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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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추존 국왕
목조 이안사익조 이행리도조 이춘환조 이자춘덕종 이장원종 이부진종 이행장종 이선익종 이영

조선의 대원군
덕흥대원군 이초정원대원군 이부전계대원군 이광흥선대원군 이하응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최종 확인된 원종 어진
묘호원종(元宗)
시호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
(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본관전주(全州)
능묘장릉(章陵)
이(李)
부(琈)
배우자인헌왕후(仁獻王后)
아버지조선 선조
어머니인빈 김씨(仁嬪 金氏)
생몰기간1580년 음력 6월 22일 ~ 1619년 음력 12월 29일

定遠君
1580 ~ 1619

1 소개

조선 선조의 5남으로, 이름은 부(琈)다. 어머니는 인빈 김씨. 임진왜란 뒤에 호성공신 2등에 올랐다. 후에 차남 능양군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이 되었다. 따라서 선조는 대원군의 아들이자 대원군의 아버지인 셈.[1]

2 생애

동복 형제이자 셋째 형 의안군은 일찍이 요절하고 넷째 형 신성군도 임진왜란 초기 요절하여 실질적으로 선조의 셋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임해군순화군 못지않게 행실이 안좋았다.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자기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등 비리는 그 시절 높으신 분들인 다른 종친이나 왕족들도 하던 짓을 했던 것도 있었고, 선조 35년 9월 13일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 대원군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 것. 혈연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하원군 부인[2]이 납치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집 노비들의 말을 듣고 말리는 종친들을 되려 나무랐다가 새벽이 되서야 겨우 풀어줬다고 한다. 당연히 하원군네 종들은 그 과정에서 두들겨 맞았다.(실록의 기사)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에는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을 피하듯 했다'는 부분이 있어 1년에 10 명씩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온갖 행패를 부린 사이코패스인 순화군이 정원군보다는 덜하다는 평가가 있어서 얼마나 정원군이 행실이 나빴는지 알만하다.

어머니 인빈 김씨가 신성군 사후 광해군과의 관계개선에 힘을 쏟아 사이가 좋았기에 광해군 집권 중기까진 종친으로 합당한 예우를 받았다. 맏이 임해군이 광해군 즉위 2년차인 1609년 제거되었고 3남 의안군과 4남 신성군은 선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광해군 바로 밑 아우로서 주로 의전 행사 때 종친대표로 잔치에 참석하거나 명 사신 행차시 접대를 맡았다. 광해군이 옥사를 일으킬 때마다 종친들이 지금으로 치면 관제데모에 자주 동원당했는데, 이때 역시 종친의 대표로 '누구누구를 빨리 작살내십쇼.'라며 거들거나 옥사가 끝나고 나면 역적 평정의 공로로 존호를 올리는데 총대를 메고 광해군에게 가서 '받아주십쇼.'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심해진 광해군의 의심병은 그조차도 피해가지 못했다. 3남인 능창군이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죽고 자신이 살던 집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3] 자신도 홧병으로 얼마 못 가 사망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차남 능양군반정에 가담해 결국 광해군을 무너트렸다. 야사에는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어서 저지른 일이라는데 잘못 찍었던 셈이다. 야사를 곧이 곧대로 믿으면 궁궐 덕후 광해군 눈에는 서울 도성 안 명당터는 죄다 왕기가 서려야 한다

3 사후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가 되자 정원 대원군으로 격상된다.

공식적으로는 선조의 뒤를 이은 인조였지만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에게 후계자로 추인을 받았고 민생 파탄내고 사대부 사이에서 패륜아로 찍힌 광해군을 쫓아낸 것 자체는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인조의 정통성은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4] 그러나 인조는 좀 더 나아가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추숭해서 정통성을 더 강화하려고 하는데, 흔히 이것을 '원종추숭논쟁'이라 부른다. 인조, 이귀, 최명길 등 외에는 거의 모든 신하가 반대했지만 결국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관철시킨다. 당시 집권 서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원군은 세자인 적이 없기 때문에 왕으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인조는 정원군도 선조의 아들이었으니 가능하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이러한 인조의 주장에 당시 사대부들은 대통과 소통도 구분 못 한다고 인조를 깠다. 당시 조선에서는 혈연보다 '종통을 누구에게 이어받았느냐'가 중요한데[5] 유교 종법상 후임자는 전임자의 아들로 물려 받았기에 광해군은 흑역사 처리되고 선조에서 인조로 직통으로 물려 받았다는 것이었다. 사대부로 치면 가문을 물려 받는 것이고 왕실은 종묘와 사직을 물려 받는 사람을 아들로 치는데 인조는 선조의 혈연상으론 손자지면 종법상으론 아들이란것이다. 어쨌든 인조는 자신만의 논리를 위해 이귀, 최명길 등 찬성한 소수의 대신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거의 어거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생전에 세자였던 적도 없는 듣보잡[6] 출신 왕자가 왕에 추증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조선이 '명분'과 '정통성'을 중시한 나라였기에 이런 절차가 없으면 권력 기반도 흔들렸던 사회였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 줄 필요가 있겠지만,이미 반정은 사대부들의 지지와 인목대비의 추인, 명나라 책봉까지 받아서 정통성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가 명청교체기로 병자호란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가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쓸데 없는 짓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실제로 인조는 대외문제보다 이 문제를 훨씬 중시했고 이때 총애를 받던 김류가 세력을 잃고 이귀와 최명길이 전면에 나서게 되나, 이귀는 얼마 가지 못해 죽고 대신 그 아들 이시백이 총애를 받았다. 결국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왕으로 격상되어 추존왕으로서 원종(元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아내 구씨는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

