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삼국지)

촉서 「방통법정전(龐統法正傳)」
방통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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龐統
(178년/179년 ~ 213년/214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비 휘하의 모사. 자는 사원(士元). 형주 양양군 사람. 동생은 방림, 아들은 방굉, 숙부는 방덕공, 족제는 방산민.

2 정사

2.1 초기 생애

양양기에 따르면 제갈공명(제갈량)은 와룡, 방사원(방통)은 봉추, 사마덕조(사마휘)는 수경이라 했는데 이는 모두 방덕공이 말한 것이다. 방통은 방덕공의 조카인데, 어려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덕공만이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18세 때, 사마덕조를 가 뵙게 했다.

방통전에 따르면 어려서 투박하고 둔하여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영천 사람인 사마휘는 청아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방통이 약관의 나이 때 사마휘를 찾아가 만났는데,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잎을 따며 방통은 나무 아래에 앉아있게 한 채 낮부터 밤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고사전에 따르면 남군 방사원이 사마덕조가 영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2천 리나 찾아가 기다리다 뽕을 따고 있는 사마덕조를 만나게 되었다. 방사원은 수레 속에서 말했다.

나는 대장부가 세상에 살며 마땅히 고관이 되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혼란한 세상을 되돌릴 역량이 있으면서 길쌈하는 지어미의 일을 하겠습니까?

사마덕조가 말했다.

당신은 우선 수레에서 내리시오. 당신께서는 참 샛길이 빠른 줄만 알지, 길을 잃고서 헤매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화려한 집에서 살고 살찐 말만 타고 다니며, 시녀가 수십 명인 다음에만 기이하다 하겠습니까.

방사원이 말했다.

내가 변방에서 나서 자라 대의를 본 일이 적은데, 만약 한번 큰 종을 두들겨 보지 않고 우레 같은 북을 쳐보지 않았더라면, 그 울리는 소리를 알지 못할 뻔했습니다.

양양기에 따르면 덕조가 같이 얘기를 나눠 보고는 잠시 후 감탄하며 말했다.

덕공은 실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이 아이는 참으로 크고 훌륭한 덕을 가졌다.

사마휘는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방통이 응당 남주(南州) 선비의 출중한 인물이라 칭찬하니 이로 말미암아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상랑전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상랑은 젊어서 사마덕조(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서원직(서서), 한덕고(한숭), 방사원(방통) 등과 친하게 지냈다.

2.2 유표 휘하

그 뒤 군(郡)에서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았다. 그 성정은 사람을 견줘보는 것을 좋아하고 길러서 양성하는데 부지런했다. 매번 칭찬하는 바가 그 재주를 넘어 과다하니 당시 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방통이 대답했다.

칭술하는 말을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명성이 흠모하며 따르기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여 따르기에 부족하면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유표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부손은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방통을 보고 절반쯤 영웅이라고 생각했으며, 배잠이 끝내 청렴한 행실로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증명했다.

제갈량전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유비가 사마덕조(사마휘)에게 세상일에 관해 물었다. 덕조가 말했다.

저 같은 유생 속사가 어찌 시무를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 중에 있으며 이런 준걸에는 복룡과 봉추가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유비가 묻자 덕조가 말했다.

제갈공명과 방사원입니다.

2.3 손권 휘하

오의 장수 주유가 유비를 도와 형주를 차지하고 이로 인해 남군태수를 겸했다. 주유가 죽자 방통은 상여를 운구해 오에 이르렀는데, 오인(吳人)들이 그의 명성을 많이 듣고 있었다. 방통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함께 창문(昌門)에서 모였는데, 육적, 고소, 전종이 모두 참석했다. 방통이 말했다.

육자(육적)는 굼뜬 말이라 이를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을 지녔고, 고자(고소)는 굼뜬 소라 이를 만하니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오록에 따르면 어떤 이가 방통에게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육자(육적)가 가장 낫다는 것입니까?

방통이 말했다.

굼뜬 말이 비록 빼어나지만 한 사람을 감당할 뿐입니다. 굼뜬 소는 하루에 3백리를 가니 어찌 한 사람을 중함에 비하겠습니까!

고소가 방통의 숙소로 찾아와 대화하다가 물었다.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

방통이 말했다.

세속을 도야하고 인물을 품평하는 것에는 제가 경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복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는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고소가 그 말에 만족해하며 친근히 대했다.

전종에게 말했다.

경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니 여남의 번자소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비록 지력이 많지는 않으나 또한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입니다.

육적, 고소가 방통에게 말했다.

