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선수 경력

1 개요

독일 현지에서의 차범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SBS에서 기획한 차범근 다큐멘터리.

국내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에 이미 독일에 진출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낸 성적인 만큼 정말 대단한 것.[1][2]

국내에선 '갈색폭격기', 독일에선 '차붐'이라 불리며 유명세를 탔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이 조그만[3][4] 동양인 축구선수에게 세 번이나 놀랐는데, 하나는 축구를 너무 잘해서, 또 하나는 명문대인 Korea University 출신이라서[5] 마지막으로 명문대학교 출신인데 영어를 전혀 못해서라고 한다.

본인이 회자하기로는 독일인들이 차범근의 크고 튼실한 다리근육 덕에 허벅지 밖에 안 보였다는 말을 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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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부 경력

2.1 독일로 진출하기 까지

농부의 아들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7]에서 태어난 차범근은 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먹고 참기름을 살 돈조차 없어 비빔밥에 참기름 넣어 먹는 것조차 사치로 느낄 정도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학교가 끝나면 농부의 아들로서 소여물을 주거나 논 밭일을 도와주는 것이 그의 어린 시절이었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와 운동신경이 탁월했는지 축구에 재능을 보인 차범근은 축구부가 있던 서울 경신중, 고등학교에[8] [9]입학을 하고 축구명문인 고려대학교에 순조롭게 입학하게 된다. 대학재학 중 당시 최연소로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며 이후 신탁은행과 공군에 입단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알리게 한건 국대에서의 뛰어난 활약 때문. 이 때 스탯이 엄청난데 국대 데뷔 때부터 한국에 있던 때인 72년부터 78년까지 무려 118경기 55골을 넣었으며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다(24세 139일). 당시에는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에서 한국을 비롯해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국가 주최로 자체적으로 많은 컵 대회들(메르데카컵, 박스컵 등등)을 개최했었고 종종 해외 클럽들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박스 컵에서 열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슐테 프랑크푸르트 코치 측이 박동희 축구협회 국제부장을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을 타진하게 되며 결국 78년 12월 다름슈타트에 입단한다. 독일에선 관심도 없었는데 박동희 교수의 노력으로 겨우 테스트를 통해 입단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앞서 적었듯이 슐테 코치가 직접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박 교수에게 제의를 한 것이고 링크참고, 박스컵 이전 5월 재팬 컵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우도 라텍 감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10]

참고로 차범근의 서독 진출로 불똥을 맞은 건 다름 아닌 현대그룹과 한국축구계인데,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스타 선수들을 끌어 모아 축구단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축구계는 이를 계기로 프로축구를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타 선수의 정점이 바로 차범근이었던 것. 그러나 차범근이 서독으로 가면서 현대는 축구단 창단을 포기했고 프로축구 출범도 연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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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해석: 한편 축구계는 현대그룹이 파격적인 조건으로 선수들을 스카우트, 팀 프로화 움직임이 있었으나 차범근의 서독행으로 팀 창단을 포기하는 바람에 프로화 움직임이 시들고 말았다.

2.2 전설의 시작

당시에는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제대 후 분데스리가 진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타군과 복무기간을 같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공군에 자원입대 하였고 12월 말에 독일로 넘어가 다름슈타트와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복무기간 단축이 무산되어 만기 제대를 위해 공군으로 복귀하게 된다.[11]

2.2.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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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컵의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만기 제대 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다. 여기서 첫 시즌에 프랑크푸르트를 UEFA컵(現 UEFA 유로파 리그)[12][13]정상으로 이끌었다. 리그 12골, UEFA컵 11경기 3골로 첫 시즌에 46경기 15골을 기록. 상기한 팀의 유일한 UEFA컵 우승은 물론 키커 에서 리그 공격수 부분 3위를 기록하는 등 첫 시즌에 엄청난 활약을 한다.[14][15]
첫 시즌이 최전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80-81 시즌에는 부상 등으로 리그 27 경기 8골로 비교적 부진하였으나 UEFA컵 5경기 2골, DFB-포칼 6경기 6골을 기록하며 팀의 3번째 포칼 우승을 이끌었다. 포칼 최다 득점이 6-7골 선에서 나오는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기록이다. 이후 81-82 시즌 리그 31경기 11골/시즌 38경기 12골, 82-83 시즌 리그 33경기 15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이어갔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재정악화로 당시 고 연봉자였던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

