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삼국지)

의 군권 1인자
주유노숙여몽육손주연제갈각손준손침주적정봉육항
오서 「주유노숙여몽전(周瑜魯肅呂蒙傳)」
주유노숙여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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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瑜
(175 ~ 210)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손책, 손권 휘하의 전략가. 는 공근(公瑾). 양주 여강군(廬江郡)[1] 서현 사람.

연의에서는 능력은 뛰어나도 한 수 높은 제갈량에게 휘둘리다 결국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죽은 것으로 나오지만, 삼국지의 최강자 조조를 관광시킨 명실상부한 먼치킨.

2 정사

2.1 초기 생애

주유의 집안은 고조부 주영이 한장제, 한화제 때 상서령을 지냈고 증조부 주흥은 한안제 때 상서랑, 종조부 주경과 당숙 주충은 양대에 걸쳐 삼공 중 하나인 태위직을 지냈으며 주유의 아버지 주이도 낙양령을 지낸 명문가였다.

반동탁 연합군 당시 손견이 의병을 일으킬 때, 손견은 집과 가족을 수춘으로 이주시킨다. 손책전에 따르면 10세였던 주유는 마찬가지로 10세인 손견의 아들 손책의 명성을 듣고 조언으로 찾아가서 손책과 만난다. 초딩의 명성은 과연? 주유가 손책에게 자신이 사는 서현으로 이주해 살 것을 권하자 손책이 이 말을 따라 모친 오국태를 데리고 서현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주유 등 여러 사대부들과 친교를 쌓는다.

주유는 동갑인 손책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주유는 손씨 가문과 인연이 생겼는데 어찌나 사이가 가까웠는지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손책의 모친 오국태에게도 절을 했다. 또한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까지 도우며 살았다.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빼어났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음악에 조예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비록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어도, 악사들이 연주하는 곡조가 틀린 것을 알아차리고 돌아봤는데, 강동에서는 '곡조가 틀리면 주랑이 돌아다본다.'라는 말도 있었다.

2.2 손책 휘하에서

손책은 아버지 손견이 죽자 원술 밑으로 들어가 벼슬살이를 한다. 원술군과 유요군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손책도 참전하여 병사를 받아 강동으로 온다. 주유가 숙부인 단양태수 주상에게 안부를 물으러 방문했을 때, 마침 역양에 있던 손책이 주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주유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손책에게 귀순하여 유요와 싸워 이기는 데 도움을 주었고 손책 자신은 왕랑이 있는 회계로 나아가면서, 주유에게는 단양군을 지키게 했다.

이후 198년, 원술이 사촌 동생 원윤을 주상을 대신하여 태수로 보내니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 했지만 주유는 원술이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거소현의 장이 되기를 청하여 다시 강동의 손책 휘하에 남는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주유에게 엄청난 상을 하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공근은 영준하고 빼어난 재능이 있으며 총각 시절부터 나와 더불어 친분을 맺어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다. 일전에 단양에서 무리와 배, 식량을 발하여 큰일을 이루어낸 것 같은 경우는 논공행상을 통했다고 해서 충분히 보답한 것이 아니다.

당시 주유는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周郞)이라고 불렀다.[2]

199년에 주유는 주호군과 강하태수에 임명되고 손책과 함께 여강태수 유훈을 무찔러 여강을 점령했다. 이 당시 유훈의 본진 환성을 함락시키면서 교국로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으로 언니 대교를 손책이, 여동생 소교를 주유가 아내로 삼았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주유에게 장난을 걸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공의 두 딸이 비록 떠돌게 되었으나 우리 둘을 사위로 삼았으니 역시 충분히 기뻐할만 할 것이다.

이어서 유훈을 돕는 강하태수 황조도 격파했다. 돌아오면서 예장과 여릉을 평정했다.