천하가 태평해지면 응당 경과 더불어 천하의 선비들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방통과 서로 깊이 친교를 맺고 되돌아갔다.

육적전에 따르면 우번은 옛날 부터 명성이 있었고, 방통은 형주의 유명한 선비로, 나이는 차이가 많았지만 모두 육적과 우의를 나누었다.

2.4 유비에게 임관

유비가 형주를 다스리게 되자 방통을 종사로 삼고 계양군 뇌양현의 현령을 맡게 했는데, 현에 있으면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면직되었다. 오의 장수 노숙이 유비에게 서신을 보냈다.

방사원은 사방 백리를 다스릴 재주가 아니니, 치중, 별가의 임무를 맡겨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펼칠 것입니다.

제갈량도 또한 유비에게 이를 말하자 유비가 방통을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고 크게 평가하여 치중종사로 삼았다.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는 방통과 함께 풍족히 연회를 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에게 물었다.

경이 주공근(주유)의 공조였을 때 내가 오에 갔었소. 듣기로 이 사람이 은밀히 중모(손권)에게 말해 나를 머물러 두게 할 것을 권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소? 주인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주인을 위하는 법이니 경은 숨김없이 말해 보시오.

방통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때 위급하여 응당 요청할 것이 있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구려! 그때 공명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으니 또한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소. 나는 중모가 방비하는 곳은 북쪽이니 응당 내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결심하고 의심하지 않았소.

친밀히 대우함이 제갈량에 버금갔고 마침내 제갈량과 함께 군사중랑장으로 삼았다.

2.5 유비의 입촉

구주춘추에 따르면 방통이 유비를 설득했다.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가 있어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자하고 조조가 속이면 나는 충직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이 말했다.

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키어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유비가 마침내 이를 행했다.

제갈량은 남아서 형주를 진수하고 방통은 유비를 수종해 촉으로 들어갔다.

요립전에 따르면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고 제갈량이 형주 지역을 지키고 있을 때, 손권이 사자를 보내 제갈량에게 우호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선비들 중에서 누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질문했다. 제갈양이 대답하여 말했다.

방통과 요립은 초나라의 우수한 인재로, 후세에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익주목 유장이 유비와 광한군 부현에서 만났다. 방통이 계책을 올렸다.

지금 이 모임을 틈타 유장을 붙잡는다면 장군께서는 용병의 수고로움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뒤 유비가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을 정벌하려 했다.

팽양전에 따르면 마침 유비가 촉나라로 진입하여 장강을 따라 거슬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팽양은 유비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유세하기 위해 곧바로 방통에게 가서 만났다. 방통은 팽양과는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으며, 또 마침 빈객이 있었는데, 팽양은 줄곧 방통의 침대 위에 누워 방통에게 말했다.

손님이 오면 응당 그대와 충분히 담소로 나눠야 합니다.

방통은 빈객이 떠난 후에 팽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팽양은 먼저 방통에게 식사를 요구한 연후에 함께 얘기를 했다. 이렇게 남의 집에서 묵으며 며칠이 지났다. 방통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법정은 이전부터 팽양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비 또한 팽양을 기재가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팽양으로 하여금 군사 명령을 전달하여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여러 번 명령했다.

방통이 다시 설득했다.

  • 상계(上計) : 은밀히 정병을 뽑아 밤낮으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 곧바로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굳세지 못한데다 또한 평소 대비가 없어, 일거에 평정 할 수 있습니다.
  • 중계(中計) : 양회,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병들을 거느리고 관문을 점거해 지키며, 듣기로 여러 차례 유장에게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했다 합니다.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되돌아가 구원하려 한다고 하며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이 떠난다는 것에 기뻐하여 필시 경기병을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니, 장군께서 이 틈을 타 그들을 붙잡고 진격하여 그 군사를 차지하고 이내 성도로 향하십시오.
  • 하계(下計) : 백제(白帝)로 물러나 형주와 연결하고 서서히 돌아와 도모하는 것입니다. 만약 망설이며 거행하지 않으면 장차 오래지 않아 큰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유비는 중계(中計)를 옳게 여겨 양회, 고패를 참수하고 군사를 되돌려 성도로 향했고 지나는 곳마다 번번이 이겼다.

부현에서 큰 모임을 열어 술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케 했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모임이 가히 즐겁구려.

방통이 말했다.

남의 나라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의 군대가 아닙니다.

유비가 술에 취해 있었는데 노하여 말했다.

주무왕이 주(紂)를 치며 그 앞뒤로 노래 부르고 춤췄는데 그도 어진 이가 아니었단 말이오? 경의 말이 맞지 않소. 속히 일어나 나가시오!

