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한국)/역사

1 진보신당 (2008년~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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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민주노동당 분당의 근본적인 이유는 노선에 따른 구조적 차이였다. 민족해방파(NL)의 경우 지도자 1인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한다. 강력한 집권층에게 선거로 권력을 위임하고, 일단 위임했으면 끝까지 밀어주는 것이 NL의 방식.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당연히 지도부가 거의 모든 권력을 누리게 되므로 많은 병폐를 낳을 수밖에 없다. 반면 진보신당 및 민중민주파(PD)는 지도부를 정책 실행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며,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인물보다는 노선과 정책이 중요하여, 인물이 노선과 정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당연히 노선과 정책을 우선시한다. 이런 성격상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으나, 의견 하나 내는 데 시간을 다 잡아 먹는 안습한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민주노동당의 NL계는 NL과 PD의 동거만으로 한국 진보정치를 낙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나, 당내 PD계는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과거의 운동 노선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제기된 구호가 바로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였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수호하는 데 더욱 충실하면서도, 생태주의와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태주의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평화주의, 소수자 운동과 결합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른바 전통적인 자민통(NLPDR)노선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민통 계열인 NL계는 민주당과의 선거 연대를 통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평등파인 PD계는 사회주의 이념의 재구성을 통한 좌파의 재구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니 PD계가 민주당과의 선거 연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단순한 감정 대립이나 헤게모니 투쟁 때문이라기보다는, 확연히 구분되는 노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를 비판하며 탈당했던 진중권이 진보신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하였고, 그 외 유명인으로는 언론인 홍세화, 박노자 교수, 영화감독 박찬욱, 영화배우 문소리 등이 있다. 참고로 이들은 모두 이전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으며, 분당 과정을 거치며 이적(?)한 케이스.

1.2 진보신당 창당과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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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의 바람개비 로고는 평등(빨간색), 평화(파란색), 생태(초록색), 연대(노란색)를 나타내며, 당의 상징색은 좌파의 전통적인 상징색인 빨간색이었다.

한국사회당과 노선이 비슷해서 합당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창당 당시에도 한국사회당과 합당을 추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 이후 한국사회당은 등록이 취소되었지만 사회당으로 재등록하였고, 다시 합당이 논의되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인한 촛불시위 이전에는 존재감이 흐릿했지만, 진보신당에서 운영하는 아프리카 개인방송인 칼라TV로 점점 존재감을 알리는 동시에 인터넷상에서 어느 정도 세력 확장을 하였다. 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자릿수 지지율과 비례대표 6번까지 당선을 목표로 선거에 임하였다. 그러나 노회찬, 심상정이 여론조사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낙선하였고, 정당 득표율 3%에 미치지 못하면서 한 명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2009년 3월 당원 목수정이 정명훈과의 사건에서 많은 논란을 사기도 했다. 항목 참조. 2009년 4월의 보궐선거에서 울산광역시조승수 의원의 당선으로 처음으로 원내진입에 성공하였다.

1.3 2010년 지방선거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등에서 각종 통합 떡밥이 나돌았지만 전반적으로 정서가 비판적이었다. 제대로 이혼한 부부에게 재결합하라는 강요에 대한 반응이라고나 할까. 자신들과 이념이 다른 민주당과의 연대에 대한 각 당의 갈등도 있는 상황에서, 모든 잘잘못을 덮고 통합을 강요하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민주노동당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단독 후보 발의안이 부정되고 선거 시 진보대통합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상황에서 노회찬 대표는 2009년 12월 16일, 통합정당은 선거 이후에 논의하더라도 민주당을 제외한 진보대연합으로 선거 연합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국민참여당은 크게 반발하였다. 근데 훗날 시점에선 결국 그렇게 됐잖아? 민주노동당에서는 통합정당 논의를 왜 선거 이후에 하느냐고 노회찬을 까고 있다. 결국 노회찬은 민주계와 민주노동당 양쪽으로부터 비판받게 되었고, 5당 + 4시민단체 회의의 파행 끝에 선거 연대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결국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선거 연대 없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렀다. 이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과 기초의원 22명을 배출했다. 하지만 경기도지사로 출마했던 심상정 후보는 선거 하루 전에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고 사퇴하였다. 서울시장으로 출마했던 노회찬 후보는 선거를 완주하며 3.3%를 득표하였다.

