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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 한자: 箕子朝鮮,
  • (영어) : Gija Joseon

1 개요

기자고조선 지역에 책봉 받아서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국가. 후조선(後朝鮮) 혹은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는 대부분의 학자가 실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 실존 여부

서한 초의 복생(伏生)이 전한 ≪상서대전(尚書大傳)≫에는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후로 봉해졌다." 라는 구절이 있으며,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여러 중국 사서들이 이러한 기술을 따르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위만에 의해 멸망된 조선왕 준은 이 기자 조선의 왕이라고 이해되어 왔었다. 그러나 ≪상서대전≫은 기원전 3세기의 사료로 기원전 11세기의 일을 실증하기에는 너무 늦은 사료라는 점, 한반도 북부 및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 은나라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는 예가 없다는 점(중국 청동기는 하북 ~ 요서 선에서 출토 한계가 그친다)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꾸준히 부정되어 왔으며, ≪상서대전≫의 기자 관련 기록은 후대의 오류라고 이해되고 있다.

다만 이 오류가 의도적인 조작일 가능성은 낮다. 의도적인 조작이라는 측에서는 한나라의 고조선 영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고 있지만, ≪상서대전≫의 성립 시기는 서한 초로 한무제 이전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더구나 기자는 이런 종류의 조작에 끌어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걸 보아 기자 조선 문제는 사마천 때부터 이미 미스터리가 되어버린 상태였던 것 같다.

서주 시대 초기에 봉해진 제후들은 '이미 완전하게 영토로 확정된 곳'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서 그 지방을 정복하고 살아라." 라는 지시를 받는 개념에 가까웠다. 또한 당시는 영토 국가가 아니라 성읍 국가의 시대라서 제후가 다스릴 수 있는 지역은 원래 매우 좁았다. 따라서 제후국의 숫자도 대단히 많았다. 한비자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패자(覇者)인 제환공은 30개국, 초장왕은 26개국을 병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실제로 각 제후국의 경계가 정해진 것은 춘추시대 등 상당히 후대의 일이며, 진나라(晉)는 왕족으로서 지위가 높은 제후이기는 했지만, 장난삼아 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이처럼 별볼일 없던 제후들이 송나라(宋)와 같은 주요한 제후들을 압도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당시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동쪽 지역(만주 지역, 한반도 등)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남의 땅인 것 같지만 뭐 어때. 가지고 알아서 잘 살아라 ^^

게다가 '조선' 같은 2글자의 국명은 서주 시대의 주나라 계열 봉건 왕조에게는 쓰이지 않았다. 이는 중국어가 단음절어인 까닭이다. 다음절 언어인 한국의 국호들은 1글자, 2글자, 3글자 등 다양한 음절의 국호가 존재한다. 반면 중국은 주로 1글자의 국명을 사용했으며, 2글자 국명은 '중산', '구오'(句吳; 뒷날의 '오나라')의 사례처럼 중국이 아닌 다른 민족 국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주 시대에 '조선'이 국명일 뿐만 아니라 랴오닝 지역까지 포함하는 지역명이기도 했다고 해석한다면 중국의 기록과 실제 발굴된 유적 사이의 모순은 없는 셈이다. 기자 조선이 원래의 조선을 대체했다고 이해하게 된 것은 랴오닝 등의 지역을 서한 시대에는 더이상 조선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설명은 서한 시대 이전이라고 해도 랴오닝 지역을 조선이라고 불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위략≫에서는 아예 기자 조선의 후예인 기원전 4세기의 고조선이 주나라 왕실을 받들겠다는 명분으로 연나라를 치려고 했다는 말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이 때 고조선의 군주는 이전까지 주나라 천자의 칭호였던 을 자칭했다(이때는 아직 황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나라의 통치자가 왕을 칭하자 조선의 통치자도 왕을 칭했다고 하므로 의심의 여지 없이 중국식의 왕칭이 맞다. 저놈이 짱이라고? 나도 짱한다! 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중국으로의 진출을 위해 기자의 계통을 사칭했을 가능성도 제시할 수 있다.

기자 조선의 실존을 믿는 설에서는, 마지막 왕으로 여겨지는 준왕은 성이 기(箕), 이름이 준(準), 즉 기준(箕準)이 된다. 이들이 위만에 밀려 위만조선 시대 남하해 을 세운다. 이때부터 준왕은 한왕(韓王)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이 한왕은 '마한 왕'으로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데, 온조왕에게 멸망당했다고 한다. 다만 제사는 삼국지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기자는 기 땅의 자작이라는 작위 이름이며, 기자의 본명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고 상나라의 왕족이었기 때문에 상나라의 왕성인 자(子)씨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랴오닝성 카줘현(喀左縣; 랴오닝 성)에서 '기(㠱)'라는 명문(銘文) 등이 쓰여진 서주 시기의 청동기들이 대량 출토된 바 있다. 기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문에 기자 일족이 봉해진 곳은 조선이 아닌 요서(遼西; 랴오닝 성 서쪽) 지역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송호정은 연나라의 속국이었던 소국이 후세에 와전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한반도의 철기 유입이나 춘추전국시대 개판이었던 중국을 떠난 유이민의 유입이 기자 조선설로 변형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물론 기록 자체가 별로 안 남아있는 고대사이기 때문에 저것 외에도 수많은 설이 난무하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면 한국어 위키백과의 기자조선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자.

