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탤런트)

(모리 아키오에서 넘어옴)

Musashi
武蔵

20100819100937164.jpg국적일본
전적85전 49승 30패 5무 1무효
19KO, 30판정
10KO, 20판정
생년월일1972년 10월 17일
신장 / 체중185cm / 103kg
본명모리 아키오(森昭生)
링네임"무사시"
주요 타이틀K-1 2003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
K-1 2004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
기타K-1 2003 일본 그랑프리 우승
K-1 2002 일본 그랑프리 우승
K-1 2000 일본 그랑프리 우승
K-1 1999 일본 그랑프리 우승

1 개요

K-1에서 활동했던 정도회관 가라데 베이스의 격투가.

격투가를 은퇴한 후에는 배우 및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링네임인 '무사시'를 그대로 예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명은 모리 아키오. 딱히 비공개는 아니지만 모리 아키오 명의로 활동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일본에서 모리 아키오라고 하면 대부분 누군지 모른다. 어째서인지 나무위키 내에서는 그를 본명인 모리 아키오라고 표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듯 한데[1] 아무리 본명이 알려져 있다고 해도 엄연히 예명으로 활동중인 연예인을 현재 사용중인 예명을 제껴놓고 굳이 본명으로 적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또한 비공개는 아닐지언정 K-1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연예인으로 전향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명으로 활동한 적이 없는데 굳이 본명으로 표기하기를 고집하는 건 H.O.T. 출신의 강타와 관련된 내용에 '강타'라는 항목을 굳이 전부 '안칠현'으로 일일이 고치는 행위나 다름 없다. 딱히 바람직한 행동으로 보기는 어려우니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자.

1995년부터 14년간 K-1에서 활동했던 베테랑이지만 경기흐름이 좀 꼬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튀어나와 경기를 끊어먹는 이른바 광속 클린치와, 판정승을 노리는 별로 호쾌하지 않은 파이팅 스타일로 재미없다고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판정 효도르.안티가 많긴 했지만, 체구가 작은 동양인이 중량급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준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 파이터.[2]

현재는 예능프로 등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2015년에 출연한 실패선생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파이팅 스타일은 사실 쫄아서 도망다닌 거라고 고백했다. K-1 레전드 무사시 첫고백 “안 도망치면 위험”[3]

2 경력

무사시는 일본의 에이스라 할수 있는 사타케 마사아키[4]의 뒤를 잇는 차세대 주자로서 꽤나 기대주였다.

문제는 체급자체가 낮았기 때문에 기술과 체력은 있지만 신장과 파워에서 중량급의 서양 선수들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 무사시는 정도회관 일본인 중에서는 파워도 좋고 체격도 커서 일본인들 중에는 적수가 없었다. 나중의 모습을 보면 믿겨지지 않지만 같은 아시아권 선수들과 싸우는 경우에는 KO승으로 우승하거나, 거의 갖고 노는 일종의 양민학살[5]의 기량 차이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데뷔후 2~3년 동안은 굉장히 공격적인 인파이터 스타일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스피디하면서 화끈한 시합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K-1에 입문하자 외국인 선수들만 만나면 거의 깨강정이 돼서 KO당하는 징크스를 보여주었고, 특히 2000년 WGP에서의 제롬 르 밴너와의 시합에서 거의 인간 샌드백 수준으로 박살이 나면서 이후 체중을 증량하면서 스타일을 확 바꾸게 된다.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1995년 페트릭 스미스와 맞붙을때 감량을 하지 않았던 무사시의 체중이 83kg였고[6] K-1에 뛰기전 90년대 초중반 무사시의 적정 체급은 엄밀히 말해 80kg가 아니라 70kg대의 체급이었다. 당시에는 없었지만 오히려 K-1 max를 뛰었어야 맞는 체구였지만, 초창기 K-1은 경량급 대회가 별도로 없이, 80kg이상에 상한이 없는 무제한 체급 대회였다. 정도회관으로 부터 K-1참가를 권유받아 뛰긴 했지만, 애초에 평소체중이 80kg가 조금 넘는 무사시와 100kg이 넘는 제롬르밴너는 체급부터 달랐다. 정도회관의 권유를 거부할 수는 없었던 무사시는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억지증량을 해서 90~100kg로 체중을 키우고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본래 체급이 낮은데다 체지방을 불려서 억지로 증량한 것이기에, 본래부터 중량급이던 선수들과 힘대결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후 그는 모험을 하지 않고 판정승으로 안전하게 이기는 스타일로 안착한다. 게다가 이게 실제로 잘 통했고.[7]