한명숙 민주당 후보가 예상밖의 선전으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를 거의 따라잡았으나 단일화를 거부한 노회찬 때문에 오세훈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며 까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사전에 단일화를 제안한 적도 없으며,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진보신당에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진보신당 홈페이지나 노회찬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엄청난 수의 악플들이 달렸다. 사실 이 자체는 병크에 가까웠던 것이나, 민주 진영이 그렇게 비판하는 조중동 프레임과 마찬가지논리보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여론몰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1.4 통합파들의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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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한 통합파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이른바 '노심조'.)

2011년 5월, 지도부는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5월 27일 1차적으로 협상이 결렬되었으나#, 6월 1일 새벽까지 계속된 재협상 끝에 합의안이 통과#되었다.

6월 19일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정책 당대회에서 조승수 대표가 지난 분당 과정에서의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사과를 기초로 한 축사를 발표하였다. 22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17대 대선과 분당 과정에 대해 사과하였다.

진보신당은 2011년 9월 4일 오후 서울 삼전동 송파구민회관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통합 합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재석 대의원 410명중 찬성 222명, 반대 188명. 찬성이 반대보다 우세하긴 하였으나 정족수의 2/3(274명)을 넘지 못하여 통합 합의안은 최종 부결되었다.

9월 5일 통합을 추진하던 지도부가 사퇴하였고, 11월 1일 진보진영의 명망가들이건 '노심조'를 비롯해 윤난실 전 부대표 등 많은 당원들이 탈당한다. 이들은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하여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한다.

1.5 4기, 5기 지도부

통합파들의 탈당 이후, 4기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1월 26일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이 대표 후보로 독자 출마해 찬반형식을 거쳐 당선되었다. 부대표는 김종철, 심재옥, 김선아, 강상구.

홍세화 후보는 야권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면서, 필요하다면 사안에 따라 연대는 하겠지만 통합은 부정적이라고 천명하였다. 반면 좌파정당인 사회당, 녹색당과는 통합을 추진할 것을 시사하였다. 녹색당은 연대는 가능하지만 합당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2012년 3월 사회당과 합당에 성공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지역구 후보 23명, 비례대표 후보 7명을 입후보시키고 경상남도 거제시의 김한주 후보의 당선과 비례대표 3% 돌파에 주력하였다. 학벌사회 반대의 논지로 출마자들의 학력을 표기하지 않았고, 비례대표 명단에는 박노자 교수도 있었다. 울산과학대의 청소노동자였던 김순자가 1번, 홍세화 대표가 2번으로 3%를 넘길 시 당선권이었다.

그러나 4월 11일 뚜껑을 열어본 결과 비례대표 정당투표 1.13% 를 얻는 데 그쳤으며, 기대했던 거제시 김한주 후보는 새누리당 후보를 제치고 33.0%(30,457표)의 득표율을 보이며 선전했으나 무소속 김한표 후보에 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막판 희망고문으로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 총수의 2% 이상을 얻지 못한 정당은 등록을 말소한다.'는 정당법 규정에 의해, 등록취소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물론 당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전당대회를 거쳐 재창당해야 했다. 하지만 재창당을 하더라도 이전의 정당 이름은 쓰지 못하게 되므로 '진보신당'이라는 당명을 쓸 수 없었다. 진보신당은 일단 진보신당 연대회의 창당준비위원회로 재등록하였다.

당내에서는 모호한 "진보"라는 단어 자체에 부정적이었으며, 통합진보당과 이후 진보정의당의 등장으로 서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18대 대선에서 진보신당은 사노위 등 좌파 단위가 모인 '변혁모임'의 김소연 후보 선대본 결합을 결정하였다. 이때 구사회당계 당원 일부가 김순자 후보의 선거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당내 의사결정에 불복하였다. 결국 무소속 김순자 후보는 46,017표(0.15%), 무소속 김소연 후보는 16,687표(0.05%)를 득표하였다.

이후 5기 지도부 선거가 열렸고 당대표 후보로 녹색사회주의연대의 이용길 후보, 구사회당계의 금민 후보, 무지개좌파를 주장한 김현우 후보가 출마하여 당 역사상 최초로 지도부 선거가 경선으로 치루어졌다. 당내 최대 정파였던 녹사연의 후보인 데에다가 '진보신당 하나로' 등 다른 정파와 공동으로 선거에 임한 이용길 후보가 당내 소수파에 불과했던 구사회당계의 금민 후보나 특정 정파의 지원을 받지 않은 김현우 후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역시 2월 1일 전당대회에서 총 투표 3,987표 중 1,718표(43.8%)의 지지를 받은 이용길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현우 후보는 1,134표(28.9%), 금민 후보는 1,070표(득표율 27.3%)를 득표하였다. 예상대로의 결과였지만, 김현우 후보가 상당히 선전했고 금민 후보 역시 3위로 밀리기는 했지만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 노동당 (2013년~)