3 전근대의 인식

사실이야 어찌되었건 20세기까지 기자조선설이 큰 영향력을 가졌던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위에서 설명했듯 단군이 아닌 기자에 대한 숭배가 더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기자에 대한 문헌 기록이 더 풍부하고, 무가적, 도교적으로 흡수된 단군조선보다 제도적인 기틀을 잡았다는 기자조선이 유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에 대한 숭배 기록은 7세기 고구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등과 함께 섬겼는데, 정작 중국 측에서는 이를 음사(淫祀), 즉 '중국 중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신들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제사'로 보았다고 한다. 이후 통일신라에 대해 당현종이 '큰 현인(大賢)'의 가르침이 신라에 미쳤다는 말과 함께 보낸 국서가 있는데, 이 '큰 현인'은 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최치원당나라에 쓴 '양위표(讓位表) '에서도 기자가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이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이 확립되었으며, 숙종 때에 기자 사당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원체 기자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단군과 관련해서는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서 '선인(仙人) 왕검(王儉)'을 언급한 짧은 기록 외에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삼국유사 이후 13세기 후반에 단군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유학자들에게는 기자가 큰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적 토대가 필요한 조선 건국까지는 단군에 대한 인식이 기자에 뒤쳐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단군과 기자에 대한 숭배는 '사대적'이라고 허구헌날 까이는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균형이 맞게 된다. 고려시대 기자에 편향되었던 제사 의식을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숭령전을 만들어 단군과 기자를 함께 제사 지내고 '개국'과 '교화'의 두 의미를 함께 부각시킨 것이다. 물론 양측의 의미가 달랐기에 학문적 성향에 따라 어느 한쪽을 띄운 학자들도 있었으나, 국가에서는 양쪽 모두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는 단순히 모화(慕華) 사상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고려에도 모화 사상은 존재했다. 고려는 건국초부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고려 성종은 유교식 예제와 중국신 율령체계를 고려에 도입했다. 고려 문종거란과 단교를 주장할 정도로 송나라와의 교류에 관심이 많았고, 그 아들인 숙종 때 기자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는 배경이 된다. 또 송나라에는 고려 사신들의 시 모음집인 소화집(小華集)이 출판되었는데, 소화 자체가 소중화, 즉 작은 중국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고려시대에 없던 단군 사당을 기자 사당 옆에 중건한 바 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기자를 조금 더 쳐주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차이를 안 두려고 노력했다. 즉 단군을 인정하면서 한국의 기원을 요순시대로 끌어올리고, 기자를 인정하면서 중국에 비교해도 한국의 문화가 부족한 것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역사는 역사대로 늘리고 문화는 문화대로 자랑 즉 단군이 조선의 독자성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기자는 조선의 (당대 중화 문명에 대한) 보편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것.

사실 무조건 모화사상과 연결짓기도 뭐한 게, 민족주의적 사관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는 아예 기자 숭배가 일종의 자존심 세우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기자는 ≪상서≫, ≪주역≫, ≪논어≫ 등의 경전에서 현인으로 부각되는데, 그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음은 한마디로 공자 이전의 원시 유학이 이미 조선에 유입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유교를 전해줬다고 뻐기는 중국인들에게 "우리는 아주 먼 옛날부터 교화되어 있었고, 너희와 같은 스승을 모시는 거지 너희가 곧장 우리 스승은 아니다."라고 받아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사림파 집권 이전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잘 드러나는데, 실제 원구단 폐지 논쟁 때만 하더라도 명나라는 원구단(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을 없앨 것을 요구했다.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조선이 동방에 있으므로 '동방청제(東方靑帝) 신위'만 받들자는 반칙적 제안도 있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 천 년이 넘도록 하늘에 제사를 받들었으므로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이라고 해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였다.

조선의 예법을 살펴보면 천자국 예법과 제후국 예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태조니 세종이니 하는 묘호도 사실 제후국은 사용하지 못하는 용어임에도 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꿋꿋이 썼다. 이건 사실 조선 초기 관학파들의 영향이 남은 것이다. 이들의 성리학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과는 상당히 달랐고, 이는 정도전이 죽은 다음에는 더더욱 그랬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적 질서를 통해서 은근히 외왕내제를 이어갔었고, 조선 역시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이 영향을 받았다.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는 이런 성향이 약해지게 되는데, 단적으로 조광조소격서 폐지를 건의하면서 조선 왕이 명나라 천자처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광조가 죽자 중종이 소격서를 복구시켰던 것처럼 조선 왕들이 기존의 전통을 방패 삼아 조선 초기의 흔적을 유지해나갔다. 이것이 조선의 예법이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대내적으로 오락가락하는 이유이다. 사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조선이 사대적이라는 비판을 듣는 것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만일 비교대상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과 자존감이 강했던 고려가 된다면 말이다.

