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수

鄭命壽

(?~1653)

1 생애

조선 중기의 인물. 조선 500년 역사상에 손꼽히는 매국노 중 하나이다.

그 이름은 명수(命守)라고도 하는데, 본래 평안도 은산 출신의 사람이다. 본래 천례(賤隷)로써 상당히 천민 출신의 한미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9년, 광해군의 명을 따라 강홍립이 명의 후금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을 당시에 병졸이 되어 요동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 등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후금의 군대에게 의하여 참패를 당하자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여진어에 능숙하다는 장기를 살려 포로 해방 이후에도 청나라에 남았고, 또한 조선 내부의 사정을 후금에 알려 후금 조정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1636년, 인조 때에 병자호란 이 발발하자 타타라 잉굴다이[1]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의 역관 노릇을 하며 금의환향했다(…). 호란 이후에는 잠시 조선에 남아있으면서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정에 압박을 가하여 그 벼슬이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에서 온갖 횡포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병조 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몽둥이로 폭행하였고, 조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불렸고, 또한 그 친척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청나라로 돌아갔는데 그 곳에도 조선 조정에 계속하여 압박하며 괴롭혔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탄핵을 받아 위기에 처한 김자점이 정명수에게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는 것과 장릉(인조릉)의 지문에 청나라의 연호를 새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밀고하자, 청에서 10차례나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도 모자라서 조선에서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를 노략질하기도 하는 등의 만행을 그치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은 정명수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실제로 여러 조선인들이 정명수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꾀하였다.

심양에 있던 시강원서리 강효원과 시강원필선 정뇌경 등이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따라 심양에 와있던 재상 박노, 신득연, 보덕 박계영, 필선 신유, 사서 김종일, 정지화 등 여러 명의 조선 관리와 모의하고는, 정명수가 부패한 행위를 저지르고 조선에서 보내온 세폐까지 노략질했던 만행 등을 청나라 형부에 고발하여 정명수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명수가 이를 알고는 고발 문서를 빼돌려 불태워버리고는 박노를 협박하여 거짓 진술을 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강효원과 정뇌경 등은 청나라 황제에게 무고한 이를 참소했다 하여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소현세자의 간청으로 교수형에서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효종 4년인 1653년에 정명수에게도 최후의 순간이 도래했다. 경상도 성주 출신으로써, 양민출신의 군사가 되어 강홍립을 따라 종군했다가 심양에 머물게 된 이사룡이 정명수의 죄상을 형부에 고발함으로써 정명수를 모살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정명수는 곧 관작을 삭탈당하고 죽었으며, 조선에 남아있던 그의 친족들 혹은 정명수의 청탁으로 면천하고 벼슬을 지낸 자들은 대개 벌을 받아 유형에 처해지거나 심하게는 극형을 당해 죽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2]

2 역사적 평가

조선 시대 당시에 정명수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천하만고의 역적, 간신배 정도로,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하면 그의 만행과 이를 증오하는 온갖 말들이 적혀 있는 것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실록 효종 4년의 기록에서 이와 같은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정명수가 청나라에서 죄를 받고 폐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효종은 이에 대하여 "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 염려스럽다."라고 하였을 정도였다. 정명수가 처벌을 받게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가 혹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에 위해를 가하려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말이다.

여담으로 정명수와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충무공 정충신이다. 정충신 또한 천민의 계급에서 시작하여 사망한 후에는 시호를 받을 정도로 출세한 인물이었지만, 이와 같은 영예로움은 모두 임진왜란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의 숱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큰 일을 이뤄낸 끝에 성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명수는 나름대로 총명한 머리를 앞장서서 조국을 핍박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쓰다가 결국 자신을 거두어진 청나라에 의해 버림을 받아 죽게 되었고 그 일족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조선사에서 만고의 역적으로 남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역사 속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작중에는 굉장히 냉철하면서도 총명한 느낌의 인물로 묘사되는데, 다만 정명수가 강홍립을 따라 종군하기 이전에 그 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되었다는 묘사는 소설 내의 픽션에 불과하다.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고 있는 칼부림에서도 간간히 언급되고 있으나 직접적인 등장은 아직 없다. 그러나 작중 배경이 인조 대의 조선이고, 또한 작중 인물들의 회상에 의하면 주인공인 함이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이상, 머지않아 큰 비중으로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가능성 있는 전개로는, 함이가 호란을 전후하여 조선에 돌아온 정명수를 발견하고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는 경우, 그리고 이괄의 난으로부터 30년 뒤의 일인 정명수의 사망이 역사와 다르게 각색되고 거기에 함이가 개입되는 경우.
  1. 실록에서 흔히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이다.
  2. 이후 이사룡도 명을 공격하라는 청의 명령을 거절했다가 죽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