2.2.2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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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064/2015/08/06/164125406_%25C2%25F7%25BA%25D57.jpg]]
레버쿠젠에서 두 번째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1983년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한다.[16] 차범근의 말대로 레버쿠젠은 중위권 팀이었는데, 당장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4시즌의 레버쿠젠 성적을 보면 12-11-16-11위로 분데스리가가 18개 팀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명문이라고 불리기는 힘들던 팀이었다.[17] 2시즌 동안 35경기 12골, 32경기 14골을 기록하며 꾸준히 활약했으며 결국 85-86시즌 38경기 19골(리그 34경기 17골)로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레버쿠젠을 리그 6위로 올려 UEFA컵 진출을 성공시킨다. 다음 시즌부터는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골수가 상당히 줄었지만, UEFA컵 결승전에서 결정적인 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간다.[18][19] 지금이야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에서 우승 경쟁도 하는 강호이지만 그 당시에는 차범근이 기틀을 닦아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위권 팀이었다. 차범근은 1953년생이면서 1989년 만 36살 나이까지 뛰었으니 독일에서만 12년을 뛴 셈이다. 그리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98골은 은퇴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다.[20] 케이리그로 치면 데얀도 아니고 윙으로 뛰는 에닝요가 12년간 뛰면서 최다 골 기록까지 세운 격이니 독일에서 레전드 그 이상의 평가는 합당한 셈이다. 그리고 UEFA컵을 각각 다른 팀에서 두 번 이상 우승을 해 본 커리어를 이뤄낸 선수는 현재에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9명밖에 되지 않는다.[21]애초에 커리어에서 빅이어 두 번 이상 든 선수가 과연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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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시절,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아니, 그때도 감독을 하고 있었어?[22] 차붐을 평가하면서.

당시 독일에 진출했던 일본 선수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차범근의 포스에 눌려서 많이 가려졌다. 분데스리가에서 윙 포워드 겸 윙백으로 뛰면서 10시즌 동안 259 경기에 출전해 34골을 넣었다. 흔히들 차범근에 견주면서 오쿠데라는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래봬도 분데스리가에서 아시아 선수로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FC 쾰른 소속으로 78-79 유러피언컵에서 골을 넣은 적도 있는 상당한 실력의 선수이다. 비록, 차범근과 격돌하면 영 맥을 못 추는 통에 별 볼 일없는 이미지가 굳게 남게 되었지만...여담이지만, 오쿠데라는 현재 요코하마 FC의 구단주를 역임하고 있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 한국 대표로 출장했다. 일부에서는 "예선전에도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대표 팀에 넣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대여론도 있었지만 활약상이나 실력 등을 고려해 그냥 기용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실제로 차범근의 명성이 잘 알려진 해외에서는 "차범근을 대표선수로 뽑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엔트리에 여유가 있다면 한국은 우승후보가 분명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본 경기에서는 타 팀 선수들의 집중견제로 큰 활약은 못했다. 상대팀의 마인드가 '무조건 차붐만 막으면 된다.'였기 때문에 공을 갖고 있든 안 갖고 있든 무조건 수비수 2명이 기본적으로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차범근이 막히자 수비진을 뚫을만한 공격수도 없었고.
그리고 당시 차붐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이미 34세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대였다. 게다가 최전방 스트라이커도 아니고 클럽과 달리 윙에서 뛰었으니.. 당시 레버쿠젠 구단에서도 차범근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부상을 대비한 전담 의료팀을 따로 파견을 했을 정도였다. 흠좀무...

