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기율 팔항주의

정체자: 三大紀律八項注意
간화자: 三大纪律八项注意
영어: Three Rules of Discipline and Eight Points for Attention

1 중국 인민해방군의 기본 규율

마오쩌둥옌안 시절이었던 1928년에 내세운 군 규율. 당시 군벌장제스국민혁명군(국민당군)이 민초들을 수시로 탈탈 털고 괴롭히면서 민심을 잃어가던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의 홍군에게 이를 엄격히 금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미리 요약하자면 초창기의 중국 인민해방군은 군대 계급이 없었고 그야말로 장군이건 말단 쫄병이건 동등한 계급이었으며 병영부조리 따위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던 깨끗한 군대였으며 마치 지금의 이스라엘군처럼 수평적인 군대였다.[1]

삼대기율 (三大紀律)
* 1.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一切行動聽指揮)
* 2. 군중의 바늘 하나,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는다. (不拿群眾一針一線)
* 3. 얻어낸 모든 것은 공동 분배한다. (一切繳獲要歸公)
팔항주의 (八項注意)
* 1. 말할 때는 온화하게 한다. (說話和氣)
* 2. 매매는 공평하게 한다. (買賣公平)
* 3. 빌려온 것은 반드시 되돌려준다. (借東西要還)
* 4. 손해를 입혔을 경우 반드시 배상한다. (損壞東西要賠)
* 5. 구타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 (不打人罵人)
* 6. 농산물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 (不損壞庄稼)
* 7.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不調戲婦女)
* 8.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不虐待俘虜)

물론 예외도 있었겠지만, 홍군 병사들은 이를 가능한한 철저히 지켰고 그 덕에 민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규율은 2차 세계대전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인민해방군 총사령부가 공식 강령으로 인정해 계속 이어졌고, 한국전쟁중국-베트남 전쟁 같은 국외전에서도 대체로 지켜졌다. [2]

특히 8항 같은 경우에는 전 세계의 군대에서도 봤을 때 매우 선진적인 규율이었다.[3] 2차 대전때 연합군은 그래도 잘 지킨편이지만 추축국은 포로에 대한 학살과 학대를 일삼았다.[4] 그래도 신사적이었던 미국군영국군조차 이따금 포로에 대한 가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5] 홍군이 포로를 우대한다는 규율을 만든 것은 매우 나름대로 이례적이었다.[6]

확실히 홍군의 이러한 엄격한 군율은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로 역습을 당한 후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에까지 버림받아 궁지에 몰린 광저우 기의나 난창 기의를 일으키며 몰락해가던 중국 공산당의 군사적 기반의 확보에 큰 기여를 했으며 장제스의 초공작전 때 공산당이 나락에 몰렸을 때도 최후까지 살아남을 여력을 마련해주었다는 데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민심 확보의 결과로 홍군은 국공내전이 발발했을 때 만주에서 큰 인심을 얻어 수십만 단위의 병력 보충을 했었는데 반면 국민당은 만주 지역에서 고작 수백명을 징병할 수 있었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다만 이러한 삼대기율 팔항주의에 대해서 너무도 고평가가 되면서 빠가 까를 만드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예컨대 삼대기율 팔항주의가 민심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많지만 이 민심이 절대적이었냐는 것에 대해선 학계는 회의적이다. 그리 민심이 절대적이라면 초공작전 때 홍군이 왜 패했으며 주민들은 홍군이 물러나자마자 왜 국민당을 환영했는지 같은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또한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최대 패착은 민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중일전쟁으로 단련되고 미군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 200만을 만주진공작전으로 날려버린 상황에서 무모한 점령지 사수를 남발하다가 일선부대들의 반발로 대륙을 말아먹은 것인데 이를 경시하고 민심을 얻어 이긴 홍군~이라는 두루뭉술한 문구로 국공내전의 본질을 흐려버리고 홍군을 천군인양 묘사하는 경향이 있어 문제다.

각설하고 마오쩌둥의 집권 후반기에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병크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이 규율도 단순한 군율이 아닌 마오쩌둥 우상화에 악용되기 시작했고, 팔항주의의 5번 항목을 유권 해석해 홍위병들에게 쪽도 못쓰고 당하거나 그들의 만행을 팔짱 끼고 방조하는 등 흑역사까지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문혁 종결 후에는 예전처럼 그렇게 유난스럽게 강조되지는 않고 있지만, 규율을 만든 마오쩌둥이라는 인물 자체가 국부고 인민해방군의 정체성도 공식적으로는 인민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민을 존중한다는 이 규율의 효력 자체는 계속 존중되고 있다. 경험자들에 따르면 생각보다 친절한 집단이라고 한다.[7]

물론 이러한 건에 대해서는 제대로 규율이 안 지켜져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최소한 외부와의 전쟁에서 중국군은 전시국제법을 준수하는 편이다. 하지만 625때 피난민들이 중공군이 소 잡아간다고 소부터 챙겼던 사례를 생각해보면...