2.3 손권 휘하에서

200년에 손책이 죽고 남동생인 손권이 그 뒤를 이었고 주유와 장소는 국정을 주관하게 된다. 주유전에 따르면 손권의 직위가 아직 장군일 때, 손권 휘하의 장수들과 손님들은 손권을 대하는 예절이 간단했다. 그러나 주유만이 일찍부터 손권에게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202년, 세력을 키운 조조가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했을 때 장소, 진송 등은 결단을 하지 못했지만 주유가 반대했고 오국태도 주유에게 동의했다.

공근의 말이 옳다. 공근은 백부(손책)와 같은 나이로 한 달이 적을 뿐이다. 나는 그를 아들과 같이 볼 터이니 너는 그를 형으로 섬겨라.

이렇게 오국태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주유를 형의 예로 받들도록 했다.

206년에 주유는 손유 등을 통솔하여 마둔과 보둔을 쳐 그 우두머리를 효수하고 포로 1만 여명을 잡아왔으며, 황조가 등룡을 보내 시상현을 공격하자 이를 쳐 등룡을 사로잡아 오로 압송했다.

209년, 손권이 강하의 황조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으로 임명했다.

2.4 적벽대전

형주의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고 수십만의 병사를 가지게 된 조조는 강동으로 눈을 돌린다. 오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조조가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즘은 죄상을 들어 죄지은 자들은 토벌했고, 군기가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이 항복했소. 이제 수군 80만을 단련하여 바야흐로 오(吳) 땅에서 손장군과 자웅을 가려보려고 하오.

손권은 이 편지를 들고 있다가 모든 신하들에게 보여주자, 모두가 두려워하고 놀라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손권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 논의하는데 모두들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항복을 주장했다.

1) 조조는 황제를 옹립하여 명분이 있다.

2)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 이점인 장강을 이미 조조가 형주를 얻었기에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3) 유표의 몽충 1천 척을 비롯한 잘 조련된 수군을 얻었으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게 믿었던 장소를 필두로 신하들이 항복을 주장하니 손권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노숙만이 반대하며 손권에게 파양에 있는 주유를 불러들이게 했다.

파양에서 도착한 주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제시하고 조조를 이길 수 있다며 항전을 주장한다.

1) 수전에서는 우리 오군을 이길 수 없다.

2) 북쪽에는 아직 마초, 한수 같은 배후의 세력이 남아있다.
3) 지금은 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마초가 없다.
4) 중원의 사람들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반드시 질병이 돌 것이다.

결심한 손권은 칼을 뽑아 앞에 놓은 책상을 베며 말했다.

제장과 관리들 가운데 감히 다시 마땅히 조조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탁자와 같게 되리라!

그리고 회의를 끝마쳤다.

회견이 끝난 후, 밤에 주유가 손권을 찾아와 말한다. 조조군이 80만이라는 소리는 아무래도 무리이며 조조가 원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는 많아야 16만명, 거기다가 아직 확실하게 항복하지 않은 유표의 병사 8만이 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5만의 병사만 주면 이들을 무찌르겠다고 한다. 자기들 가족만 생각하며 항복을 주장한 장소, 진송 등에게 실망했던 손권은 주유를 위로하며 "주유랑 노숙이랑 정말 고마운데 5만은 무리다(...). 일단 3만 준비할게."라며 주유와 정보를 좌우독으로 삼고 노숙을 천군교위로 삼았다. 손권은 일단 3만을 준비하긴 했는데 오주전(손권전)에 따르면 주유와 정보에게 각각 1만씩 주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나머지 1만은 손권은 스스로 장군이 되어 중군 1만으로 이어나가게 했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목하지 못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정보는 자신이 연장자라고 주유에게 자주 모욕을 주었는데 그럼에도 주유가 깍듯이 대하자 결국 감복하여 친하게 지내고 존중했다. 정보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공근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을 마시는 것 같아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

주유가 겸양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으로 그만큼 성격도 좋았다.

