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200px
한창 유학시기의 파릇파릇한 유길준. 신입생의 포스
안상태??

200px
우리 눈에 조금은 익숙한 모습

兪吉濬
1856년(철종 7년) 11월 21일, 음력 10월 24일 ~ 1914년(융희 8년) 9월 30일

1 개요

개화기 조선정치가, 본관은 기계, 호는 구당. 서울 출신이다.

온건 개화파중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최초의 유학생 타이틀을 두개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의 중심이 된 개화파인 동시에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의심받는 매국노의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나마 을사조약경술국치를 반대하고, 일제의 조선 귀족 작위는 거절하여 이름을 더럽히진 않았는데, 덕분에 더더욱 그의 평가가 엇갈리게 된다.

2 생애

15세부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과 함께 공부했다.

1881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에 참가,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으며 일본의 유명한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 밑에서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접고 1883년에 귀국해서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를 발간하다가 사절단인 보빙사의 일원으로 민영익, 홍영식 등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다. 참고로 미국의 뉴욕에 도착하는데까지 2달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고한다. 보빙사 임무가 끝난 뒤에도 미국에 남아 메사추세츠주의 거버너스 아카데미에서 유학길을 밟아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1].

보빙사는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전기'를 경험하였는데 유길준은 "인간이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전기가 켜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 미국에서 컬쳐쇼크 신세계의 문물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유길준이 개화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된 시초가 된다.엘리베이터를 처음 탄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문이 감옥처럼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기를 가두는 줄 알았다고 착각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다 갑신정변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1년간 유럽을 돌아다니다 12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김옥균 등과의 친분 탓에 체포되어[2]죽을 뻔 한것을 한규설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모면하고[3] 거의 10년간을 한규설의 식객이 된다. 서유견문은 이때 집필, 10년 후 을미개혁 때 출판된다.

집에 있던 와중에 영국거문도 점령 사건이 발생했고, 조선중립화론을 조심스레 발표해보지만 무시당했다.[4]

2.1 갑오을미개혁과 단발령

그 후 1894년, 드디어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여 내무부를 맡으며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담당하는 등 개혁파의 큰 손으로 활동하였으며 1895년에는 단발령을 내렸다가[5] 수많은 유림들이 유길준에게 반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을미사변의 을미사적(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으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을미사변 당시 유길준이 협력했다는 것은 윤치호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심증 수준이다. 하지만 당시 정황에서 유길준이 을미사변에 개입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반대로 유길준은 흥선 대원군이 을미사변을 꾸민 것으로 편지 등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여러 의견이 갈리는 부분.

그 후 육사 출신의 일심회와 연결해 쿠데타를 기도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그때 다른 유학생들은 다 끔살. 그래서 일본에서도 유배를 당했으나 고종 폐위 후 귀국해 흥사단 부단장, 한성 부민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2 귀국 이후 말년 - 친일을 거부하다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에는 '병자수호조교 이후로 일본은 꾸준히 조선의 독립국 직위를 유지시키려 하였지만 조선이 잘못해서 보호국이 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일본이 근대화의 스승이라는 입장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반면 입헌군주국일지라도 군주권의 존재에 대한 생각도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보수적 근왕주의 개혁가에서 급진적 사회변혁가까지 널을 뛴다[6]. 이런 테크를 탄 경우에는 대부분 을사조약 이후에는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친일로 전향해서 대일본 제국 반자이를 외치기 마련[7]인데...,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을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상실 후 작위도 거부한다. 자신의 소신을 지킨 몇 안되는 개화파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다.[8]

3 사상과 저서

그의 사상은 실상개화(實狀開化)로, 개화는 사람을 지선극미(至善極美)로 이끈다고 생각하였으며 문명은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 사관을 제시하였다.

서재필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본 것이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던지, 군민공치를 주장하면서 상공업 진흥, 근대적 조세와 화폐,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근대 교육에 특히 앞장섰다.

파일:Attachment/studyryu.jpg

노동야학회고문 유길준씨 고문의 말씀 : "여보(이보시오), 나라 위하여 일하오. 또,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노동자의 대답 : "네. 고맙소. 그리하리다"

본인이 쓴 '노동야학독본'의 한 장면이다.

