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스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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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플라비우스 스틸리코/Stilicho.jpg

Flavius Stilicho
(ca. 359? 365? A.D. – August 22, 408 A.D)

최후의 로마인(the last of the Romans)
로마제국 말기의 충신이자 명장. 한마디로 로마판 최영장군[1]

로마 제국의 장군, 2선 집정관. 게르만계 로마인으로, 히에로니무스와 같은 동시대 로마 지식인들은 그를 반야만족이라고 불렀다. 그 행보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대체로 로마 제국을 위해 헌신한 충직하고 유능한 군인으로 평가된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일컬어 로마 최후의 장군(the last of the Roman generals)[2]이라고 칭했다.

2 경력

2.1 불분명한 젊은 시절

이 시기 활약한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태생은 물론이고 출생년도조차 359년에서 365년까지 불분명하다. 반달족 출신의 로마 군인과 로마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정도가 그의 출신성분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거의 유일한 사항이다. 다만 이후의 행적으로 미루어볼때, 출신 부족의 유력자로서 자신을 따르는 일족과 함께 일종의 용병대장으로 처신했던 대부분의 고위 게르만계 장군들과는 달리 로마인에 보다 가까운 환경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계 쪽으로 반달족 혈통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에서 반달족과 뭔가 특별한 관계를 가진 흔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그는 당시 기독교를 신봉하던 대부분의 게르만 족과는 달리 아리우스파가 아닌 니케아 정교의 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물론, 황제의 신임을 얻었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하는 동시에, 이교와 이단에 대해서도 상당히 엄격한 태도를 취했던 사람인만큼 그런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스틸리코가 이단으로 취급되던 아리우스 파 기독교도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가 아리우스 파를 신봉하는 이단이었다는 아니면 말고 고발은 408년 그가 처형된 이후에 주로 제기되었는데, 이때는 그가 아리우스 파를 신봉하는 고트족과의 정치적 결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시점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었음에도 그의 초기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사실상 전무하다. 다만 그에게 심취했던 이집트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의 기록을 통해 그의 아버지가 로마제국 동방을 통치하던 발렌스 황제 휘하에서 기병을 지휘했다고 추측될 뿐이다. 이를 감안하면 스틸리코의 군 경력도 동방 제국에서 시작되었을 공산이 크다. 대략 서기 359년에서 365년 사이로 추정되는 그의 출생년도를 고려하여, 대략 17세 정도부터 군경력을 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방 제국에 후임 황제로 부임한 서기 379년 사이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2.2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기

2.2.1 발탁

기록에 그의 이름이 분명히 등장하는 것은 서기 383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3세와의 평화조약을 위해 일단의 사절단을 파견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스틸리코는 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아르메니아 문제를 논의하는 교섭 현장에 참여하여 제국의 위신을 지키는데 공헌했다고 한다.

359년 출생설을 믿는다면 불과 24살, 365년 출생설을 믿는다면 18살, 어쨌든 아무리 높게 잡아도 20대 초반밖에 안되었을 젊은이가 군사 문제도 아니고 외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때 그가 교섭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스틸리코가 황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를 황제 호위대장(comes stabuli )으로 승진시키고, 이어서 자신의 질녀이자 양녀이기도 했던 세레나(Serena)를 그와 결혼시킴으로써 그를 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90년경에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테오도시우스 황가에서 공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사실상 세레나 뿐이었고, 또한 세레나에 대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총애가 두터웠음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히 파격적인 대우다.오오 온달 오오
클라우디아누스를 비롯한 동시대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세레나는 분명히 테오도시우스 황가와의 인연을 원하는 여러 유력자들이 탐내는 결혼 대상이었고, 상당한 경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무렵 제국은 어쨌거나 게르만족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황가에 굳이 게르만족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고 게르만족에 대한 반감조차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결혼은 그의 게르만족으로서의 배경보다는, 그가 보여준 실력을 염두에 둔 혼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략 서기 384년에서 385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결혼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의향이 강하게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이후 황궁과 원로원에서 스틸리코를 꾸준히 지지한 세레나의 행보를 보면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남녀로서의 사이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던 듯 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2녀가 출생하는데, 아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숙부로 추정되는 이의 이름을 따서 에우케리우스(Eucherius), 두 딸 또한 테오도시우스 가문 여인들의 이름인 마리아(Maria)와 테르만티아(Thermantia)로 명명된다.