결국 문제는 서자라서 추존한 게 그른 것이 아니고 세자 자리에 한 시도 있던 적이 없던 것이 문제였다.[7] 성종이 자기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한 것은 자신의 정통성 제고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일단 덕종은 세조의 세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세자의 지위는 다른 왕자와 격이 다르다. 다른 왕자는 대군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국왕의 혈육에 불과하지만 세자는 책봉 받은 이상 신하들과 백성들에겐 '두 번째 임금'[8]이다. 다른 형제 종친 및 손위 항렬이라도 세자와 '군신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그의 후손이 왕이 되면 추존하는 것이다. 생전에 세자와 부자관계이며 군신관계인 세손이 임금이 되면 임금의 아버지[9] 그의 아비인 세자가 그 지위에만 머물러야겠냐 해서 하는 것이 추존이다.[10] 따라서 왕의 혈육이라고 해서 아무나 퍼주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정원군의 추숭을 주장하는 신료들의 주장 중 명분이 있었던 것은 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대통에서 아버지 대(代)의 항렬이 비게 된다는 점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추숭된 9명의 추존왕을 빼고 보면 딱 한 항렬에서만 실제 임금이 배출되지 않았는데 영조와 정조 사이의 대(代)에서 였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정조가 사도세자가 죽고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에 입적되고 등극후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면서 해결되었고,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고종때 당시 의리보다 인정상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도 장조로 추승되어 같은 항렬에서 두 명의 추숭왕이 나왔다. 순조와 헌종 사이에도 조손 관계로 대통이 이어져 추숭왕인 익종만 있었으나 헌종이 급사하고 아저씨 뻘인 철종이 즉위해 해당 항렬에 실제 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항렬의 비우지 않고 왕통을 잇는 것은 나름 정통성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고 선조에서 인조 사이에는 실제로 즉위했던 광해군이 있었으나 폐위 되었으므로 해당 항렬에는 시호를 받은 왕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선조의 아들들 중 임해군,[11] 광해군,[12] 의안군, 신성군 등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 상황에서 후손을 남긴 왕자들 중에서는 정원군이 가장 맏이였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 항렬이 종묘에서 비게 된다는 것과 선조의 후손들의 실질적인 맏이라는 점이 그나마 추숭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은 이어졌고, 특히 장유(張維)[13]는 《전례문답(典禮問答)》을 지어 반박하였는데, 노 희공(魯僖公)이 형으로서 민공(閔公)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동생인 민공을 고위로 삼았던 《춘추(春秋)》의 기록을 증거로 주장하였다. 한 마디로 앞 사람 이어서 바톤 터치 하면 그만이라는 소리. 결국 '대통'을 중히 여기는게 당시 중론이었던 것이다.

후대의 철종고종도 각각 자신의 아버지였던 전계 대원군과 흥선 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지 않았다.[14] 이는 당연히 법적인 아버지가 생부보다 우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큰아버지 가문으로 입적되면 생부를 삼촌으로 불러야 했다. 사대부의 대표격인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 다른 문제는 다 제쳐두고 이 문제에 열을 올렸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정원군은 세자 지위에 하루라도 머문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인조는 그렇게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정원군은 방계 종친이자 서자로서 조선의 왕으로 유일하게 추증된 인물이 되었다.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덕흥 대원군과 달리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이 사람 무덤은 어엿한 '능(陵)'이다(장릉, 章陵).[15] 이전에는 육경원으로 불렸다.

4 가족 관계

구사맹의 딸 연주군부인에게서 3남, 측실 김씨에게서 1남을 얻었다. 첫째가 인조, 둘째가 능원대군, 셋째가 능창대군이며 김씨에게서 넷째 능풍군을 얻었다. 연주군부인은 인조가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으로 봉작되고 계운궁이라 불리었으며,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5 어진

원종(정원군)의 어진

고궁박물관에서 발견된 정원군의 어진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일어난 대화재로 초상화가 불에 탔는데, 하필이면 세로로 불이 탔고 신원을 밝히는 글이 있는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오랫동안 신원미상의 공신초상화로 명명되었다. 이당 김은호한테 한번 물어볼 생각은 안했던걸까 최근에 학자들의 연구로 인하여 이 초상화가 원종(정원군)의 어진인 것으로 최종판명이 났다.(기사)

원종(정원군)의 선원보감 초상화

선원보감 초상화와 비교해보면 턱수염을 제외한 나머지 얼굴 특징들이 비슷하지만. 세세하게 따져보면 다르다. 그리고 이 어진은 원본을 보고 그린 모사본이다. 1936년 이당 김은호가 세조(조선)와 함께 어진을 모사했다.