한편 조조에게 피난 중인 유비군은 노숙과 상의하여 제갈량을 손권에게 파견하여 힘을 합치게 된다. 선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제갈량을 오에 보낸 후 유비는 노숙의 말에 따라 번구에서 머물렀고 조조의 군사가 남하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손권의 원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주유의 배가 도착했고 유비가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하자 주유가 말했다.

군임(軍任)을 맡고 있어 직무를 이탈할 수 없으니 만약 위엄을 굽혀 방문해 주신다면 실로 바라는 바에 부합할 것입니다.

유비가 관우, 장비에게 말하길, 이 자리에서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 수는 없다면서 직접 배를 타고 주유를 찾아간다. 유비가 주유에게 병사 수를 묻자 주유는 3만 명이라고 답한다. 유비가 너무 적다고 실망하자 주유는 "내가 적 격파하는 거나 보라능ㅋ"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유비가 전에 만난 노숙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자고 하나 주유는 이번에도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으니 직접 찾아가던가 제갈량과 함께 오는 중이니 2~3일 기다리라고 한다. 유비는 노숙을 부르려고 했던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한편 한 군대를 이끌 주유의 엄정함을 확인한다. 그러나 유비는 주유가 딱히 조조군을 격파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아서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후방에 따로 남는다.

그런데 선주전 본전이나 다른 기록엔 엄연히 유비가 적벽대전에서 주유와 같이 참여해 조조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고 손성 역시 강표전은 오나라 사람들이 전공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말이라며 이 기록을 오류라고 깠다.

이후 조조군과 손유 동맹군은 적벽에서 대치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조조는 주유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 설득시키기로 하여 유명한 말재주꾼인 장간을 보낸다. 주유는 장간을 우선 떠본다고 "멀리 강호까지 몸소 찾아오시다니, 조씨를 위해서 설객을 하시기 위해서 입니까?"라고 말하자 장간은 부인한다. 주유는 말했다. "나는 현을 듣고 소리를 맛보면, 좋은 곡을 분별할 정도로는 할 수 있습니다." 연회가 끝나고 주유는 일이 생겼다며 나중에 보자고 한다. 3일 후 주유는 군영의 여러 곳을 보여주며 장간에게 "옛 위인들이 날 설득하려고 해도 난 거절했을텐데, 왜 자네같은 애송이가 남들을 설득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라고 말한다. 장간은 단지 웃을 뿐,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돌아와서 주유의 아량과 고상함을 칭찬하고 말로써 주유를 이간시키는 것을 그만 두었다.

적벽에서 대치 중이었던 조조군은 과연 질병에 걸렸고 첫 교전에서 패하여 장강 북쪽으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주유의 부장 황개가 화계를 제안한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에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깃발을 세워 위장시켰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황개가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황개는 항복하는 척하면서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그때 마침 동남풍이 매우 사나워 해안 위의 진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 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셀 수 없었다. 유비는 주유와 힘을 합쳐 추격하여 조조군을 대파하고 그 주선을 불태웠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북쪽으로 달아났다.

강표전에 따르면 주유가 위군을 격파했을 때, 조조는 "나는 도주를 수치로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후에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적벽에서의 패배는, 정확히 질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철수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주유에게는 그와 같은 위명을 주게 되어 버렸어.

정신승리? 주유의 위신이 높았기 때문에 조조는 그를 폄하한 것이다.

2.5 남군 공방전

주유와 정보는 남군(강릉)으로 진격하여 조인군과 대치하고 유비군도 참여한다.

주유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유비가 주유에게 말했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장비가 공격에 참여하여 조인의 후미를 끊으러 간다. 이후 유비와 주유는 같이 강릉을 포위하고 이통전에 따르면 관우 역시 후미를 끊는다.