2.1 재창당, 노동당으로 당명 개정

여기가 아니다. [1]
진보신당 5기 지도부는 당의 강령과 전략, 전술을 일신하여 가설정당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겠다는 의미에서 재창당을 선언하였다. 2013년 6월 당원 전수조사를 통해 새로운 당명을 공모하였다. 좌파당, 노동당, 녹색사회노동당 등 여러 가지 안이 있었지만, 전국위원회(타 정당의 중앙위원회) 심의를 통해 좌파당, 녹색사회노동당, 노동당이 선정되었다. 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이 일정한 지지를 얻기도 하였으나 전국위에서 기각되었는데, 이는 강령을 통하여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진보신당의 이념적 주소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당명 후보 선정 이후 다시 한 번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녹색사회노동당'이 최종안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당원들이 '무지개사회당'이라는 안을 현장발의하였다. 6월 23일에 열린 당대회에서는 녹색사회노동당, 무지개사회당이 모두 부결되었다.

다시 새로운 당명을 공모한 결과, 노동당과 무지개사회당 등 몇 가지가 제시되었다. 노동당과 무지개사회당이라는 당명의 대립은 '노동 중심성'에 대한 진보신당 내 입장차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진보정당운동의 여러 양태 중에서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라는 것. 결국 노동당이 선정되어, 1990년대에 이어 두 번째로 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정당이 되었다.

이석기 전 의원 사건에서 체포 동의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당내 갈등이 선명화된 정의당과는 상황이 달랐다.[2] 그리고 대법원 최종판결에 대해서도 내란선동죄 인정이 부당하다는 논평을 내어, 정의당과 확연히 구분되는 태도를 보였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첫 작성자인 주현우 씨가 노동당원이라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를 들어 주현우 씨를 까는 조선일보의 기사에서는 주 씨를 진보신당;; 당원이라고 언급했다.

2.2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서는 원외정당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정당이다. 정식 후보자 등록을 마친 5월 17일 현재 광역단체장 2명, 기초단체장 1명, 광역의원 69명, 기초의원 25명, 광역의원 비례대표 13명, 기초의원 비례대표 2명, 이렇게 모두 112명의 후보가 나서는데, 이는 원외 정당 중 출마자 수 2위인 새정치국민의당이 모두 합쳐 36명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원외정당으로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이는 노동당의 지방선거 전략에 의한 것인데, 노동당의 제6회 지방선거 전략은 1. 집중 전략과 2. 당선 전략이다. 집중 전략이란 지역구 광역의원을 다수 출마시켜 지역구 광역의원 합산 득표율 2% 달성을 노리는 것이며, 당선 전략이란 당선 가능한 기초 및 광역의원 후보 최대 당선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중 당선 가능한 기초 및 광역의원을 당선시키는 전략이야 당연하니, 핵심은 광역의원을 다수 출마시킨다는 집중 전략에 있다. 이러한 전략의 배경에는 정당이 참여할 수 있는 선거 중 어떤 것이라도 전국 득표율 2%를 넘기면 국고보조금 지급 대상이 된다는 것, 당명 개정 후 적극적인 선거 대응을 통해 당 인지도를 올리겠다는 의도,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지방선거를 통해 젊은 인재들을 정치에 진출시킨다는 의도 등이 있는 듯 하다.

결국 광역의원 1명, 기초의원 6명의 당선자를 냈다. 원외정당으로서는 상당한 성과라 할 수 있겠지만, 전력했던 광역의원에서 단 1명의 당선자에 그친 것은 다소 아쉬운 결과라 하겠다.

본래 목표였던 지역구 광역의원 합산 득표율 2%를 받으려면 투표율에 따라 40만표에서 50만표 정도를 받아야 했지만, 지역구 광역의원의 표를 합산한 결과 212,908표밖에 받지 못했다. 총 투표수가 23,464,573표이므로 이는 0.91%에 해당하는 결과. 오히려 광역비례투표에서 선전해서 총 투표 23,464,573표 중 265,034표(1.13%)[3]의 성적을 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국고보조금 대상인 2%에는 턱없이 모자란 결과. 4개 지역[4]에 광역의원 비례대표를 내지 않은 것 치고 1.14%의 득표율은 꽤 많은 것이지만, 광역의원 비례대표 투표의 경우 상대적으로 국회의원 비례대표 투표에 비해 소수정당에게 관대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좋은 성과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 하다. 종합하자면 국고보조금 지급대상도 되지 못했고, 광역의원과 기초의원도 조금밖에 당선시키지 못한 결과이다.[5]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던 현역 광역의원들과 기초의원들이 대거 탈락한 것도 아쉬운 대목.