6 창작물

  • 인터넷 소설 광해의 연인에서는 광해군보다 더한 훈남으로 나온다. 물론 실제 인물과 대입시켜 믿으면 심히 곤란하다.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형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세자가 될 야심에 차 있다가 이순신의 반정으로 인해 왕실이 함흥으로 파천하게 되자 아버지 선조가 광해군에 대해 가진 의심을 이용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군사를 용병으로 쓰자는 의견을 내고 직접 누르하치를 만나러 간다. 회견장에서 술에 취해 누르하치의 야망에 대해 찬동하면서 "내가 조선 왕이 된다면 건주여진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함께 공격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누르하치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누르하치는 정원군의 어리석음을 간파하고 정원군을 조선 왕으로 삼아 조선을 지배하려는 계획 하에 선조와 광해군을 비롯하여 정원군의 아들을 제외한 모든 조선 왕실 가족들을 살해한다. 결말에는 누르하치를 따라 건주여진으로 가서 꼭두각시인 자칭 조선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1. 이초-이연-이부-이종.
  2.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의 부인으로 선조의 형수이다. 물론 종법상으로는 선조는 명종의 양자이기 때문에 친척 아주머니가 된다.
  3. 이때 빼앗긴 집에 광해군이 지은 궁궐이 경희궁인데 결국 인조가 왕이 되면서 집을 도로 되돌려 받은 모양새가 되었다.
  4. 반란은 있었어도 광해군을 추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장 큰 위기였던 이괄의 난도 어디까지나 이괄 책임이었고, 광해군을 핑계 삼아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다른 이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하진 않았다.
  5. 비슷하게 고종의 생부는 흥선 대원군이지만 익종의 후사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법적 아버지는 익종이다. 정조도 진종(효장세자)의 양자여서 "근본이 둘일 수 없다"는 논리 때문에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어른의 사정도 있지만.
  6. 이전 문서에선 서자 출신이라고 하는데 왕실에서는 적자가 없는 이상 서자인 것은 중요치 않다. 경종, 사도세자도 후궁 소생이었지만 적자가 없기 때문에 명분상 왕비의 적자로 입적되는 것이다.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 광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자들이 광해군을 폐위할 때의 명분으로 독살드립 등 별 해괴한 논리도 갖다 붙였지만 광해군이 서자 출신임을 문제 삼은 적은 전혀 없다.
  7. 이성계의 조상들을 제외하면 조선에서 유일하게 세자에 오른 적이 없었던 추존왕이다. 게다가 이성계의 조상들도 비록 원나라 벼슬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세습을 받아서 가문을 승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건국자의 조상은 추존하는 게 주 클리셰
  8. 왕과 세자는 군신관계이자 부자관계이다. 그러나 세자와 다른 이의 관계는 군신관계다. 명분을 빼고서라도 보면 세자가 아닌 그냥 왕자는 그냥 대통령의 사적인 아들이고 세자는 부통령급 대우인 것과 비슷하다.
  9. 유교에선 부자관계가 군신관계보다 중하다. 송고종이 금황제를 큰아버지로 불렀지만 그게 부자관계보다 나은데 부자관계가 되면 죽으라고 하면 진짜 죽어야된다...
  10. 당연히 종법상 아버지만 추존되고 생부라고 추존되는 게 아니다. 정조가 사도세자 대신 효장세자를 추존한것은 사도세자대신 영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킨 종법질서 때문.
  11.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승려가 되어 출가했기 때문에 후손은 없을 듯하다.(임해군 아들 일연스님에 관한 기사)
  12. 세자가 있었으나 반정 후 유배당했다가 자결을 명받아 죽었다.
  13. 인조의 아들인 효종의 장인이다.
  14.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 흥선 대원군이 흥선 대원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황실 전체가 품계가 올라갔기 때문에 군들이 모조리 왕으로 올라갔기 때문이지 대원군을 이전에 왕 취급했다는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고종의 형이 흥친왕이 되었고, 광무황제가 된 고종의 아들들 역시 대군이 아니라 영친왕, 의친왕 등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다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추락하면서 공이 되는 것이고.
  15. 참고로 아들 인조의 무덤도 똑같이 '장릉(長陵)'으로 불리며, 다른 장릉으로는 강원도 영월군에 소재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있다. 물론 잘 알려진 곳은 단종의 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