도중 감녕이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사용하여 능통은 본진을 지키고 여몽과 주유는 감녕을 구출한다. 주유와 조인은 결전을 치룰 날을 정하고 맞짱(?)을 까나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지휘하던 중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에 부상을 입는다. 주유가 부상이 심해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인은 주유군을 공격하지만, 주유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맞서자 패한다. 주유는 1년 간의 공방과 유비와의 연합 끝에 조인을 무찌르고 남군을 얻는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과 남군태수로 삼았다. 선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주유는 남군의 남쪽 땅을 쪼개 유비와의 동맹 강화를 위해 유비에게 준다. 조조군에 복종했던 유표의 관원, 병사 중 다수가 배반하고 유비에게 와서 투항했다. 유비는 주유가 나누어 준 땅이 부족하다고 여겨 다시 다시 손권에게서 형주의 4군을 빌렸다.

이후 유비가 또 다시 땅을 빌리러 손권에게 온다. 방통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주유의 계책을 우려하여 유비에게 가면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유비는 손권의 도움에 의지하는 게 급하니 어쩔 수 없이 손권에게 간다. 유비가 또 땅을 빌리려하니 주유는 유비에게 또 땅을 빌려줬다간 뒷통수를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주유는 손권에게 유비를 잡아두자는 계책을 제안한다. 여범전에 따르면 여범 또한 유비를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것을 은밀히 요청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불러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3]

이 주유의 계책은 결국 손권이 북방의 조조를 견제해야 하며 유비는 잡아둘 수 있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실천되지 않았다.

삼국잡사에 따르면 노숙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자고 손권에게 권하자 주유가 유비는 효웅이니 마땅히 토지로써 기초를 삼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손권은 결국 노숙의 말을 따르고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준다.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가 되돌아갈 때, 손권은 화려한 배에서, 장소, 진송, 노숙 등 약 10명과 함께 연회를 열어 유비를 배웅했다. 나머지는 자리를 뜬 뒤, 손권만 남아 유비와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유비가 주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공근의 문무 계략은 만명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 기량의 광대함을 생각하면, 필시 오랫동안 신하의 상태로는 없을 것입니다.

유비는 손권에게 주유에 대한 의혹을 심으려고 한 셈이다. 사실 주유의 속마음을 뻔히 아는 상태인데 유비라고 주유에 대해서 곱게 말해줄 이유는 없다.

이후 유비는 과거 주유 휘하에 있었던 방통에게 그때 진짜 주유가 자신을 묶어두려 했다는 대답을 듣자 안도하며 말한다.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구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은 그 소견이 대체로 같소이다. 그때 공명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으니 또한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소.

2.6 죽음

마침 장로가 유장의 익주를 약탈하자 주유는 손권에게 지금이 촉을 얻을 때라고 청하고 손권의 승낙을 받는다.

저는 분위장군(손유)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주유가 제시한 이유를 보면 정말로 천하통일을 꿈꾸었는 듯하다. 서천 점령 후 한중의 장로를 병합하고 마초와 동맹을 맺은 후에 우선 양양을 치기로 한 모양이다. 강릉으로 돌아온 주유는 다시 병마를 조련하며 서천 정벌을 준비했으나, 병에 걸려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행장을 꾸려 강릉을 출발했지만 결국 파구에서 죽었다.

노숙전에 따르면 주유는 질병이 위독해졌을 때 상소를 올려 후임으로 노숙을 추천한다.

현재 조조와 적이고, 유비는 가까이 공안에 있으며, 변방 지역과 가까이 있고, 백성들은 아직 귀의하지 않았으니, 응당 훌륭한 장수를 얻어서 진무시켜야만 합니다. 노숙은 지혜와 지략이 있어, 이 일을 맡기에 충분하니, 저를 대신하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죽은 그 당일이라도 해도 걱정할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병을 앓고 있던 때의 주유의 편지에서 유비를 조심하라고 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지금 조공(조조)이 북방에 있어 국경 지대는 소란하고, 더불어 유비를 (형주에) 머물게 하여 마치 범을 기르는 형세와 같으니, 천하의 일은 아직 어찌 결착이 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야말로 지존의 근심을 풀어 드릴 날이 아닐까 합니다. 노숙은 충렬한 자로, 직무에 임해서는 일을 확실히 처리하니, 주유의 후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주유의 사망 당시 나이가 36세로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의 도독 첫 주자(?)가 되고 말았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크게 슬퍼했고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무호로 가서 맞이했다. 후에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 손님들에겐 부세와 요역을 지지 않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주유가 이른 나이에 죽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며 "공근은 왕좌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홀연히 생명이 다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후에 손권이 황제가 되자 "주공근이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3 연의