2.2.2 군사령관

이후 스틸리코의 행적에 대해서는 역시 뚜렷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황제 호위대장이자 황제의 (조카)사위라는 신분과,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83년 이후에도 계속 전쟁을 치뤘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틸리코가 계속 테오도시우스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서기390년경의 일인데, 이때 스틸리코는 서기 390년경 고트족과의 분쟁으로 추정되는 바스타르네이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면서 제국군 지휘부의 최고 서열에 해당되는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에 임명된다. 이때 테오도시우스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전쟁이나, 이후 게르만족과의 싸움에서 위기에 빠진 황제를 구출하는 등 대활약했던 용장 프로모투스 장군을 잃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스틸리코를 발탁했을 가능성이 크다. 클라우디아누스가 스틸리코와 프로모투스의 관계를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그것에 비유했고, 프로모투스의 전사를 계기로 스틸리코와 재상 루피누스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주장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후원하던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테오도시우스 1세의 휘하 장군이었던 프랑크 족 출신의 아르보가스트(Arbogast)와 갈등을 빚던 중 원인모를 죽음을 맞는 사태가 발생한다. 아르보가스트는 그 부친 바우토 장군[3]과 같이, 원로원에 보관되어 있던 '승리의 여신상' 철거 문제나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에 반발하는 등, 소위 이교도 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독실한 아리우스 파 기독교도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의 종교적 문제로 인한 이단VS이교갈등이 심각했고, 따라서 황제의 죽음에 그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아르보가스트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교도였던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황제가 옹호하던 기독교 세력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바우토의 동생이자 아르보가스트의 숙부였던 동로마제국 총사령관 리코메르 장군이 출전하지만 도중에 병사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서기 394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르보가스트 토벌을 위해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 포이데라티 2만 명을 포함하여 대군을 편성한다. 여기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의 첫번째 부인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일족으로 알려진 티마시우스와 함께 로마군 최고지휘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그가 지휘한 동로마군은 서기 394년 가을에 벌어진 프리기두스 강에서의 전투에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를 모두 전사시키는 완승을 거두게 된다. 이때 그의 전공이,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맡기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2.3 최고 권력자

2.3.1 섭정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프리기두스 전투의 승리로 명실공히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되었지만 서기 395년 1월에 지병이었던 수종으로 불과 48세의 나이에 급사한다. 임종의 자리에서 황제는 스틸리코에게 후임 황제가 될 자신의 아들 호노리우스를 지켜달라고 유언한다.[4]

이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동방 제국군과 더불어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투항한 서부 제국군까지 모두 거느리고 있었는데, 서류상으로는 10만 4천에 가까운[5] 이 병력은 물론이고 황제가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보물까지 황제 사후 고스란히 스틸리코의 손에 들어간다. 이 정도 힘을 지니고 있었던데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조카)사위로서 황실의 어른과도 같은 위치였으며, 그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는 황제의 외손으로 역시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이 시점에서 다른 생각을 했다면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무력한 두 아들은 간단히 배제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황제 사후 지체없이 호노리우스 황제를 옹립, 이후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두 황제에게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남긴 보물들을 배분하는 절차를 직접 지휘한다. 동시대인들에게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루머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것조차 없다는 걸로 보면, 이때 그의 행보가 공정했다는 것은 믿어도 좋을 듯.

2.3.2 제국의 분열과 전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후계자들이 어느 쪽이나 싹수없기로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스틸리코는 사실상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활동하게 된다. 다만 그의 지배력은 제국 서부에 국한되어 있었고,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리던 제국 동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총애하던 갈리아 출신의 재상 루피누스[6]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었고, 루피누스를 싫어하던 동로마 궁정의 관료들과 아르카디우스의 황후 에우독시아도 스틸리코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에우독시아가 스틸리코에게 패했던 아르보가스트의 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395년 말부터 고트 족이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때 동방 제국군은 훈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경계하여 대부분 동방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방 제국의 북부 국경선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게르만 족과 맺은 조약에 그 운명을 걸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 뒤, 고트족은 이 조약을 무시하고 군대를 일으킨다. 이때 고트 족의 지도자로 추대된 것이 고트 족의 명문인 발티 가문의 지도자인 알라리크였다.