여담으로 화려한 클럽 경력과 국대에서의 골 수, 경기 수에 비해 월드컵 출전은 위의 86년 월드컵뿐인데 이만한 선수가 왜 월드컵 경력이 1회뿐이냐 묻는다면 그 이전의 월드컵은 이미 다 탈락했기 때문에..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 vs 파라과이 경기를 해설(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16강, 또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일본을 참고)할 때, 분데스리가에서 페널티 킥을 하나도 안 찬 사실을 본인 입으로 인증했다. 이유는 실축할까봐 무서워서...즉 분데스리가 골 기록 중에 페널티 킥은 한 골도 없다는 소리가 된다.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본인 입으로 말하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참고로 당시 경기는 너무 재미없어서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덧붙여서, 나중에 '차범근 위원에게 물어보세요!'에서 한 말에 의하면 페널티킥를 못해서 페널티킥으로 넣은 골이 없는 것이며,[23] 골 많이 넣는 공격수라도 배짱이 좋지 않으면 페널티킥을 잘 차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세계적인 슈퍼스타들도 페널티 킥을 실축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3 그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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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냐고? 가서 너네 아빠한테 물어봐.알 필요없다

-부모에 의해 얼떨결에 함께 사진 찍은 어린이들이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묻는 질문에 차범근의 답[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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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bild지에서 선정한 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 3톱에 같이 선정된 다른 두명은 해당년도 발롱도르 수상자인 케빈 키건과 해당년도 발롱도르 2위이자 그 이듬해 발롱도르 수상자인 칼 하인츠 루메니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2회의 발롱도르 수상자들이다.

차붐이 1979/80 부터 1985/86 7시즌동안 분데스리가 선수 평점 순위는 다음과 같다

1979/80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전년도 발롱)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1980/81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981/82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82/83

1. 루디 펠러(2.32)
2. 칼 하인츠 루메니게(2.32)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983/84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1)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984/85

1. 프리드헬름 푼켈(2.81)
2.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3. 클라우스 피셔(2.82) (분데스리가 최다득점)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칼 알고어(2.97)
5. 차범근(3.31) (루메니게 인테르 이적)

1985/86

1. 칼 알고어(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3.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7. 차범근(3.18). 리그 득점 4위

80년대 초반 79-80부터 83-84까지 5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

1. 칼 하인츠 루메니게 2.306
2. 차범근 2.72
3. 루디 푈러 2.727 - 3시즌 평균
4. 만프레드 벅스뮐러 2.865- 4시즌 평균
5. 라이너 게예 2.886
6. 클라우스 알로프스 2.966
7. 칼 알고베르 - 2.9925 - 4시즌 평균
8. 프라이드헬름 푼켈 - 3.012
9. 위르겐 밀렙스키 - 3.012

새삼 다시보는 루메니게의 위엄
말 그대로 80년대 분데스리가 탑급 공격수로써 그때부터 축구전문가들에게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포인트. 특히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에 무려 40회나 선정되었는데 이는 역대 아시아 선수 중 독보적인 1위 기록이다. 참고로 위 표를 볼 때 참고할 사항은 독일에서의 축구 평점은 낮으면 좋다. 즉, 1점을 받으면 최상급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들은 것이다. 고등학교 내신 등급을 생각하면 쉽다.

독일에서의 현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08/09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엘 레버쿠젠과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경기를 차범근이 독일에 가서 관람한 적이 있었다.(관련기사 동영상)
차범근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부인과 같이 경기를 관람했기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이 못 알아봤었으나 전광판의 카메라가 딱 비추자(찾아낸 카메라 감독도 대단)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고, 경기를 진행하던 레버쿠젠과 코트부스의 선수들도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다가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패트릭 헬메스슈테판 키슬링, 카어슈텐 라멜로프 선수들은 직접 차범근에게 찾아가서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 찍기를 요청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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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범근이 첼시를 수원 감독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레버쿠젠 출신인 미하엘 발락[25] 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얘기한 것도 유명한 얘기. 한때 귀화 요청도 있었는데 거절했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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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첼시 FC의 친선전이 끝난 이후 감독 차범근과 수석코치 무리뉴. 어, 그래 무리뉴 자네 수고했네
같은 회사 후원을 받고 유니폼 스폰서도 같으니, 마치 수석 코치를 격려하는 듯한 모습 왜 하필 무리뉴는 평소에 안입던 트레이닝복을 입고 와서...