하늘은 어찌하여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

「旣生瑜, 何生亮」

丈夫處世兮立功名 : 대장부 세상을 사는 것은 공명을 세우기 위함이요

立功名兮慰平生 : 공명을 세우는 것은 평생의 위로가 되리.
慰平生兮吾將醉 : 평생의 위로가 되면 내 장차 취하리로다.
吾將醉兮發狂吟 : 내 장차 취하여 미친 듯 노래 부르리.

- 장부가(丈夫歌)[4]

삼국지연의에서는 미주랑(美周郞), 즉 잘생긴 주랑이라고 불린다. 잘생겼다 주공근!

연의에서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으라."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 오국태동습한테 물으니 동습이 안은 장소에게 맡기고 밖은 자신에게 한 말이 원조.

정사에서 주유는 바로 항전을 주장했으나 연의에서는 주유가 맘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갈량이 동작대부를 조조가 이교 자매를 원한다는 시로 전하자 격분한 주유가 항전을 결정한다.

적벽대전에 처음으로 군사들을 지휘하러 나왔을 때 손견때부터 손가의 가신으로 살아왔고 무관(武官)들 중엔 최고참인 정보는 자신이 아닌 주유가 총지휘권을 갖게된것에 불만을 품고 병을 핑계로 아들 정자를 내보냈다. 주유도 정보가 꾀병을 부린다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몸이 불편하신 것은 참으로 안된일이지만 자신을 대신하여 장자(長子)를 보냈으니 과연 충신이라 할만하다. 가까운 시일내에 문병을 가겠다."며 오히려 칭찬하고 정보의 자리에 정자를 서게 한 다음 훈련을 시작했다. 아들로부터 주유의 일처리와 언행을 들은 정보는 다음날 주유에게 나아가 잘못을 빌었고, 주유도 용서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추가되었다.

정사에서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지만 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라이벌로 설정되서 그런지 지휘관보다는 지략가의 면모가 더 부각된다. 제갈량에게 심심하면 열폭하고 죽이려하지만 정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

장부가는 적벽대전 직전 찾아온 장간 앞에서 주유가 검무를 추며 부르는 노래다.[5] 장간과의 일화는 정사와 다르게 변형되어 주유는 장간을 이용하여 조조까지 속여서 채모장윤을 죽이게 한다. 이후 거짓으로 투항한 채중, 채화까지 황개의 고육지계의 부품으로 써먹는다.

원래 정사에서 화공과 사향계는 황개가 제안했고 주유는 그것이 옳다고 여겨서 받아들인 케이스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주유와 제갈량이 손바닥에 火를 써서 보여주면서 화공 자체가 주유의 머리에서 나온다. 황개는 고육지계만 자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선 조조의 병력이 100만으로 부풀려져서 조조군을 격파한 주유는 공적이 버프되었다. 적벽대전은 정사에선 유비군과 주유군이 연합하여 승리했지만 연의에서는 오로지 주유군만 적벽대전에 제대로 참여하여 승리한 듯이 묘사하고 유비군은 그냥 손오가 다 궤멸시킨 조조군의 잔당을 추격하기만 한다.