1.1 현실은 시궁창

1948년 4월 린뱌오가 지휘하는 공산당군이 창춘을 포위했다. 그는 최고의 야전군 지휘관으로 여겨졌으며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아울러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국민당의 창춘방어군 지휘관 정둥궈에게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도시를 굶겨서 항복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1948년 5월 30일에 그의 명령이 떨어졌다.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라."
(중략)
창춘 시민들은 단체로 공산당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기나 어린아이를 병사들에게 맡긴 채 도망쳤고 어떤 사람들은 초소 앞에서 목을 맸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병사들은 단호함을 잃었고 일부는 무릎을 꿇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는 단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암암리에 피난민을 통과시키는 군인들도 있었다.
상부에서 이 문제를 시정시키자 또 다른 풍조가 발견되었다. 군인들이 피난민을 때리고, 포박하고 총을 쏴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 해방의 비극 28~31쪽

"창춘은 마치 히로시마 같았어요. 사상자 수도 대충 비슷했지요. 다른 거라곤 히로시마는 9초가 걸렸고 창춘은 5개월이 걸렸을 뿐이죠."

- 인민 해방군 중위 장정룽

덩샤오핑의 주도로 공산당은 대략 500만명 이상의 남자와 여자들, 때로는 아이들까지 징발했다. 덩샤오핑은 마을마다 엄밀한 할당량을 배정하고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곡갱이와 삽을 든 수백만의 징용자들은 전선으로 식량이나 각종 물건을 지어 나르며 병참 지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의 맨 앞에서 행군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총알받이로 이용되었다. 공산당군 선두에서 비무장 상태의 마을 주민들이 물밀듯 몰려오자 국민당군은 당황했다. 당시 일반 사병으로 국민당군의 참호를 지켰던 린징우는, 적군을 막느라 총을 쏘다가 손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비무장한 일반인에게 총을 쏜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으며 눈을 감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사격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 해방의 비극 58쪽

1968년 12월, 윈난 성 혁명위원회에서 인민해방군 1000명을 샤디엔에 파견했다. 혁명열에 불타는 이 붉은 전사들은 이슬람을 믿는 촌민들을 무시하고 적대했다. 모스크를 숙박 시설로 삼아 기거했고, 촌민들에게 돼지 사육을 강요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고 남은 뼈를 마을 우물에 버리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경멸이고 치욕이었다.

격분한 신도들은 쿤밍에 있는 성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도리어 탄압으로 되돌아 왔다. 반혁명 폭동을 진압한다며 더 많은 군인들을 파병한 것이다. 비극의 절정은 1975년 7월 29일이다. 새벽 3시부터 무차별 포격과 총격이 개시되었다. 소총만이 아니라 대포까지 동원되었다. 삽시간에 사방은 불바다와 피바다로 변했다. 거의 모든 집과 모스크가 붕괴되고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공식기록으로 7700명 주민 가운데 9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사후에 병사한 이들까지 합하면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즉사한 900명의 희생자 가운데 기사 아저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누나 등 일가족 9명도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매일 같이 기념비에 들려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그가 18살 때 경험한 비극이다.
-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윈난 : 이슬람 중국'#

티베트 전쟁 내내 중국 인민해방군이 보인 잔학무도함은 너무나 심각해서, 수년동안 티베트 공산당 지도자였고 티베트 민족정치자문의원회의 부회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푼촉 왕걀마저 중국군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항의했다가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에 동정을 표했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다.

또한 라싸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청호칭 대령은, 아군이 저지르는 끔찍한 학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티베트군으로 전향해 버렸다. 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군과 싸웠고, 티베트로 파견되어 군인으로 몇 년을 더 복무했다가 티베트 저항군에 가담하여 예전의 동료들과 싸웠다.
그는 티베트 동부 지방인 캄과 암도에서 일어난 티베트 저항군과 중국군과의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으며, 중국군 수뇌부에서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는 식량 배급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작성한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청호칭은 롭상 타시라는 티베트식 이름도 얻었는데, 중국군의 탱크와 비행기가 티베트 민간인을 노리고, 티베트 마을들이 중국군 폭격기에게 폭격당하는 장면도 목격하였다. 청 대령은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으로 여러 해를 살다 타계했다.
- 티베탄 리뷰 1979년 10월 호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있던 학생과 일반시민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고 전차로 역살하는 등 무력탄압해 다수의 사망자를 냈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산둥성 텅저우 거주 장스쥔은 2009년 홍콩의 빈과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압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정치 선전원으로 지정돼 총기를 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들의 구호는 ‘인민을 부모로 보고, 학생을 자매로 보라'였다. 우리는 인민을 부모로 본다는 군대가 결국 중화민족 최대의 비극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머리에 흰띠를 두른 학생들이 피범벅이 돼 눈 앞에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오쩌둥 기념관 우측 사거리에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나무몽둥이와 가죽띠로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봤다.”
당시 진압에 참가한 54군단 소속 지휘관들은 작전 후 일괄 승진했다. 주차오성 군단장은 허난성 군구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당시 사단 정치위원이었던 왕위파는 후에 홍콩주둔부대의 정치위원으로 승진한 뒤 나중에 광저우 군구 부정치위원을 맡았다.
- 중앙일보 천안문사태 진압 병사가 입을 열다