특이한 점은 진보신당 시절부터 울산을 제외하면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서울[6] 에서 30,679표(0.63%)를 받았다는 점. 서울과 같은 수도권인 경기도에서도 29,555표(0.58%)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다만 울산과 영남 지역에서는 지지율이 올라갔으며, 특히 울산은 정의당보다 득표율이 높았던 것이 특징.

2.3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김종철 전 부대표가 동작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선언을 했다.[7] 김종철 전 부대표는 19대 총선 때 동작구을에서 5.14%의 득표율을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세월호 추모 만민공동회를 주도했다가 구속된 정진우 부대표도 수원 영통 옥중 출마를 선언했다...가 옥중 출마가 아니게 되었다.#

동작을에 출마한 김종철 부대표는 통합진보당 유선희 후보와 단일화하였으나, 1,076표(1.4%) 득표에 그쳤다. 또한 수원에서 출마한 정진우 부대표도 510표(0.68%) 득표에 그쳤다.

2.4 6기 대표단 선거

2015년 6기 대표단 선거에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는 총 3명으로 진보결집파의 나경채 후보, '신좌파당원회의'의 나도원 후보, '당의 미래'의 윤현식 후보이다.

2015년 1월 19일에서 1월 23일까지 진행된 당 대표 선거 결과 총 투표자 수 3,494명(투표율 62.9%) 중 나경채 후보가 1,385표(40.2%), 나도원 후보가 1,106표(32.1%), 윤현식 후보가 956표(27.7%)를 얻었다. 과반 득표를 한 후보가 없어서, 나경채 후보와 나도원 후보가 결선투표를 진행하게 되었다. 부대표 여성명부 선거에서는 신좌파당원회의의 문미정 후보(찬성득표율 86.9%, 찬성 2,554명 반대 386명)와 진보 결집파의 김윤희 후보(찬성득표율 82.2%, 찬성 2,585명 반대 559명)가 당선되었다. 부대표 일반명부 선거에서는 1,187표로 34.5%를 득표한 신좌파당원회의의 최승현 후보와 1,145표로 33.3%를 득표한 진보 결집파의 권태훈 후보가 당선되었다. 1,108표로 32.2%를 득표한 당의 미래의 김한울 후보는 낙선하였다.

1월 26일부터 1월 30일까지 진행된 결선투표에서는 나경채 후보가 1.724표(53.4%), 나도원 후보가 1,505표(46.6%)를 얻어 나경채 후보가 6기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는 예상보다 상당히 근소한 차이였다. 지방 당직선거에서는 신좌파당원회의 소속 후보가 많이 당선되었는데, 그들은 녹색좌파 노선을 견지하며 정의당과의 통합 주장을 비판하였다.

2.5 통합파들의 탈당 2

나경채 대표는 핵심 공약이었던 진보결집(정의당과의 합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당의 재구성)에 대한 당원총투표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2015년 4월 4일 실시된 4기 2차 전국위원회 결과 2015년 사업 계획에서 진보결집에 대한 당원총투표가 빠지게 되었고, 2015년 6월 28일 당대회에서 당원총투표 발의 안건이 부결되었다.

이후 진보결집파의 나경채 대표, 권태훈 부대표, 김윤희 부대표 등 지도부를 비롯한 많은 당원들이 [8] 탈당하여 진보결집+를 설립하고, 노동정치연대, 국민모임 등과 함께 정의당에 합류하게 된다. [9][10]]

2.6 7기 지도부

당 대표가 사임 후 탈당해버렸기 때문에, 7기 대표단 및 전국 동시 당직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당 대표 선거는 기호 1번 당의 미래 홍원표 후보, 기호 2번 신좌파당원회의 구교현 후보의 2파전 구도가 형성되었다.[11] 홍원표 후보는 당 정책통 출신이고, 구교현 후보는 알바노조 위원장으로 유명하다.