이에 방통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유비는 곧 후회하고는 되돌아오도록 청했다. 방통이 다시 예전 자리로 돌아왔으나 돌아보고 사죄하지 않으며 태연자약하게 먹고 마셨다. 유비가 말했다.

조금 전의 논의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오?

방통이 대답했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유비가 크게 웃으며 당초처럼 술자리를 즐겼다.

2.6 죽음

진격하여 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방통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으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유비가 몹시 애석하게 여겨 하니 말할 때 눈물을 흘렸다. 낙성 전투는 213년에서 214년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방통이 죽은 해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장존은 평소 방통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방통이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유비가 방통을 찬미하는 말을 하자, 장존은 이렇게 말했다.

방통은 비록 충성을 다하여 아까운 인물이지만, 위대하고 아정한 도의를 어겼습니다.

유비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방통은 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사람입니다. 다시는 그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장존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오래지 않아, 장존은 질병으로 죽었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군사(방통)는 덕행이 지극한 인물로, 풍아한 기질이 빛난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부터 충성을 발했다. 이 인의를 종주로 하여 몸을 죽이고 은혜에 보답했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방통의 시호는 정후(靖侯)라고 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 서서와 친구 사이로 나온다. 정사에서는 외모가 추하다는 묘사가 없는데 연의에서는 외모가 추하다는 설정이 붙었다.

사마휘가 유비에게 "와룡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과장되었는데, 유비는 그 둘을 모두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하를 제패하지 못했으니 사마휘의 짐작은 결국 틀렸다. 그리고 사마휘의 계획대로 사마씨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적벽대전에서 연환계로 조조군의 배를 묶은 이야기는 연의에서 새로운 캐릭터 등장을 위한 창작으로 정사에서 조조군의 배는 애초부터 묶여있었다. 주유는 조조군의 군선에 화공을 할 생각이었으나, 한 척에 불을 지펴도 다른 배는 도주하여 불이 번지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방통은 장간을 속여 조조의 군영에 잠입하여 조조와 만나 북방인의 약점인 배 멀미에 대한 대책으로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하라고 진언하였다. 또 오로 돌아가면서 조조의 신하가 된 친구 서서가 화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별동대로서 파견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방책을 내세웠다. 이후 불이 붙어도 조조군의 군선은 흩어지지 않았고 조조군은 화공으로 대패했다.

방통은 주유의 장례식 때 문상을 하러 건너온 제갈량과 만나 이미 유비를 섬긴다는 선약을 하고 추천장을 받았다. 노숙은 방통의 공을 언급하며 손권에게 그를 등용하도록 권유해서 손권이 방통과 대면해본다. 손권은 먼저 심드렁하게 주유를 들먹이면서 "그대의 재주가 주유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라며 은근히 비교하자 방통은 거만하게 대답한다. 손권은 그의 볼품없는 외모와 태도에 질려서 그를 내쳤다. 방통이 손권의 대답에 성의 없이 대답한 걸 보고 노숙은 방통을 따라와서 사과하다가 그의 태도를 떠올리고는 애초부터 손권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방통이 그렇다는 반응을 보인 뒤 조조에게 가볼까 한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자 노숙은 화들짝 놀라서 차라리 유비를 섬기라고 권유하여 동오와의 화친을 다져 달라고 부탁한다. 방통도 흔쾌히 받아들인 뒤 노숙의 추천장을 받고 유비에게 갔다.

방통이 유비의 휘하로 들어왔을 때, 유비는 방통의 추한 외모를 보고는 그에게 뇌양현이라는 작은 마을의 현령 지위를 맡겼는데, 방통은 거기서 업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지방관으로 보냈더니 탱자탱자 놀기만하는 방통을 혼내주러 장비가 가게 된다. 여기서 장비의 성질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곧바로 방통의 목을 치지 못하게 손건을 붙여 보냈다. 또한 당시 뇌양현의 술맛이 너무 좋아 시찰온 장비가 업무를 보지 않을까봐 술 대신 물을 팔라고 명을 했다. 장비는 방통이 그동안 쌓인 업무를 반나절 동안에 해치우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이후 제갈량과 노숙이 방통을 천거하는 편지를 읽은 유비는 방통을 다시 보게 되어 중용한다. 그러나 사실 정사에서 방통의 행정 능력은 형편없었다(...).

방통은 유비를 따라 입촉하는데 양회와 고패를 죽이는 장면이 양회와 고패가 유비를 암살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바뀌어서 유비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정사에서는 사실 죄없는 양회와 고패를 죽인 것이다.