어찌됐던 무사시는 일본을 대표하는 파이터로 확고히 남았고, 03, 04년도 K-1 월드 GP 결승에 2연속으로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으나, 당시 강자인 레미 본야스키에게 밀려 2연속 준우승에 머무르고 만다. 더불어 무사시 판정으로 불리던 K-1의 편파 판정혜택을 적지않게 받았던 시기라 일본에서조차 많은 안티팬이 생겨났다(...) 어느정도였냐면 2004년 WGP 개막전에서 일본 관중들이 상대인 시릴 아비디를 응원했을 정도(...)

하지만 2006년경부터 룰개정으로 인해 클린치에 대한 제한이 가해지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밥 샙에게 뒷통수를 얻어맞고 대자로 뻗거나[8] 글라우베 페이토자의 플라잉 니 킥에 제대로 처맞고 역시 대자로 뻗는 등[9] 2006년쯤을 전후로 온갖 굴욕을 다 당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서 다시 예전처럼 KO를 노리는 스타일로 들어서면서 안티는 어느정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2007년 K-1 월드 그랑프리에서는 8강에서 박용수를 만나 초강력 로블로 두 방을 얻어맞았지만 근성으로 버텨내고 승리[10], 그러나 준결승에 진출하여 왕캉에게도 또 다시 로블로를 얻어맞고 만다.(경기 자체는 경기 재개를 거부한 왕캉의 링 이탈로 DQ승.) 결국 어찌어찌해서 결승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로블로 세 방이 누적된 탓에 결승 진출을 포기. 병원에서 진단해보니 고환내출혈이 있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고자가 될 뻔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무자지.

2008년 4월에는 무사시의 뒤를 이을 차세대 일본 에이스로 꼽히고 있던 사와야시키 준이치에게 3번의 다운을 뺏으면서 2라운드 KO승을 거둔 동시에 5연승을 찍으면서 부활의 기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다음경기에서 쿄타로에게 매우 지루한 경기 끝에 판정패를 당하면서 잘 쇄신한 이미지를 다시 까먹었다(...) 그 후 신예 파이터들과 붙으면서 연패를 당하며 다시 하락세를 겪었다.

2008년 12월 31일 다이너마이트에서 링네임이 똑같은 게가드 무사시와 K-1룰로 붙어서 무자비한 펀치 러시에 KO패 당했으며 이후로는 부상 핑계로 출전을 거절하는 등 찌질한 행보를 계속한 끝에 거의 잠수를 탔다. 2000년대 중반즘 부터는 펀치 드렁크에 시달리는건 아닌가 싶은 모습도 꽤나 보여주었다.

이후 뜬금없이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K-1 소속으로 남아 있었지만 경기는 가지지 않고 그냥 정도회관 일을 보면서 온천, 디너쇼, 콘서트, TV쇼, 야구 시구식 등을 두루 거치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끝내 2009년 9월 26일 K-1 월드 그랑프리 16강전 제롬 르 밴너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 [11]. 마지막 경기에서는 기존의 치고 빠지면서 클린치질해대는 무사시류가 아닌 공격적인 스타일로 경기에 임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3:0 판정패당했다. 참고로 당시 은퇴전이 한국 서울에서 벌어졌는대, 일본인 인대다 재미없는 시합으로 유명한 무사시 임에도 경기후 관객들이 상당한 환호를 보여주었다. 경기가 끝난 뒤 밴너와 마주 절하는 모습이 나름대로 감동.[12]

3 기타

은퇴 후 동생 토모와 힘을 합쳐 Pound for Pound라는 회사를 차렸다. 홈페이지는 여기

밝히고 있는 사업내용으로는 평범한 연예 기획부터 격투기 선수 홍보, 체육관 및 도장 운영, 의류·스포츠용품·자전거·낚시용구 개발 및 판매, 이벤트 기획, 도서·비디오·DVD·CD 제작 등(...)