선거 결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중앙위원, 알바노조 위원장 출신의 구교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걸스데이 혜리가 2015년 12월에 창당한 알바당#과 합당을 추진 중이라 카더라. 구교현 대표는 1977년생으로서, 대한민국 정치에 30대 당대표(!)가 등장하였다. 진정한 청년당! 그런데 워낙 노안이시라 체감상으로는...

2015년 12월 현재 노동당 소속 현역 의원으로는 울산 동구 의회 다선거구[12]의 김원배 의원, 경남 거제시 의회 다선거구[13]의 송미량 의원과 같은 거제시 의회 마선거구[14]의 한기수 의원이 있다. 현재 원외정당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출직 공직자가 있는 정당이다.

2.7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후보로 2명이 선출되었으며 1번은 노동당 청년학생위원장 용혜인[15][16], 2번은 현 노동당 대표 구교현이다. 지역구 후보는 녹색당(5명)보다 많은 9명이 후보로 나간다. 강원 강릉 최종문, 경기 고양 갑 신지혜, 창원 마산합포 이원희, 대구 중남구 최창진, 대전 유성을 이경자, 울산 중구 이향희, 서울 마포을 하윤정, 서울 은평갑 최승현 부대표, 서울 종로 김한울 부대표[17] 후보로 선정되었다.

제20대 총선 노동당 TV 광고 제 1탄 <권력을 바꿔라>

제20대 총선 노동당 TV 광고 제 2탄 <재벌을 바꿔라>

선거 결과 망했어요

지역구 후보들도 단일화 시 승리도 노려볼 수 있었던 울산 중구 이향희 후보를 제외하면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비례대표에서도 겨우 0.38% 득표[18] 하면서 아무런 존재감도 드러내지 못했다.

2.8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당 내에서 조직개편을 둘러싼 갈등으로 진보신당계 노동당 잔류파인 당의미래와 당권을 잡은 구사회당계가 충돌하는 모양새이다.

2016년 7월 지도부가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16년 10월 제8회 지도부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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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이들은 조선노동당을 엄청 싫어한다!
  2. 정의당의 경우 당내에서 동의안 찬성 입장을 주도한 국참계와, 경기동부연합과 같은 NL계열로서 이러한 방침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인천연합이 공존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3. 공교롭게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비례대표에서 진보신당이 받은 득표율과 같다.
  4. 대전, 대구, 제주, 세종.
  5. 물론 이것은 노동당만의 실패는 아니며,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당들이 전체적으로 패배하는 흐름 속에 있다. 오히려 노동당은 통합진보당이나 정의당에 비해서 그나마 덜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별로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구로의 김희서 후보를 하지만 그 김희서는 지금 정의당에... 그 당선시킴으로써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당들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기초의원을 배출하였다. 특히 창원, 거제 등에서 강한 지지기반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도권을 제외한 곳에서의 광역의원 비례대표 득표율도 나쁘지 않았다.
  6. 진보신당은 서울에서 18대 총선에서는 4.04%(전국은 2.94%), 19대 총선에서는 1.47%(전국은 1.13%)의 득표율을 얻었다.
  7. 원외정당 소속임에도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선언을 하였는데,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8. 대략 1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9.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여러차례의 이합집산을 거치며 추억의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진보신당으로 이어지는 기존 의회주의 좌파 주류의 계보는 산산히 흩어졌는데, 20대 총선 현재의 노동당에 남은 부분은 극히 적다. 다만 이것이 노동당의 입장에서 약인지 독인지는 각자 입장에 따라... 2016년 5월 현재로써는 총선에서 녹색당보다 낮은 지지율을 보였고 또한 조직력도 약해지면서 독으로 다가왔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10. 그리고 탈당한 진보결집+는 진보정당들을 위기에 빠뜨린 대형 사고의 원인이 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는 7.1.2단락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11. 홍원표 후보는 당의 미래 후보임을 내걸고 나왔고, 구교현 후보는 본인이 신좌파당원회의 소속인 것은 맞지만 선본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고 밝혔다.
  12. 남목 1,2,3동 관할.
  13. 거제시 옥포동 관할.
  14. 거제시 장승포동, 마전동, 능포동, 아주동 관할.
  15. 세월호 사건 당시 '가만히 있으라'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대학생이다.
  16. 선거운동 수행비서가 인하대학교 국문과의 재학생이던 덕에 선거 직전 인하대 학생들과 간담회를 하기도 했다.
  17. 2014년 6·4 지방선거 때 투표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악수를 거부했던 그 사람이다.
  18. 녹색당보다도 득표율이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