81시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던 시절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상대팀의 겔스도프에게 고의성이 짙은 육탄공격을 받아 선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심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이 때,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난리가 나서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에게 살해 위협 소동까지 벌였다. 프랑크푸르트팀은 겔스도프를 고소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차범근의 동의를 구했으나 차범근은 고소를 취하했다고 한다. 오오 대인배 그리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했을 때 겔스도프와 재회하는데, 그 이후 겔스도프는 타 팀 선수의 거친 수비로부터 차범근을 지켜주게 된다. 이후 겔스도프와는 절친한 사이로 지내는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 분데스리가는 엄격하게 파울을 제재하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여담으로 현 독일 대표 팀의 감독인 요아힘 뢰프 감독은 선수시절 차범근과 같이 선수생활을 했었고, 주전에서 밀려 항상 서브멤버였다. 차범근이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독일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석코치[28]였던 요아힘 뢰프가 카메라 화면에 잡혔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저 코치가 예전에 저랑 팀 동료였는데...이름이..."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성주 캐스터가 "요아힘 뢰프 코치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맞습니다. 선수 시절 제 동료였었죠. 좋은 선수에서 이제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캐스터가 다시 물었다. "선수시절 요아힘 뢰프는 어땠나요?"라고 묻자, 차범근은 시크하게 "제 교체 선수였습니다."라고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에서, 차범근이 추첨자가 되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차붐이 죽은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을 정도. 외국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축협에 대한 국내 비판 여론은 어마어마했다.[29] 더군다나 세계 최고의 스포츠 축제의 추첨자 자격을 위상을 모르는 여배우에게 줬으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해설을 하던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 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0]

당시, 독일 국대 감독이었던 루디 푈러가 이 말을 듣고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을 너무 먹은 게 아니냐?'[31]며 농담을 섞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32]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감히 차붐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라고 오히려 자국 대표 팀 감독인 루디 푈러를 깠는데 진짜로 너 따위가 차범근님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라는 뉘앙스보다, 농담이어도 정도껏 해야지라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했기 때문에 까인 측면 + 독일 국민들도 예선전 경기력의 실망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결국 루디 푈러 감독이 차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전했다고 하며 차붐도 훈련장에 찾아가 화해했다고 한다. 당시 뉴스 소개영상. 참고로 루디 푈러는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을 우승시킨 최고의 스타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차두리에게는 푈러 아저씨라 불린다. 뭐야 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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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 당시 아르센 벵거가 차범근에게 따봉엄지를 지켜드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중계가 끝난 후 나오는 길에 또다시 아르센 벵거가 축하인사(?)를 했다고 한다. 아마 독일이 우승하자 독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차붐에게 축하인사를 한 듯싶다.

이분과 같이 따봉을 선보였다.같은 따봉 다른 느낌 이게 바로 진정한 월드클래스 따봉

은퇴 직전 레버쿠젠 감독을 하던 리누스 미헬스 감독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리누스 미헬스는 바로 네덜란드 토탈풋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명장이었다.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뭐야 이 형 진짜

2010년 골 닷컴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분데스리가 용병 TOP10'에서 3위에 선정되었다.[33]

2013년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베스트 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1인의 사진이 프랑크푸르트 역내에 전시 되었는데, 전시 당일 자리에 참석해 이름을 빛내주었다. 유럽은 차범근을 최고라고 인정했다는 쾌거.##

2014년 1월 대한민국미국과의 친선 A매치 전에 미국 대표팀 감독인 위르겐 클린스만이 SBS 해설위원으로 참가한 차범근을 알아보고 다가와 포옹과 환담을 나누는 장면이 찍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SBS 브라질 2014 특집다큐에서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는데 아직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는걸 보여줬다. 이 항목 상단에 링크된 동영상이 그것.

브라질 레스토랑에서 독일의 내무부 장관이 먼저 차붐을 알아보고 사진 찍자고 요청할 정도.#

독일 축구계의 전설인 로타어 마테우스도 차붐을 알아보고 먼저 찾아와 인사를 했다.

현역으로 뛸 당시 독일의 시인인 에크하르트 헨샤인트가 차범근에게 헌정하는 시가 있을정도니 그의 독일에서의 평가는 말하면 입이 아픈 수준이다.