무장전선 재킷을 입고 다니거나 크로우즈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걸 보면 아마도 크로우즈의 팬인 듯.

가면라이더 카부토의 극장판 God Speed Love에서 코카서스의 장착차인 쿠로사키 잇세이역으로도 출현했다.

  1. 본 항목도 항목명이 모리 아키오였던 적이 있다.
  2. 후술하겠지만 이유가 있다
  3. 기사에 "안 도망치면 위험"이라고 번역된 문장의 원문은 이카리 신지의 "도망치면 안 돼(逃げちゃダメだ)"를 패러디한 "도망안치면 안돼(逃げなきゃダメだ)"였으며, 방송에서도 중얼중얼 거리는 등 대놓고 패러디했었다.
  4. 정도회관 출신으로 K-1 출범 초기 일본을 대표하던 인물. 애초에 K-1 자체가 사타케 마사아키가 세계에 먹힌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그랑프리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단 한번도 우승을 못하였고, 다른 가라데 선수였던 앤디 훅과 무사시등이 선전하게 된다.
  5. 때문에 안티들로부터 동양의 타이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동양 선수들 상대로 KO률과 승률이 높다고.당시 기사.
  6. UFC에서-77kg급을 뛰던 Gsp의 평소체중이 이정도였다. 그나마도 감량폭이 적은편
  7. 실제로 90년대에 무사시가 깨강정이 되는 장면들을 보면, 실력은 둘째 문제고 도저히 하드웨어 차이가 극복이 안 될 수준이었다. 복싱으로 치면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라도 헤비급 챔피언과 붙이면 어려울 판국에 동양 미들급 챔피언헤비급 세계랭커 앞에 데려다 놓은 꼴이었다. 이 정도면 체급이라도 올려야 붙는 흉내라도 낼 수 있을 정도.
  8. 경기 자체는 승리했지만 무사시답게 판정 논란이 좀 있었다.
  9. 참고로 스타일 개선 후 처음으로 나온 KO패였고, 이전 경기인 루슬란 카라에프와의 경기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승리해서 무사시에 대한 안티들의 분노가 하늘끝까지 솟았던 상황에서 나온 KO장면이라 안티들의 열광이 배가 되었고 이 경기를 통해 수많은 짤들이 탄생했다.
  10. 그러나 경기 종료 후 쓰러진 박용수를 향해 욕설을 하는 듯한 행위를 보여 또 다시 미친듯이 까였다. 허나 두 대나(...) 얻어맞았고, 박용수도 무사시의 글러브 터치 이후 곧바로 킥을 날리는 등 박용수도 잘못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기에 이해할만 하다는 반응도 어느정도 있었다.
  11. WGP 개막전을 앞두고 앞으로 한경기라도 지면 은퇴하겠다!!고 공언했는데 하필이면 그 다음 경기가 밴너였다(...)
  12.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이 무렵에 세미 슐트가 K-1 무대를 일방적으로 접수해 버리면서 하드웨어의 영향력이 매우 심하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사시에 대한 여론도 비겁하게 판정빨로 경기한다.->판정이야 심판 잘못이고, 무사시가 그렇게 경기한 것은 하드웨어의 영향이 강한 K-1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로 바뀌고 있었다. 하드웨어가 좋은 최홍만이 일시적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 것을 제외하면, K-1 무차별급에서 판정빨을 제외하고 봐도 무사시만큼 버틸 수 있는 동양인 선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