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일보

과거 중외일보를 계승해 1931년 11월 27일에 창간된 신문.

1933년에 여운형이 사장에 취임하면서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쳤다. 이 무렵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조선의 3대 일간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사옥을 증축하고 소속 잡지로 《중앙》, 어린이 잡지 《소년중앙》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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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창간호 표지. 이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화가가 사장 여운형에게 표지 그림을 제출하자 "아이들이 밖에서 씩씩하게 뛰노는 그림을 그릴 것이지"하며 약간 불만을 표했다. 화가는 이에 대해 '그 애들이 눈속에서 한참 뛰놀다가 지금 막 들어와서 불을 쬐는 장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고, 여운형은 어이 없어서 웃으면서 표지로 싣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존속기간은 짧았지만 과감한 시도를 많이 하였다.악명높은 이상오감도를 실어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성향이나 논조는 반일논조가 분명했다. 조선중앙일보는 수위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상관계 전과자(즉 항일운동가)만 20명에 이르는 신문사였다. 예를들어 홍증식, 조동호, 임원근 등이 대표적이다. 범죄행위나 총독부 협력자, 특권층 비리에는 가차없이 대차게 까대는[1] 반면에 빈민, 노동자, 농민, 학생에 대한 지지는 최고조였다.

그리고 국내 일간지 중 최초로 스포츠면을 따로 만들었다. 사장 여운형이 스포츠를 좋아하였기 때문. 실제로 당시 중앙일보 주필이라거나 기자들 중에서 스포츠 관련 인사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축구에 대한 애착을 가진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는데, 1936년 3월1일자에서 "우리의 국기인 축구"라는 표현을 썼고, 같은 해 4월16일자에서는 "우리 겨레가 사는 그 어떤 곳에서도 뽈차기를 모르는 이가 별로 없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1937년 11월, 결국 신문사는 폐간이 되는데, 여운형 기념사업회와 한겨레, 민족문제연구소 등 주로 정치적 성향이 강한 단체에서는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정간이 되었으며, 일제의 친일 성향 사장의 제안을 거부하고 장렬하게 폐간을 선택해 민족정신은 조선중앙일보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그런 거 없다(...)

조선중앙일보의 정간은 단연 없었고, 휴간또한 자진이었고 폐간또한 경영 내부분열로 스스로 문을 닫았다.(...)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서울판 기사와 날짜가 동일한 동아일보의 1936년 8월 13일자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원조설은 논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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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좌), 동앙일보(우)의 지방판 기사이다.)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을 통해 조선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손기정의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동아일보도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날 이 사진을 보도했다고 말한다. "8월13일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서울판)가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그리고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의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1936년 극비문서와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화11년(1936년) 8월 13일자 지상에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 받은 우리 손 선수’라는 제목 아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전기 동아일보와 같은 모양의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는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당초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이라 판단했으나 일단 관할 경찰 당국을 시켜 조사한 결과 동아일보처럼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 마크를 손으로 공들여 말소시킨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동사(同社) 사장 여운형 이하 간부는 전연 그 사실을 부인하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하는 수 없이 근신의 의미로 같은 달(9월) 4일에 이르러 당국의 처분에 앞서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한다’ 운운의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 수속을 이행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극비문서 <조선출판경찰개요> 1936년 119~120쪽
소화 11년(1936년) 9월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오호, 중앙일보 逐 폐간, 이십여년의 언론활약사를 남기고』,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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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옥으로 쓰인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다. 종로 보신각에서 안국동 사거리로 가는 길(우정국로)에 있으며, 현재 농협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해방 이후에 자유당 중앙당부 건물로도 사용된 적도 있었다. #

연재된 만화로는 오성대감, 심산 노수현의 "머저리와 문여리"(1934년 5월 ~1934년 7월 머저리와 문여리 조선중앙일보에 60회 연재)[2] 등이 있다.

야인시대의 등장인물인 최동열 기자가 바로 이 신문사의 기자였다가 신문사가 폐간하면서 잡지사를 여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야인시대 초반부에 일장기 말소사건과 폐간 수순을 밟는 모습이 극중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각시탈에서도 조선중앙일보의 기자였다가 잡혀들어간 송 기자가 나온다. 만세 운동을 하다가 대다수의 기자들이 잡혀들어가고 기무라 타로이시용을 사장으로 주선했으나 주주들이 만장일치로 옥쇄주의를 택한다면서 폐간을 선언했다.
  1. 대표적으로 최린,박희도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박희도 같은 경우는 매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대차게 까곤 했는데, 박희도가 그 당시 제자들과의 불륜관계, 성관계를 맺고 있다라든가 사생활이 굉장히 지저분한 걸로 유명했다.
  2.  ?조선일보 의 "멍텅구리 헛물켜기" 시리즈와 비슷한 만화였다. (멍텅구리 시리즈가 노수현 만화) 그런데 여운형을 연구하고 머저리와 문여리를 보면 은근 기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올림픽에 참여한다거나, 세계여행을 한다거나, 비율빈 여성을 구조(마네킹이었지만)한다거나(…) 사장을 노리고 그린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