그의 저서로는 서유견문, 구당시초, 대한문전, 노동야학독본이 있다.

이 중에서 서유견문은 최초의 한글 조사를 사용한 국한문 혼용 도서로만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단순한 서구 여행기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모습을 보고 우리 체질에 맞는 근대화 방안을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방략서로,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배울 점이 있는 양서이다[9]

내용 외적으로 보면 이 책을 통한 저자의 목적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일단 책이 나온 다음 고종에게 바쳐서 정책화 시도했고 당연히 실패. 조선에서는 금서가 되었고, 일본에서 찍었는데 그 책들도 판매용이나 배포용은 아니고 갑오개혁과 갑신정변에 대한 자신의 정책 홍보용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 출판되었다는 점을 봐도 알수 있지만 기존 종속체제인 청나라에 대한 사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지만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서 이후 영향을 받은 갑오개혁에서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초기 개화파들의 방향성을 그대로 규정해버렸다.

뱀발로, 유길준이 항상 입던 검은 정복과 그의 작위 사퇴서는 웬 일인지 고려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에 있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유길준이 자주 쓰던 틀니(...)도 그곳에 있다.
  1. 다만 조선 정부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케이스는 아니다. 그냥 눌러 앉았다
  2.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나서 자신은 뭐가 됐든간에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한 후 귀국했다. 다만 미국에서 귀국하는 과정에서 조선행인 태평양을 건너지 않고 대서양으로 향해서 유럽 유람한 케이스이다. 김옥균과의 만남은 유럽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이야기.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 것이 목숨 연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3.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사건으로 받은 판결은 형량이 상황에 따라 들쑥날쑥하며 일단 사형 선고를 받아도 주변 사람이 말 잘하면 처벌이 없다시피 했다. 유길준이 그랬고, 후일의 이승만도 그랬다. 유길준은 석방, 이승만은 도서관 차려놓고 선교사 불러다가 공부했던 범털. 다만 당장 사건이 벌어진후 시간이 얼마지나지 않았다면 그런 것 없이 죽었는데, 이쪽은 홍영식이 유명하다.
  4. 벨기에스위스처럼 한반도도 요충지이기때문에 잘 대처한다면 그네들처럼 영구 중립국이 될 수 있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시기 유길준은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다. 벨기에와 스위스 같은 유럽권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태국 같은 경우는 비등한 두 세력이 충돌한 경우였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 특히 일본은 조선을 포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러일전쟁 이전 가장 불리했던 시절의 일본이 내놓은 제안은 조선 중립화가 아니라 분할이었다. 정유재란 시기 화평 조건으로 조선8도중 4도 내놓으라던 도요토미의 제안과 마찬가지 이야기다. 물론 이쪽은 러일전쟁을 일본이 이기면서 그냥 다 냠냠했지만. 그래서 20년 가까이 지난 1904년의 조선(대한제국) 중립국화 론은 그렇게 씹혔다.
  5. 해외 순방의 경험이 누구보다 많았던 그의 입장에서는 짧은 머리가 편하고 위생적이라고 생각했다.
  6. 이런 평가는 서유견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런 모순성이야말로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의 특징이자 한계이다.
  7. 가장 유사한 인물이 바로 박영효이다. 갑신정변 연루, 갑오개혁 참가, 쿠데타 시도, 일본 집권으로 조선복귀까지 유길준과 큰 차이가 없는 일생을 보내고 골수친일파로 한 자리했다.
  8.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거의다 친일파다.(...) 동생하고 첫째 아들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낸 거물급 친일파에 속하고, 둘째아들인 유억겸은 그래도 '합법적 공간'에서 신간회라든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었다만,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친일파 99인'에 따르면 본인도 작위는 거절했으나 은사금 일부를 받았다고도 한다.
  9. 다만 지나치게 서양에 경도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실제로 그의 사상은 일반적인 사회진화론과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측면이 가장 강한 책이 또한 서유견문인 것도 사실. 심지어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민중들까지도 우매하다고 멸시하는 내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