단 고려와 조선시대의 국제 정세는 많이 달랐다. 송-요ㆍ금-고려로 이루어지는 삼각관계 시대와 달리, 조선 시대의 중국 땅에서는 명나라가 단일 최강 세력으로 군림했다. 그런 점에서 명나라와의 외교가 원할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사대적이라 부르기 힘들다. 고려도 최강대국인 원나라를 만나 굴복한 후 제후국이자 부마국(駙馬國)[1]으로 살았다는 점에서 조선만이 특별히 사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선우(鮮于)씨, 기(奇)씨, 한(韓)씨는 이 기자를 조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 성씨의 족보에는 기자조선의 왕계와 더불어 기자의 후손 준이 남하하여 마한의 왕이 되었고, 마한의 마지막 왕의 아들 셋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동하면서 성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모화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고조선 당대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고려 시대에는 이 청주 한씨가 고조선의 후예로 인정되어 기자에 대한 제사를 맡는 관직을 세습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모든 세습 관직이 없어지고 단군과 기자에 대한 제사는 국가의 주도로 행해졌다.

기자 전승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정전제 등 (후에 유교계의 모범이 되는) 은나라의 문화를 도입했다고 전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왕도의 덕치를 이룬 국가라면서 숭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북위 낙양성의 영향을 받아 잘 구획된 고구려의 평양 궁성 유적이 발굴되자 이를 '기자의 정전(井田)'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1607년(선조 40년)에 사대부 한백겸(韓百謙; 1552년~1615년)이 이 유적을 발견했는데, 그는 이를 보고 '이 땅에 기자가 왔다는 증거가 나타났다.'며 기뻐했고, 조정과 여타 사대부들도 모두 환호했다고 한다. 수천 년 전부터 조선이 당당한 중화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이 실증되었으니 당대인으로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발견이었을 터이다. 이후 간행되는 평양 지도와 풍경화에는 꼬박꼬박 기자 정전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2] 동사강목에도 한백겸의 이 주장을 그대로 실어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3] 및 기자조선 정통론을 주장하였다.

4 근현대의 인식

신채호, 박은식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이것을 사대주의라면서 대차게 깠다. 다만 기자를 부인하지는 않았는데, 신채호는 기자조선을 삼조선 중 하나인 번조선(番朝鮮)의 한 왕조로 보았다. 기자를 언급하는 문헌 자료들이 적잖게 남아 있는 이상은 (특별한 발견이 있기까지는) 기자조선의 연대기를 그냥 두고 볼 것이며, 기자라는 사람이 3천 년 전에 있었고 우리나라에 왔었다 정도로만 알면 된다 정도. 그 외에 기자조선이 있기는 했으나, 그렇게 강한 나라는 아닌 듣보잡 소국 정도의 나라였다는 의견과, 아예 기자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단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윤내현은 기자의 나라가 위만에게 멸망했다고 본다.

현재 한국 사학계는 관련 사료 및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민족주의 사학자들 또한 근거 부족을 이유로 수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서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기자조선이지, 고조선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기자가 이주해 온 것이 분명하다면 정황상 그가 다양한 신문물을 가져왔어야 할 것인데,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라 문화적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물 측면에서도 딱히 다른 문화의 급격한 유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약점인 것이다. 더군다나 단순히 귀화인이나 다른 나라에서 넘어온 정치 거물 정도도 아니고, 새로 이주해온 땅의 기존 사회지배계층으로 유입되었다면 분명히 눈에 띄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현재 고고학적으로 중국계 청동기의 도래는 기자조선과는 시대가 맞지 않고, 그마저도 굉장히 점진적인데다 도입에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기자가 있었던 지역에 발견되어야 하는 '기후명(㠱侯銘) 청동기'[4]가 고조선 강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탓에 기자조선은 거의 부정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민족주의자들은... 기자조선 항목

참고로 북한의 경우에는 민족주의 사관이 대세이기 때문에 기자동래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고대 한국어로 왕이라는 뜻의 '길지(吉支)'라는 말이 이 기자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선조대에 발간된 광주판 《천자문》에서 王자에 대해 '긔ㅈㆍ. 왕'이라는 훈과 음을 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자세한 사항은 건길지 항목을 참고하자.

5 역대 국왕

순서왕명휘(이름)재위기간생몰년도비고
1대기자기자? ~ ?? ~ ?1대 국왕
부왕 또는 비왕기부?~??~?기자의 40여세손
준왕기준 또는 한준? ~ ?? ~ ?기자의 41세손이자 부왕의 아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1. 사위의 나라. 몽골의 압력으로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고려의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면서 쓰이는 명칭이다.
  2. 강응천, <단군 대 기자, 우리 역사의 상징을 둘러싼 경쟁>, ≪(청소년을 위한) 라이벌 한국사≫, 그린비, 2010년
  3. 기자가 한반도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조선을 세우고 왕 노릇을 했다는 설.
  4. 기후(㠱候)라는 글자가 적힌 청동기. 㠱=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