“Hymne auf Bum Kun Cha”

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

Wunderbar ist die Gunst denn des Gottes des
Fußballs. Zwar niemand weiß, wann und von wannen
Er schenket nach Puskas und Pele und Kempes den
Neuen Erwählten - nie doch und nimmer vergißt
Er sein hoffendes Volk. Über Indien hinaus
Und den Ganges spähet sein
forschender Blick, ins ferneste Land, da
Seit Alters Männermut blühet und hoher Sinn.
Tapf'res Korea! Du schenktest uns Cha!

Festlicher klinge mein Saitenspiel! Denn lang
Lieb ich dich, Cha, schon, drei Monde -
Drei Monde schon fällt dein verjüngendes
Licht auf die scheinbar gealterte Eintracht. Wir
Sahen dich erstmals, Lieblicher, gegen Stuttgart,
- und das Herz war bezaubert, verzaubert bald
Gar. Ach! Wie du da Förster, den Holzer,
Versetztest und Martin, den Rammler, so daß selbst
Sie dein Lob dann sangen - wie du dich
Schlängeltest durch die Abwehr - um endlich,
Endlich, kurz nach der Halbzeit, hoch in die
Lüfte dich reckend, die Flanke von Borchers
Nahmst mit der Stirn, der klugen, das
Leder versenktest im rechtesten Toreck - es war
Wie ein Herzkrampf, ein schöner, in Freude und
Ahnendem Jubel in eins.

Am Abendhimmel blühte ein Frühling auf, und
Sein Name war Cha. Die Eintracht aber, jahrlang
Von Klippe
Zu Klippe
Geworfen, glühte mit dir, o mein Trauter, zu
Neuschönem Glanze. Aus dem Schlaf des
Dornröschens erwachte die alte, die beinah
Vergeß'ne Primadonna sehr rasch. Vergessen das Alter
Grabowskis, vergessen der Streit mit dem Trainer.
O neues heilig' Herz der Mannschaft! Uns zur
Erhabenen Lust stürmst du, Schönster, so viel ich
Sah, seither, wie der Vogel des Waldes über die
Wipfel fliegt, schwingst du, Zierer, leichter und
Mühlos und sonder Gewalt dem Tore dich zu, dem
Beschützten - Östling unter Deutschen,
Und ihnen dennoch verwandt in der Seele,
Nah auch in Tordrang und Technik und
Teilung des Raumes in all seiner
Tiefe . . .

Kenntnisreicher Künstler am schwarweißen Balle!
Der Mann aus Korea allein hat die Präzision deines
Abspiels. Trocken schlägst du die Pässe, den
Kurzpaß sowie auch den raumgreifenden Vetter, den
Steilpaß. Nicht fremd ist dir der
Fallrückzieher, wir sahen's. Du zeigtest, daß
Auch in Asia, dem fernen, bekannt ist der Trick
Mit dem kunstreichen Haken - doch mehr noch
Erstaunen den Gegner die nicht-orthodoxen, die
Tricks, die im Lande noch unbekannt. Freilich,
Nie ähneln sie je doch der Tücke des Panthers,
Nie schielet Verschlagenheit Asiens durch -

Fair play ist Bum Kun Chas Religion!

Ach, abermals weiden die Augen auf dir! Hurtig
Treibst du das Leder nach links, kühner umkurvst
Du den grätschenden Stopper, zaubernden Fußes
Entläßt du den Lib'ro in Scham. Leichthin,
Euphorion erinnernd, vergleichbar auch durchaus
Der zarten Gazelle, dribbelst du torwärts und
Spannst doch den Fußnerv alljetzt schon zur Bombe -
Denn kaum hinkt die Macht deines Schusses der
Pracht nach Bernd Nickels, genannt "Dr. Hammer":
Dem du, so liest man, längst Brücken der
Freundschaft gebaut hast, auch menschlich . . .
Herzschöner Mann! Flutlichtumschwärmt auf den
Flügeln der Flanke, jetzt plötzlich der rechten,
Füllhorn der Technik, Fülle des Seins!
Samtschwarzen Seraphkopfs sehr schönen Scheins!
Seht nur den Doppelpaß jetzo mit Nachtweih und
"Holz"! Tripelpaß ewiger Klarheit!
Genius des Ostens! Sel'ges Korea!