알라리크의 봉기로 순식간에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 털려버리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긴급히 스틸리코에게 군대를 되돌려보낼 것을 명령했고, 이에 스틸리코는 휘하에 있던 동방 제국군에 제국 서부의 군대 일부를 합쳐 출격, 알라리크의 고트족을 내쫓는다. 하지만 루피누스의 흉계로 인해 스틸리코는 동방 제국군의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동방군을 되돌려보내게 된다.[7]

이후 알라리크와 다시 한번 맞선 스틸리코는 또다시 그를 격파하지만[8] 동방 제국과의 불화로 결정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그가 알라리크를 놓아보낸 직후, 알라리크는 다시 동방 제국에 군사행동을 감행, 아르카디우스 황제에 의해 일리리쿰 전역을 통치하는 군사령관이 되면서 스틸리코는 자신이 사실상 통치하는 이탈리아 곁에 강대한 숙적을 두고 사는 신세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한번 반란을 일으켰던 바 있는 북아프리카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 서부 제국이 일시 공황 상태에 빠진다.[9] 다행히 스틸리코의 적절한 대처로 반란은 조기에 진압되지만 미봉책에 불과했고, 결국 스틸리코는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으로 제국의 사방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된다.[10] 서기 400년, 아프리카 전쟁을 조기에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집정관이 되었지만 허울뿐인 명예였다.

401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동고트족의 라다가스트(라다가이수스)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이에 반달 족, 알라니 족 등의 소규모 부족들이 합류, 이탈리아 북부에 해당하는 라이티아 속주로의 대규모 침공이 단행된다. 스틸리코는 이에 직접 출격, 도나우 강을 건너서까지 동고트 족을 추격하여 격파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지만 이것은 알라리크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던진 낚시에 지나지 않았다.

알라리크의 서고트 족의 침공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그 무렵 호노리우스가 머무르고 있던 밀라노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한다. 스틸리코는 이러한 급보를 접하고 바로 군을 퇴각시켜, 총세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밀라노로 급행하여 피난길에 오르려던 호노리우스 황제를 구출하고 402년 4월 6일,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를 격파역관광한다.[11] 이어 403년, 베로나 근교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는데 성공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의 서술에 의하면 이때 알라리크는 자신이 탄 말의 속도에 자신의 명줄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숨통을 끊으려 하지 않았고, 휴전조약을 체결한 뒤 알라리크를 일리리쿰으로 돌려보낸다.[12] 이때가 사실상 스틸리코의 절정기였다.

2.3.3 최후의 승리, 그리고 죽음

알라리크의 패퇴로 잠시나마 제국에 평화가 찾아온 듯 했지만, 알라리크와 함께 고트족의 거물급 지도자였던 라다가스트가 남아있었다. 405년 말, 라다가스트는 남녀노소 합쳐 거의 10만,[13] 전투병력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거듭된 전투로 스틸리코 휘하에는 1만 내외의 병력이 남아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노예까지 해방시켜가며 간신히 1만 5천 내외의 병력을 증원, 406년 여름에 지금의 피렌체 근교에서 라다가스트를 격파하고, 그를 참수한다. 이때 그가 포로로 잡은 고트 족 사람들 중 군대에 자원한 1만 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노예가 되었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아서 노예 시장의 시세가 폭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4]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스틸리코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진 듯 했지만, 문제는 거듭된 전란으로 로마 제국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다는 것이었다. 속주 통치가 사실상 방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서 반란이 빈발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고트 족에 손을 벌리면서 스틸리코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호노리우스에게 시집보냈던 스틸리코의 장녀 마리아가 숨지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막내딸 갈라 플라키디아와 스틸리코의 아들 에우케리우스 간의 혼담이 이슈가 되면서, 호노리우스 황제가 스틸리코를 의심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말았다[15].