방통의 죽음이 약간 방통을 비하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제갈량이 운이 좋지 않은 점괘가 있으니 복병을 조심하라고 유비한테 전했지만, 방통은 제갈량에 대한 경쟁 심리 때문에 본인도 작전에 신중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운이 좋은 점괘라고 조언한다. 유비는 먼 곳에 있는 와룡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봉추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진군한다. 그러다 방통이 탄 말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유비가 자신이 타고 있던 순한 백마를 양보하면서 이 둘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1] 이곳의 지명이 봉황이 떨어진다는 뜻의 낙봉파라고 들은 방통은 자신의 도호가 봉추였기에 불안함을 느낀다. 그때 매복해있던 장임의 군사들이 백마를 탄 방통을 유비로 착각하고 방통은 화살에 맞아서 죽는다.

정사에서 방통이 죽은 곳은 낙봉파가 아닌 낙성이며 장임은 유비에게 연전연패만 하다가 방통보다 먼저 죽었다. 장임이 처형당하고 그 이후 전투에서 방통이 전사한 것. 현재 쓰촨성에 가보면 낙봉파라는 관광지가 있고 그 근처에 방통의 묘도 있지만 그 동네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이해해 주자(...).

4 평가

방통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방덕공과 사마휘였고 이들은 방통에 대해서 제갈량과 쌍벽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방통이 임관한 뒤 주유와 유비 밑에서 시시한 관직에 머물고 있었던 것을 본다면, 이것이 사람들에겐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다가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던 유비가 직접 방통을 대면함으로 인해 방통의 인생은 피게 되었다. 유비는 사마휘, 방덕공과 마찬가지로 그의 능력이 최소 행정 능력을 배제하고 전략적인 면만 보면 제갈량과 비견된다고 파악하여 제갈량과 버금가는 대우를 하였고, 그를 제갈량과 나란히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 방통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미 당시에 제갈량과 동급인 군사중랑장 대우를 받은데다가 촉 정벌에 뒤따른 군공까지 추가되었다면 제갈량과 대우를 나란히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방통의 재능에 대해 제갈량이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은근히 호승심을 가졌었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제갈량이 방통과 엮어서 평가한 요립은 이후 서민으로 강등되었고, 방통의 천거를 받고 승승장구하던 팽양을 좌천시켰다. 그러나 요립과 팽양이 좌천된 것은 제갈량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립은 자신의 재주와 명성이 제갈량 다음간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유비의 사후 중용되지 못하고 이엄의 수하의 위치가 되자 조정에 불만을 제기하다 유배당한 것이고, 팽양은 역모를 꾸민 혐의가 있어서 좌천된 것이다.

병법의 방통, 정치의 제갈량이라는 설이 있다. 남중 평정 이전까지 군권을 맡은 적이 2차 증원군으로 익주에 들어왔을 때 1번 밖에 없는 제갈량에 비해서 방통은 들어오자마자 서촉 정벌군의 참모가 되었기 때문. 근데 이러면 방통도 1번인데? 실제로는 그다지 근거는 없어보이나 그가 군을 이끌고 서촉을 정벌할 때 거듭하여 큰 군공을 세운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있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방통이 유비에게 올렸다는 헌책들은 매우 뛰어난 기책들이었는데, 예를 들어 유장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유장을 사로잡아야 한다든지 또는 정예병을 뽑아 수도를 급습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들이었다. 이는 주로 정공법을 선호하였던 제갈량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견 중에는 방통이 제갈량을 제치고 서촉 정벌군의 참모가 된 것은 유비가 주력을 형주에 남겨두고 서촉 공략에는 여력을 투입하는 안전빵 방침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제갈량 뿐 아니라 관우, 장비, 조운도 죄다 형주에 남아있었고 1차 서촉 공략군의 주축은 황충위연처럼 형주를 얻은 이후에 유비 진영에 합류한 장수들이었다는 점에서 방통 역시 1진급인 제갈량에 비해 2진급으로 평가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 근데 결과적으로 1진이고 2진이고 관우빼고 다 참전했다.

여러모로 그런 뉘앙스가 많기는 하나, 제대로 활약도 해보기 전에 일찍 죽어서 확실히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천재였던 건 틀림없다.

5 미디어 믹스

  1. 유비가 방통에게 양보한 말이 주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적로였다는 추측이 있는데 그 말은 단순히 백마로만 묘사되어 있고, 적로는 말의 이마에 흰 점이 박혀있다는 뜻이라서 백마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