Ein Flankengott jener Abramczik? Da lachen die
Gütter des alten Olymp! Sie lachen Schorsch
Volkerts und
Lächeln ob jenem, der, unrhythmisch seltsam,
Rummenigge sich nennt! Wer kennt Okudera? Cha
Aber - ob er nun "Cha Bum Kun" heißt, so wie die
"Frankfurter Rundschau" es will; oder doch
"Bum Kun Cha", wie die FAZ ihn besingt; oder
"Tscha Bum", wie "Bild" ihn begrüßte - dich,
Cha, kennt Deutschland, kennt Asien, die Welt so und so - -
Ew'ges Korea!

Im Winde klirret die Fahne zum Eckstoß. Gefahrstufe
Eins. Anläuft Cha Bum, herrlich die Flank' in die
Fluten der Zeit! Schon steht Cha Bum wieder nah
Dem Elfmeter, lauert des Zuspiels, hilft
Hinten aus. Schneisen schlägt er in Spielfeldmitte,
Schleusen öffnet sein schneller Fuß: Sammelnd der
Gegenwart hohes Vergang'nes, einend die Künste
Grabowskis mit denen des Pfaff, Kressens gedenkend
Und eingedenk Sztanis. Fußball berückend - und
Rührend selbst Toni, den treuedlen Zeugwart, der
Dir, Cha, im Air-Bus von Braunschweig nach
Frankfurt die Wange gar küßte; so stand's in der "Rundschau" . . .
Geh' unter, HSV! Trunken dämmerte die
Seele selbst dir (3 : 2)!

Ja, in den Ozean all deiner Tricks will ich mich
Stürzen, Bum, sturztrunken einfallen laut in die
Chöre des Jubels, Sohn einer fußballträumenden
Mutter. Anbeten will ich - gleich dir, der du
Betest vor Spielbeginn und auch während des
Kampfs "ständig vertieft bist im Gebet", wie
Wieder die "Rundschau" weiß. Anbeten will ich,
Singen dein Lob all mein Lebtag und
Endlich, wenn's gut geht, warte nur balde,
Berückt in Verzückung unendlicher Schöne vergeh'n - - -

Nur, Bum, daß du, folgt man einem Bericht in
der FAZ, nach deiner Aktiven-Laufbahn Deutsche
Predigend zu Gott bekehren willst, das, Bum,
Muß ja wohl nicht sein.

이하는 위 시의 일부 번역본이다. 전체의 번역은 능력있는 위키러가 추가 바람.

"차범근 찬가"

태고적부터
남성다움과 고결함이
찬란했던 곳.
용맹스런 한국이여

그대가 차붐을 우리에게 보냈도다

환희의 음악이여 더 크게 울려라.

차붐. 자네를 오랫동안 사랑하리

바다와 같은 당신의 발재간속으로
나는 빠져들고 싶다
관중들의 우레 같은 함성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은 울려 퍼진다
축구를 태몽으로 잉태된 아들이여
나는 그대를 찬미하리라
내평생동안
그대를 칭송하는 노래를 하리

차붐의 위엄.

