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왕

기자조선의 역대 국왕
??대 부왕 기부??대 준왕 기준위만(위만조선)
왕호준왕(準王)
시호무강왕(武康王)(?)[1]
기준(箕準) / 한준(韓準)
생몰년도BCE[2] 3세기 경 ~ BCE 2세기 경
재위년도? ~ ?[3]

1 소개

고조선의 왕으로, 기자조선설을 따른다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며, 기자조선설을 부정한다면 토착 고조선 왕계의 마지막 왕이라고 볼 수 있다. 시호는 무강왕(武康王)이라 전해진다. 주요사료나 연구결과를 종합해보자면 그 동안 연나라와 진나라의 압력으로 별다른 세를 떨치지 못하던 고조선을 중흥시켰지만 단 한방의 쿠데타로 허망하게 무너진 왕이면서도 (남부 동래설을 인정한다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내서 다시 왕이 된 의지의 사나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재임중에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수준에 그치며 그 이외의 일에 대해서 그다지 자세하게 전해지지않는다.

2 고조선의 왕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기자의 40세손이라고 한다. 부왕(否王)의 아들로 기원전 210년 경에 즉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진시황 대에 부자 세습을 이루었다는 것 외에는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염철론』의 기록에는 부왕이 진한 교체기에 능동적으로 움직여 패수(일반적으로 압록강에 비정)까지 진출하여 어느정도의 영토회복을 이뤄냈음을 알수있다.

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

대대부가 이르기를 "지난 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염철론》 비호편

 
다만 이렇게 획득한 지역을 놓고 '의 옛 공지(秦故空地)'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이 엄격한 군현 지배를 한 지역 같지는 않다. 아마도 진이 무너진 혼란기에 중국의 힘이 미치지 못한 지역에 깃발을 꽂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도 직접 통치가 아니라 중국계 유민을 받아들여 모여살게 하면서 간접 통치 구조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二十餘年 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20여 년 뒤 진승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사기》 조선열전

기원전 195년에는 과거 연나라 땅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는데, 이 때 박사(博士) 직과 홀(圭), 100리의 땅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100리의 땅'은 맹자에서 말한 제후국의 땅('사방 100리의 땅')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아마도 일종의 영주를 책봉하는 식으로 서쪽의 지배권을 확립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중국의 유망민 문제가 민감했기 때문인지 중국과의 관계를 맺은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부왕과 위만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던 것을 생각하면 독특한 케이스. 물론 단순히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위만은 반란을 일으켜 왕검성을 공격했다(《위략》에 따르면 한나라가 쳐들어온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준왕은 맞서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아 측근들과 함께 남쪽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남쪽에 정착한 뒤로는 한(韓)을 세웠고 한왕(韓王)을 자칭하였으며, 위만조선과는 교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의 생애는 기록에 없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준왕이 효혜고후(孝惠高后) 때[4] 남하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왕위를 찬탈당한 이후

3.1 마한의 왕?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마한 왕'이 그의 왕가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왕에 의해 멸망당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삼국지》에서는 한의 왕통이 지금은 끊어졌다고 하였으나, 제사는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이는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등장한다.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조선 초에 씌여진 역사서 《동국통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성이 익주에 있으며 마한의 초대왕이 준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5]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6]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후략)"

동국통감》외기(外記) 삼한기

 
이 외에도 조선시대에 기록된 자료들에는 모두 준왕이 내려와서 익산을 중심으로 마한을 건국했다고 기록했지만, 현재 발굴 성과등을 토대로한 추측으로는 마한의 중심지[7]는 경기도 광주나 충청남도 천안으로 추정된다.

4 기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의하면 "나라를 뺏긴후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정착을 했는데 그곳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 대한민국의 성씨중 서씨(徐氏)의 시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위략》(魏略)과 《위지》(魏志)의 글을 토대로 하여 한국 고유의 성씨인 한씨(韓氏)의 시조로 여겨져 왔다. 이를 바탕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8]의 씨족대전(氏族大全),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등 많은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현재로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부정되고 있고 임진왜란 이후의 사료들만이 있는 상황이므로 확실치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마한 말기에 잔약(孱弱)한 자손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이라고 하는 사람의 후예는 한씨(韓氏)가 되고, 평(平)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고, 량(諒)이라고 하는 사람은 용강(龍岡)의 위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서 그 후예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증보문헌비고》 제계고 마한의 씨족편

비록 임진왜란 이후의 사료만이 현재 전해오고 있으나 구전으로는 이미 그전부터 인식되고 있었던것으로 나타난다

상이 이르기를,“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후략)..." 근수[9]가 아뢰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하자, 영경이 아뢰기를,“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삼한(三韓)이 국호이었으므로, 한을 가리켜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하고, 근수는 아뢰기를,“공가(孔哥)·인가(印哥)·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입니다. 대개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합니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箕子枝裔多髯翁)’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입니다.”하고, 윤휘는 아뢰기를,“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 합니다.”

《선조실록》 36년 8월 13일(병신일)
김시습의 소설인 금오신화 중 '취유부벽정기'에서 나오는 신녀는, 자신은 본래 준왕의 딸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깨끗하게 자결하려다가 단군의 도움으로 천녀가 되었다고 말한다.
  1. 백제 무왕도 동일한 시호를 가지고 있다.
  2. before Common Era. "공통시대 이전 시기"를 뜻하며 기원전을 뜻한다. 자세한 내용은 서력기원참조.
  3. BCE 210년 ∼BCE 194년 사이로 추정
  4. 기원전 195년 ∼기원전 180년
  5. 현재의 익산시
  6. 다른 곳에는 "미륵산성(彌勒山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7. 혹은 목지국
  8. 동국문헌비고의 증보판
  9. 윤근수(尹根壽, 1537(중종 32)∼1616(광해군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