형주를 정복할 때, 정사에선 주유군과 유비군이 협력하여 강릉을 점령하고 주유가 유비군에게 땅을 빌려준 것인데 연의에선 주유 혼자서 다 해놓은 것을 유비가 숟가락만 슬쩍 얹어서 조운이 주워먹는다. 또한 제갈량이 관우와 장비를 보내 똑같은 방법으로 형주와 양양까지 먹자 주유는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금창이 터진다.

유비가 손부인과 결혼하러 왔을 때, 정사에서는 실행되지 못했던 주유의 유비 덕후 만들기(?) 작전이 제대로 실행된다. 그러나 미리 대처해 놓은 제갈량에 의해 실패하고 2차로 금창이 터진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는 연의에선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서천 공략의 계획조차 형주를 먹으려는 가도멸괵의 계책으로 각색되어 제갈량에게 속아 넘어가 3차로 금창이 터져 죽으면서 노숙을 후임자로 추천한다. 참고로 '기생유 하생량'이라는 유언은 실제론 하지 않은 말. 정사의 제갈량도 말도 안되는 사기 캐릭터임은 맞으나, 주유 역시 일찍 죽은 것을 제외하면 제갈량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두 축 중 하나(다른 하나는 물론 제갈량)라는 버프가 있긴 하지만, 밴댕이같은 성격으로 나왔다. 지략면에서는 버프를 받았지만 인격면에서는 손해를 본 케이스.

4 평가

4.1 부정적 평가

연의에서 깎아내린 것에 대한 반동으로 주유를 너무 대지략가로 띄워준 거 아니냐는 재반론이 나오고 있다.

당장 적벽 이전에는 각지의 토벌에 종사했고 여기서 딱히 지략을 썼다기보단 견실하게 군 운용을 한 케이스이다.

거기에 원래 적벽의 화계는 주유가 혼자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황개의 계책을 주유가 받아들인 것이며 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선 유비군이 같이 적벽 전투와 남군 공방전에 참여했고 그 병력의 수도 손권군에 비해서 적지 않은데 연의의 유비군이 적벽과 남군을 날로 먹은 것처럼 묘사되다보니 마치 주유가 다 해먹은마냥 여기는 이들이 많다. 또 남군 전투는 주유의 용병술이 빼어났기에 유비-주유 연합군이 강릉을 빼앗았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주유전에는 주유가 직접 계책을 제시했다고 보일 만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여몽, 감녕이나 유비의 계획을 들어주는 모습도 보인다. 이후 유비를 놀이와 사치에 빠지게 하여 꼭두각시로 삼는다는 것도 손권의 거부로 무산되었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이 계략을 간파하고 유비에게 간언함으로서 유비측의 경계심을 사게 만들었다.

또한 그의 대전략인 천하이분지계 역시 어느 정도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유비도 유장의 초청으로 촉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인심을 베풀며 유장측 세력을 포섭하는 사전 작업을 하고도 촉을 점령하는 데 3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비록 주유의 군사적인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주유의 촉 공략은 유비와 달리 순수하게 군사력으로만 이루어내야 했던 것이었으므로 유비군의 행보보다는 힘겨웠을 공산이 크다. 유비보다 불리한 조건에, 오나라 군대의 특성상 원정 능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은 아무리 주유라도 극복하기 힘든 문제다. 조조가 강남을 정벌할 때 수군을 걱정했던 것처럼 반대로 주유를 비롯한 오나라 역시 먼 육지에서의 싸움을 걱정했을지도. 또 아무리 주유가 잘났다해도 오나라 군대를 끌고 저 멀리, 대륙 정 반대편에 있는 촉까지 가서 험준한 산맥을 뚫고 정복하고 사람까지 확실하게 포섭해서 완전한 오의 세력으로 만들 수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4.2 긍정적 평가

흔히 '주유가 오래 살았으면 삼국지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빈말은 아니다. 손권이 크게 슬퍼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혹여 주유가 살아 서촉 공략이 실현되었거나 아니면 노숙이 오래 살아 오와 촉의 동맹이 지속되었다면, 확실히 역사가 달라지긴 달라졌을 것은 자명하다. 특히, 주유는 위에서도 언급하였듯 조조의 자랑거리인 조인을 쳐부순 바 있다.