2011년 12월 2일, 중국 란저우에서 성난 민중들이 군용차량을 전복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란저우군구 사령부의 차량이 난폭하게 정차한 후 6명의 군인이 차도를 점유하고 있던 노점상들을 구타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격노한 란저우 시민 1000여 명이 주위를 포위하며 군용차량을 전복시켰다.

몇 시간 후 란저우 현장 사진과 소식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한 란저우 시민은 “방금 봤는데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라고 했고, 또 다른 란저우 시민은 “군용차량의 난폭운전은 진작부터 민원을 제기했었다. 경찰도 감히 제지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민중들 스스로 (차량을) 전복한 시킨것이다!”라고 했다.
- NTDTV#[8]

2 위의 규율을 바탕으로 한 군가

1935년 (또는 1936년)에 나온 노래로, 당시 홍군 제25군 정치부장이었던 청탄(程坦)이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청탄이 직접 작곡한 것은 아니고, 위안스카이가 집권할 당시 톈진에서 불리기 시작한 국민혁명군의 군가를 개사해 만들었다. 규율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만큼 홍군에서는 공식 군가로 취급되었고,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마오쩌둥이 만든 규율이라고 해서 그의 어록에 곡을 붙인 소위 '어록가'이자 혁명가요로 여겨져 민관군 가리지 않고 수없이 불려지고 TV랑 라디오로도 수시로 방송되었다.

규율과 마찬가지로 문혁 종결 직후에는 그 반작용으로 가창이 암묵적으로 자제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군가로 계속 애창되고 있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문혁을 배경으로 한 문예 작품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중국과 대만이 공동 참가했을 때 개막식에서 이들의 국가의용군 진행곡중화민국 국가를 양측이 정치적 문제로 모두 거부하게 되자 올림픽 조직위원회 측에서 중국과 대만 양 측과 인연이 있던 이 곡을 양측의 입장 음악으로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과 우방국인 북한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이 부른 문화어 번안판도 있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나오지만 링크는 코렁탕을 들이킬 수 있으므로 금지.

2.1 가사

1절
革命軍人個個要牢記, 혁명군인 각각은 다음을 명심하자.
三大紀律八項注意; 삼대기율 팔항주의
第一一切行動聽指揮,제일은 모든 행동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
步調一致才能得勝利。함께 발맞추어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

2절
第二不拿群眾一針線, 제이는 인민들에게 바늘 하나도 취하지 말라
群眾對我擁護又喜歡; 그러면 인민들은 우리를 지지하고 좋아할 것이다.
第三一切繳獲要歸公, 제삼은 노획물은 (인민과 함께) 모두 공유한다.
努力減輕人民的負擔。 인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절
三大紀律我們要做到, 삼대기율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하고
八項注意切莫忘記了: 팔항주의의 모든 항도 잊지 말아야한다.
第一說話態度要和好, 제일은 공손한 말투를 쓰라.
尊重群眾不要耍驕傲; 인민을 존중하고 교만하지 말자.

4절
第二買賣價錢要公平, 제이는 물건을 매매할때 정직하게 하라.
公買公賣不許逞霸道; 공정하게 거래하며 절대로 어거지를 쓰지말라
第三借人東西用過了, 제삼은 물건을 빌려 사용할때는
當面歸還切莫遺失掉; 반드시 돌려주고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라

5절
第四若把東西損壞了, 제사는 빌린 물건이 파손되었을땐
照價賠償不差半分毫; 해당 가격에 조금도 깎지말고 제가격에 배상하라
第五不許打人和罵人, 제오는 구타와 욕설을 금한다.
軍閥作風堅決克服掉; 군벌의 행태를 극복하자

6절
第六愛護群眾的莊稼, 제육은 인민들의 경작지를 보호하라.
行軍作戰處處注意到; 행군과 작전시에 반드시 주의하라
第七不許調戲婦女們, 제칠은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을 금한다.
流氓習氣堅決要除掉; 불량배들이 하는 짓은 반드시 없애자

7절
第八不許虐待俘虜兵, 제팔은 포로를 학대하는 것을 금한다.
不許打罵不許搜腰包。 때리거나 욕하거나 빼앗는것을 금한다.
遵守紀律人人要自覺, 이런 기율을 각각이 명심하고
互相監督切莫違反了。 서로 위반하는지 감독하자.

