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묘

1 개요

충청도 청주목 청천면 화양동[1]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만력제)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사적 제4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만동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디 화양서원(화양동서원) 내부에 있던 시설이지만 화양서원은 서원 철폐 이후 터만 남았고 지금은 만동묘만이 자리잡고 있다.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2 역사

만동묘 설립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 때 민정중[2]이 청나라에서 구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의 친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전해 받은 송시열이 그 글씨를 화양동의 암벽에 새기고 1674년(현종 15년) 화양리에 운한각, 화양서원 등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후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이 당시 이미 이자성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지 오래였던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그의 제자인 권상하(1641~1721)에게 유명으로 남겼고 이에 권상하는 1703년(숙종 29년)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 내 만동묘를 창건하고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후 국왕들도 융성하게 만동묘를 대접했는데 1726년(영조 2년)에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그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했으며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그러나 이후 서원 폐단의 온상 중 하나로 지목되게 된다. 지역의 백성들에게 역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3]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심지어 젊은 시절 흥선군이 이곳을 참배하려다가 만동묘지기(혹은 지역 유생)에게 얻어 맞는등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였다. 결국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당시 만동묘를 철폐하고 대보단으로 신주와 편액을 옮겼다가[4] 1873년(고종 10년) 부활했으나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곤 나머지 서원의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함으로 예전처럼 만동묘 좨주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이후 1907년에는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이후 일제강점기 1937년 까지 지방 유림들이 일제 몰래 제사를 지냈으나 발각되어 1940년에 완전히 제사의 맥이 끊겼고 1942년엔 명나라에 대한 보은 명목으로 세워진 만동묘정비의 글자를 모조리 쪼아 없애고 만동묘 건물을 불태우고 비석은 묻어 버렸다. 이 비석은 1983년 홍수로 인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글자를 모조리 쪼아 버렸기에 해석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만동묘도 이 당시 재건된 것이다.

조선 후기 조선의 소중화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임과 동시에 서원의 발달, 그로 인한 폐단을 잘 보여주는 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2.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둘째 큰 아버지
  3. 이것을 화양묵패(華陽墨牌)라고 한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인근 수령들과 백성들에게 제사 지낼 돈을 내라는 청구서. 당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중심지나 다름이 없었으니 워낙 위세가 강력해서 수령들도 어쩌지 못했다.
  4. 이쪽은 국가에서 명나라 주원장, 만력제, 숭정제를 제사 지내는 곳으로 1704년(숙종 30) 창덕궁 금원 옆에 설치한 곳이다. 한 마디로 국가 입장에선 충분히 제사지내는 장소가 겹친다는 명분을 내세울수 있었던것, 대보단의 경우엔 1884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제례가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