또한 손권이 막장으로 빠지는 것을 제어했을 지도 모른다. 흔히 주유하면 손책과의 관계를 떠오르기 쉬운데 주유는 손책 뿐만 아니라 손책의 아우인 손권과도 사이가 좋았다. 손권은 주유를 친형님으로서 예우를 갖춰 대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손권은 주유를 손책과 동등하게 자신의 친형으로 인식했다. 손책이 죽고 손권이 승계자가 되자 손권을 지원했기도 했었고 게다가 만약 이 사람이 적벽대전 이후까지 계속해서 살아 있었다면 손권이 말년 후계자 문제로 오나라 정국을 초토화시켰던 이궁의 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6]

주유가 장수했더라면 주유의 서촉 정벌 계책을 보아 유비가 형주 기반으로 서촉인 익주 지방 정벌에 꽤나 빡빡한 제약이 걸렸을 경우도 있을 법하다. 아니 오히려 유비가 형주땅을 빌리는 데 손권보다 주유의 눈치를 더 봤을 것이다.

주유가 엄친아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주유의 지략을 아주 높게 잡지는 않더라도 통솔력은 오나라 대도독들 중 역대 최고로 놓는 경우도 많고, 어쨌든 천하이분지계라는 원대한 대전략을 세울 정도의 안목도 있었다. 그리고 적벽에서의 활약상 등 분명 주유의 용병술을 보여주는 부분이며, 주변 인물들을 다루는 인간적인 매력이 뛰어난 장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그만의 장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대 최고 지휘관 중 하나인 조조와 맞상대했다는 점에서 그의 군재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손권도 주유가 없었더라면 나는 제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5 가족 관계

워낙 의형제 손책의 존재감이 강해 묻히지만(...) 주유의 조카 주준이 주유의 공적 덕분에 편장군에 임명된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친형제도 있었다.

아내는 미색으로 찬양받던 교공의 두 딸 강동 이교 중 동생인 소교. 손책의 아내가 된 언니 대교의 경우 손책이 대교를 만나기 전에 둔 자식이 있어 첩이었던 걸로 여겨지나 주유의 경우 다른 얘기가 없기 때문에 그냥 소교가 정실인 걸로 퉁치는 듯.

장남 주순은 주유의 풍모가 있었고 손권의 딸인 손노반과 결혼했으나 수명까지 아버지를 닮아 요절. 차남 주윤은 죄를 지어 평민으로 떨어질 뻔까지 했으나 아버지의 공덕으로 겨우 유배형에 그쳤다. 딸은 손권의 장남 손등에게 시집 갔으나 어머니의 팔자를 닮았는지 손등이 요절하면서 과부가 된다.

뜬금없지만 영화 배우 주윤발의 조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무협지스러운 영웅본색에서 주윤발 캐릭터의 최후를 생각해본다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6 미디어 믹스

  1. 지금의 안휘성 부근.
  2. 참고로 손책은 손랑이라고 불렸다.
  3.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면 유비를 방구석 니트족으로 만들어 자기들 감시하에 지내게하자는 이야기.
  4. 원문은 모종강본 버전이고, 나관중 버전은 원문이 다르다.
  5. 뒷날 안중근 의사가 지은 '장부가'라는 제목의 시의 시작 부분도 연의의 장부가와 똑같다. 단 안중근의 장부가는 '대장부가 세상에 처하니 그 뜻이 크도다.'로 시작한다.
  6. 단 이궁 당시의 손권은 정말 맛이 간 상태여서 단순 노망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 의지대로 후계 문제에 손을 대 신하들을 죽인 것이 아니냐는 시각까지 있다. 그래서 주유가 더 오래 살아있었다고 해도 손권의 후계자 분란을 저지했을지에 대한 추측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