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블런트

250027.jpg

1 소개

농구 선수. 1971년 11월 21일생.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프로농구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뛰었으며, 지금도 프로농구 역대 최고의 외국인선수 논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블런트는 1997년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전체 16순위로 신생팀인 경남 LG 세이커스에 입단했다.

사실 당시 블런트는 전체 18순위 지명권을 가진 대전 현대 다이냇이 지명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LG가 암묵적 동의를 깨고 블런트를 지명해버리면서 현대는 울며 겨자먹기로 다른 선수를 뽑게 되었는데 그 선수가 다름아닌 조니 맥도웰이다.

트라이아웃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온 현대 신선우 감독은 분을 참지 못하고 LG 이충희 감독에게 쓰레기통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97~98시즌 개막전, 제이슨 윌리포드, 정인교, 주희정 등이 건재한 전 시즌 준우승팀인 원주 나래 블루버드를 상대로 34점을 기록하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룬다. 187cm의 신장으로 외국인 선수치고는 단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운동능력과 득점력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고,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으로 LG의 상승세를 주도한다.

에이스감으로 지목했던 양희승이 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을 접은 상황에서, 이충희 감독은 나머지 국내 선수들의 수비 조직력를 극대화해 상대의 득점을 봉쇄하고 공격은 오로지 아이솔레이션을 통해 블런트에게 몰아주는 전략을 택했는데 지역방어가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프로농구에서 1:1로 블런트를 막아낼 선수는 거의 없었다. 결국 블런트는 평균 25.4득점, 6.6리바운드, 5.5어시스트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LG는 28승 17패로 대전 현대 다이냇에 이은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비록 4강 플레이오프에서 허재가 이끄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 무릎을 꿇었지만, 어쨌든 블런트는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키게 된다.

다음 시즌인 98~99시즌, LG는 양희승이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고, 여기에 센터 박재헌의 부상, 그리고 새로운 외국인선수인 아미누 팀버레이크의 저조한 득점력 등이 겹치면서 블런트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해지게 된다. 블런트는 두 차례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으며 1999년 1월 17일 원주 나래전에서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인 52점을 쏟아붓는 등 시즌 내내 팀을 먹여살렸고, 29.9득점(리그 1위), 9.2리바운드, 4.6어시스트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친다. 블런트의 맹활약 덕에 LG는 정규시즌 5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정규시즌 내내 홀로 팀을 지탱하느라 체력이 바닥난 블런트는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16점에 묶이는 부진을 보였으며, 팀도 일찌감치 탈락한다.

2 이중계약 파문

시즌이 끝난 후 LG는 블런트와의 재계약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결혼식에 프런트 직원을 보낼 정도로 정성을 쏟았고, 블런트도 흔쾌히 재계약에 동의했다. 하지만 99~2000시즌을 목전에 둔 11월 1일, 블런트는 돌연 구단을 이탈해 미국으로 야반도주한다. 그리고 11월 4일, 미국 하부리그인 IBL의 트렌튼 스타즈 로스터에 블런트의 이름이 올라온다. 이른바 이중계약을 한 것.

개막을 앞두고 졸지에 에이스를 잃어버린 LG로서는 어안이 벙벙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낸 KBL은 블런트가 타국 리그에서 활동할 수 없도록 강경하게 조치를 취했다. 블런트의 이탈로 전력에 큰 타격을 입은 LG는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과 더불어 대체 외국인선수들이 힘을 쓰지 못하며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신생팀인 LG를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던 선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에는 LG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된, LG 팬들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애증의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