오를 만한 사람들이었다 보면 될 정도로 수준높은 기차였다.

3 새마을호 개편 후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편되고 객차와 기관차들이 그대로 인수인계되었으며, 새마을호로 개명이후에도 동일한 형태의 객차는 1982년까지 꾸준히 도입되었다. 1986년 유선형 새마을호와 1987년 PMC 신형 기동차가 도입이후에도 대부분 새마을호로 운행하다가 1994년에무궁화호 특실 객차로 전환[7]되어 사용되다 내구연한이 도래하여 퇴역된다.[8]

직각 새마을호 시절 차량 중 1982년 12월[9]에 제작된 마지막 한 대가 2007년 12월 까지 현역으로 영업 운행에 투입되었다. 옛 정선아리랑유람열차의 객차가 그 주인공으로, 정선아리랑유람열차의 운행중단 이후[10] 2008년 당시 로지스에서 갑자기 조회결과가 사라져 한때 폐차설이 돌았으나 현재는 아우라지역에서 정선 농산물 식품 홍보관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4 차량의 명칭에 관하여

당시 철도를 잘 모르는 동호인들이 직각형 새마을호 차량 전체를 싸잡아 관광호라고 부르는데 이는 적절치 못하다. 직각형 새마을호 차량 상당수는 74년 새마을호로 개명된 이후 82년도까지 도입되었으며 제작연도가 차이나는 만큼 스펙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이는 마치 351000호대 전동차 중 수인선 뱀눈이까지 전부 싸잡아 2030호대 전동차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1. 경향신문이 관광호를 비판하기도 했는데 1969년 5월 1일 철길을 횡단하던 농부와 충돌하는것을 막으려고 급정차하다가 탈선한 사고를 예를들며 선로개량등의 조치없이 운행속도를 높이는것은 모험이라고 비판했으며철길에 있던 농민이 잘못아닌가? 철길에 있단거 자체가 철도안전법 위반인데..?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3등석이나 2등석을 폐지한것은 서민들에게 철도이용을 어렵게하며 소외감을 준다고 지적했으며 초특급 열차 운행중지와 3등석을 늘리라고 요구했다. 전혀 사고랑 관련 없어 보여서 설득력이 있었을지는 의문.
  2. 사실 새마을호 계통의 편안함은 당시 새마을호가 한국 최고 특급열차이었기 때문이고 현 ITX-새마을은 현 최고 등급이자 고속철도인 KTX를 보완하는 기존선 특급이기 때문에 정체성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돈 있는 사람들은 전부 KTX를 타는데, 코레일이 돈들여 굳이 ITX-새마을을 호화롭고 편안하게 꾸밀 필요가 있겠는가?(...)
  3. 지금이야 에어컨이 최하 등급인 일반전동열차(지하철 포함)나 통근열차에도 다 달려있지만 1970년대 에어컨이라 그러면 부의 상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정말 고급 장비였다. 냉장고도 1970년대에 없는 집도 많았을 시절임을 상기하자.
  4. 여담으로 당시에는 청와대에도 에어컨이 없었는데, 석굴암에는 에어컨이 있었다고... 이는 석굴암의 부실복원에 의한 이슬맺힘을 없애기 위한 조치
  5. KTX-산천에서 부활했다. 요금은 안습...
  6. 정확히는 여압장치. 물론 그 당시 비행기 삯은 말을 말자(...)
  7. 당시에는 구형 새마을호 객차에서 파랑색 도색만 주황색으로 덧칠하면 무궁화호가 될 정도로 도색 디자인이 매우 심플했다. 통일호도 디자인 구성은 똑같아서 그 부분만 녹색으로 칠하면 된다.
  8. 관광호 시절에 제작된 차량은 90년대 초중반에 이미 퇴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 철덕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중 한 량이 시험차 성격으로 무궁화호 도색에 99xxx호를 부여받고 끝까지 살아남았었다고도 한다.
  9. 차번은 11035호였고 마지막으로 생산된 10량의 특실 차량중에서 한대로 최초로 쉐브론고무 에어서스펜션 대차가 적용되었다.
  10. 통일호 등급으로 출범했지만 2004년 3월 통일호 등급 폐지 이후 통근열차로 재조정되어 2007년 12월 31일까지 운행되었고, 운행종료 이후에는 평범한 무궁화호 열차로 제천 - 아우라지 간을 2015년 1월 초까지 운행했고, 이제는 그 역할을 정선아리랑열차(A-Train)에 인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