결국 그 동안의 스틸리코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던 호노리우스의 측근들에 의해, 408년 8월 13일에 지금의 파비아에 해당하는 틱티눔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 스틸리코파 군인과 관료들이 대거 살육당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때 스틸리코를 지지하던 군대는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지만 스틸리코는 이를 거부하고[16][17] 8월 23일, 호노리우스 황제가 있던 라벤나에 자진 출두하여 처형당했고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해졌다.

2.4 그 이후

스틸리코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는 스틸리코가 처형된 직후 로마에서 살해당했고, 스틸리코의 둘째 딸이자 호노리우스 황제의 두번째 황후였던 테르만티아는 수녀원에 유폐되어 417년 사망한다. 에우케리우스와 함께 로마에 있던 스틸리코의 아내 세레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딸 갈라 플라키디아의 모략에 휘말려 알라리크와의 공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원로원에 의해 2차 로마 약탈 직전에 처형당했다.

이후 스틸리코와의 동맹을 구실로, 그와 세레나의 복수를 하겠다며 알라리크가 이탈리아 침공을 단행, 결국 410년 로마는 두번째[18] 약탈을 당하게 된다.

3 평가

3.1 군인으로서의 스틸리코

전술가로서는 당대 최고라고 할만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기에는 딱히 그의 군사적 재능을 평가할만한 기록이 없지만, 30대 초반에 군사령관이 될 정도면 이미 테오도시우스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크다. 테오도시우스 사후 알라리크와의 전투에서 그 역시 탁월한 장군이던 알라리크를 상대로 군의 기동과 매복, 야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하는 것이나, 라다가스트를 제압할 때 보여준 정석적인 포위섬멸전을 보면 그의 전술가로서의 재능은 분명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알라리크와 이탈리아에서 맞겨룰 때나,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스틸리코가 지휘한 병력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상대에 비해 우위를 점한 적이 거의 없다.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전에 알라리크는 일리리쿰 군사령관을 겸하며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의 주요 군사거점에서 충분한 보급을 받으며 정예군을 양성했고, 라다가스트는 그런 알라리크와 대등한 동맹자로 여겨졌던 세력가였다. 스틸리코가 그런 적들과 맞서면서 게르만 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노예까지 해방시켜가며 급조한 병력을 단기간에 전력화한 것은 물론, 그들의 충성까지 얻어낸 것은 보통 이상의 재능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전략가로서의 역량에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북아프리카 반란을 진압할 때 불과 5천의 병력으로 수만 대군을 모았던 북아프리카의 길도를 제압하고 단기간에 북아프리카는 물론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안정시킨 정략은 분명 뛰어나지만, 이후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등 속주를 지키던 병력들을 철수시킨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당시 제국의 군사력이 심각하게 피폐해져 있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다. 스틸리코가 피에솔레 언덕 전투 직전에 동원했던 병력이 겨우 3만 명인데 속주 군대를 차출하고 게르만 족과 훈족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심지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래 최초라는 말까지 나온 노예해방이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해가며 병력을 증강했음에도 3만에 불과했다면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별다른 이견이 없으며, 그가 어떤 야심을 품었건 간에 그 시점에서는 그만한 군사 지도자가 로마에 없었다는 평가 또한 마찬가지로 거의 이견이 없다.

3.2 정치가로서의 평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했을 때나, 마지막에 처형될 때 보여줬듯 시종일관 처신이 깨끗했기 때문인지[19], 그에게 반감을 품은 대부분의 동시대 지식인들도 그의 청렴함을 인정했을 정도였으며, 원로원 의원들과 기독교의 유력자들 상당수는 최소한 405년 전까지는 그의 게르만 혈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고 전한다.

자신의 게르만 혈통을 상당히 의식한 듯, 다른 게르만계 세력가들과는 달리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행보를 많이 보였고, 그 덕분에 원로원에게 발목을 잡히기도 했다.

딱히 이교를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정책을 계승하기는 했던 것 같다. 서기 405년 경에 로마 전래의 예언서로 알려진 시빌라 예언서를 파괴한 흔적이 남아있다.