8절
革命紀律條條要記清, 혁명기율을 항상 분명히 외우고
人民戰士處處愛人民, 인민의 전사는 인민들 사랑하자
保衛祖國永遠向前進, 조국을 지키고 영원히 전진하자
全國人民擁護又歡迎。 전국의 인민은 우리를 지지하고 환영할 것이다.

2.1.1 조선어 번안판

혁명군인 명심합시다 3대규률 8항주의를
첫째로는 모든 행동 명령에 복종해야 승리합니다
둘째로는 인민의 재산 바늘 실 하나 다치지 말고
셋째로는 전리품을 바치여 인민들을 도와줍시다

3대규률 지키여가고 8항주의 잊지 맙시다
첫째로는 말을 할 때 겸손하며 인민들을 존중합시다
둘째로는 모든 물건을 공평하게 팔고삽시다
셋째로는 인민들의 물건을 빌려쓴 다음 돌려줍시다

넷째로는 손상된 물건 제값으로 변상합시다
다섯째는 구타욕설 하지 말고 군벌작풍을 극복합시다
여섯째는 행군전투 때 농작물을 애호합시다
일곱째는 녀성들을 존중하고 불량행위 하지 맙시다

여덟째는 포로들을 구박천대 하지 맙시다
우리모두 서로 돕고 통제하며 규률위반 하지 맙시다
혁명규율 명심하고 인민들을 사랑합시다
조국 위해 한몸바쳐 싸워갈 때 인민들은 환영합니다

2.2 동영상



중국 인민해방군 군악대 가창


중국 인민해방군 군악대취주악 편곡판 연주.
  1.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흑묘백묘론 사상에 입각한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중국군은 다시 계급 제도가 부활했다.
  2. 알려진 것과는 달리, 중공군은 한국전에서 매우 신사적으로 전쟁에 임했고, 그래서 포로가 의외로 많이 발생했다. 이는 적군이었던 한국군백선엽채명신, 미국군리지웨이김영옥 같은 참전 장교들의 회고록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다.
  3. 물론 저 규율이 선진국이라고 중공군이 항상 친절하거나 제네바 협약을 잘 지킨건 아니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 전쟁에서는 교묘한 방법으로 포로들을 세뇌시켜 자국 군대의 장병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중국 국민으로 국적을 변경시켰다. 포로의 신변은 둘째치고 이건 엄연히 납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4. 역사에서는 역사적으로 포로 학살이 자주 일어났고, 20세기에 들어서도 중일전쟁 최대의 적군이었던 일본군은 그 자신들도 온갖 병영부조리가 가득한 집단답게 수시로 포로와 민간인들을 학대하고 대량 학살했다.
  5. 소련군은 포로나 민간인에게 가혹행위를 한 병사들을 매우 엄하게 처벌했는데도 일부 병력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을 정도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나치가 소련에게 저지른 만행이 원인이지만.
  6. 물론 잘 지켜졌는가와는 별개의 문제라서 중국군은 적국 포로에 대한 세뇌로 악명이 높다. 그리고 규율을 만드는 것과 모든 사람이 그걸 지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라는것도 생각해야 한다.
  7. 특히 팔항주의의 1항과 5항으로 인해, 중국 여행자들은 길 모르겠으면 길 지나가는 직업군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고 세세하게 알려줄 정도. 그래서인지 몰라도 직업군인/전역군인들에 대한 대우는 미국하고 비슷할 정도이다. 아침식사를 먹으러 오면 다른 손님들보다 식사를 먼저 내준다던가, 비행기에 비즈니스석 이상의 상석을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8. Asia Times 같은 영자지에 심심찮게 중국군이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린 사건들이 올라온다. 한 예로 중국에서 군 소속 및 군 소유기업의 차량은 백색번호판을 달고 다니는데, 이들 차량의 횡포가 많은 원성을 사고있다. 이 백색번호판 차량들은 고속도로 통행료는 물론, 주차요금도 내지 않고, 과속 난폭운전을 일삼는다. 이 와중에 인명 사고를 일으켜도 처벌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일부 부패 장교들은 민간인에게 이 백색차량번호판을 뇌물받고 팔다가 적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