3.3 개인으로서의 평가

클라우디아누스에 의하면 때이르게 머리가 세어 반백이기는 했지만, 당당한 체격에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였으며, 무예와 학문에 두루 능통했고, 대단히 가족적이면서도 공사 구분이 철저했다고 한다.
물론 클라우디아누스의 배경[20]을 생각할 때 저런 찬사는 상당히 가감하여 들을 필요가 있지만 아들 에우케리우스가 사망 당시 로마에서 트리부누스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이나, 금전적으로 문제가 거의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최소한 개인적인 미덕만큼은 충분했던 것 같다.

  1. 둘다 권신이지만 충신이었으며, 둘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여겼다.
  2.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또한 대체로 '최후의 로마인'(the last of the Romans)으로 불린다. 하지만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 아에티우스 항목을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자 내전을 두려워해 죽음까지 감수했던 스틸리코에 비해, 아에티우스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경우에는 황제와 적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시기 활약했던 다른 게르만계 장군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스틸리코 가 최후의로마인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스틸리코는 로마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한 귀화2세 이고 아에티우스는 로마의 가치관을 벗어난 로마국적자..
  3. 이 장군의 딸, 그러니까 아르보가스트에게는 누이가 되는 여인이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 아르카디우스의 황후가 되는 에우독시아다.
  4. 이때 황제의 임종을 지켰던 밀라노 대주교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스틸리코에게 호노리우스 뿐만 아니라 그때 동방 제국을 지키던 장남 아르카디우스의 후견까지 아울러 맡겼다고 주장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한 시초를 제공한다.
  5. 물론 각 주둔지의 동원가능 병력이므로 실제 야전군은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6. 젊었을 적에는 상당한 미남이었고, 법률가인 동시에 관료로서 출중한 수완을 발휘했다고 한다. 다만 물욕과 권력욕이 좀 지나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 생전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7. 이후 루피누스는 스틸리코가 돌려보낸 동방군에 의해 참살, 스틸리코의 지령이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이후 정세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8. 이 전투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견이 존재하지만 알라리크가 털린 것은 사실인 듯 하다.
  9. 북아프리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밀의 주산지로,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의 식량자원 공급을 책임졌다.
  10. 이에 대처하기 위해 스틸리코는 각지 속주에 파견되어 있던 군대를 소환하는데, 이때의 일을 배경으로 집필된 소설로 '눈속의 독수리'가 있다.다만 여기서 스틸리코는 본의아니게 먹튀로...
  11. 이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의 대전과를 거두지만, 알라리크는 휘하의 정예병 대부분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완승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2. 동방 제국의 장군 신분이던 알라리크를 처단할 경우, 동방 제국과의 내전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알라리크를 이용하여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사방의 적들에 포위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서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쓸만한 동맹을 구하려했다는 의견도 있다. 숙적인 알라리크가 왜 쓸만한 동맹이냐면, 실력은 있지만 스틸리코한테는 매번 발려서(...)
  13. 40만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과장되었다고 한다.
  14. 이런 기록 때문에 라다가스트 휘하의 인원수가 40만이었다는 기록을 믿지는 못하더라도 20만 정도는 되지 않았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15. 다만, 스틸리코가 집정관에 취임할 무렵인 서기400년에 쓰여진 클라우디아누스의 송가를 보면 에우케리우스와 갈라 플라키디아는 호노리우스가 마리아와 혼인할 무렵부터 이미 사실상 약혼한 것과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연령을 고려할 때 갑자기 혼담이 나왔다기보다는 혼인 적령기까지 키잡기다렸다고 보는 게 맞을 듯.
  16. 이때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던 일부 부대가 스틸리코의 결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17. 또한 이 부대는 사실상 로마의 마지막 정예정규군+비정규의용병 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스틸리코 가 처형된뒤 알라리크 에게 흡수 되었다.
  18. 첫번째 는 공화정시절(기원전 387년)켈트족 에게 약탈을 당했다.
  19. 로마사에서 그와 비슷한 인물로, 지명도는 그보다 더 높은 아이티우스가 수완은 스틸리코보다 위였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티우스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보여준 처신들은 스틸리코에 비하면 굉장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시대와 배경의 차이를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20. 정치 감각이 뛰어났던 세레나가, 남편에 대한 일반 여론의 호전을 위해 당대의 유망한 시인이던 그를 금전적으로 후원하고, 심지어 부인까지 중매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