더불어 프랑크푸르트 역에 12개 기둥으로 프랑크푸르트 팀내 최고 레전드 선수들 사진과 간략한 인적사항을 새긴 게 있는데 거기에서도 차범근이 들어가 있다. 역시 위의 특집 영상에 소개되어 있으며, 차범근 자신도 '저 허벅지 탐스럽다'고 할 정도...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차범근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어떤 경기에선 골을 넣었더니 상대방 수비수가 인종차별적 말과 함께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이건 독일에서의 일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클럽 에버딘과의 UEFA컵(유로파 리그 전신) 경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독일에선 역사적 사건 때문에 차별이 매우 민감한 부분. 그리고 차범근은 퍼거슨이 이끄는 에버딘을 영혼까지 털어줬다.
  2. 알렉스 퍼거슨 항목에도 서술되있지만 당시 퍼거슨의 에버딘은 디 스테파노의 레알을 꺾고 유럽을 재패한 팀이다!
  3. 사실 서양 축구선수 기준으로도 딱히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독일에 왔을 당시 말랐던 탓에 키가 작은 걸로 느껴진 듯. 그는 진출한 뒤에 서양인들의 피지컬에 대항하기 위해 징그러울 정도로 육류를 먹으며 몸을 불렸다고 한다. 피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를 울면서 먹었다고...
  4. 스테이크 이야기는 본인말에 의하면 한국 음식을 먹고 경기를 하면 초중반에 허기가 져서 힘이 떨어졌는데, 스테이크를 두 덩어리 먹고 뛰니 경기 내내 배가 든든해서, 죽어라고 고기만 먹었던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5. 사실 이는 뒤의 영어를 전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사실 축구선수가 대학교 나온 것 자체가 당시 독일에도 그리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에는 한국이 좋게 봐도 '이제 겨우 입에 풀칠은 해가는 나라' 이상의 이미지를 가지기 어려웠다는 것도 생각하자. '명문'이라는 인식까지는 없더라도, 위에서 말한 수준의 국가에서 대학까지 나온 축구선수라는 건 당시로서도 놀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대학교의 영문명은 Korea University라 더 놀랐을지도...
  6. 로타어 마테우스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7.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8.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다.
  9. 참고로 차범근은 경신 10대제자중 한사람이다.
  10. 하지만 이때문에 차범근의 현역시절, 특히 국가대표 차범근은 이른바 박지성세대인 현시대 한국의 흔해빠진 해축팬들에게 심하게 저평가되고 있다. 이유는 첫째, 차범근이 뛰던 시기의 국가대표 경기 기록이나 영상 상당 부분이 유실되어 차범근의 젊은 시절 국가대표 경기를 지금 거의 볼 수 없고, 둘째, 차범근이 현역 에이스였던 86년 이전의 대한민국 축구 국대는 월드컵 본선진출이 당연하지 않았던 팀이었지만, 축구팬이나 축구협회나 그 시기를 아예 없던 시기 취급하고 8회 연속 본선진출만 강조하고 있기에 차범근이 아무리 국대를 캐리했다 한들 "월드켭 진출도 못시킨 에이스가 무슨 에이스인가요? 박지성 미만잡"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축구팬들이 매우 많다는 점. 셋째, 차범근의 활약을 실제 본 세대들중 후배 축구팬들에게 이를 전할 한국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를 포함한 복잡한 문제로 인해 거의 없어서 구전조차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이때문에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 대해 그를 아는 해외 축구팬,전문가들과 한국 축구팬들과의 온도차가 극명한 것이다.
  11. 당시 해외진출은 국가재산 유출이라는 인식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차범근이 독일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한과의 아시안 게임 경기를 위해 체육회 측에서 독일 진출에 제동을 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12. 지금이야 강팀들이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상황이지만, 당시만 해도 현재의 챔스와도 같은 위상을 가진 컵이었다. 당시 유러피언 컵(챔피언스리그)는 챔피언만 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토너먼트였다. 나머지 2위부터는 UEFA컵에 나가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예를 들어보자. 챔피언스리그에 (2013-14시즌으로 치자면) 각 리그 1위 팀. 맨시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유벤투스가 나간다면, UEFA컵에는 아스날, 첼시, 로마,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나폴리, 도르트문트같은 팀들이 참가했다! 참고로 이때는 리그컵이나 FA컵 우승팀은 위너스 컵이라고 따로 나가는 대회가 있었다. 현재는 유러피언 컵과 UEFA컵이 합쳐져서 챔피언스리그가 된 셈이고 위너스 컵과 인터토토 컵을 비롯한 여러 대회가 섞여지며 현재 유로파 리그가 된 셈. 애초에 유러피언 컵이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가 된 것도 UEFA컵보다 인기가 딸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 한몫했다.
  13. 참고로 축구선수로 유럽 대륙 대회 트로피를 들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대부분의 날다긴다하는 선수들도 이 트로피 만져보지도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우리나라도 대륙 컵을 든 선수는 차범근, 박지성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 박지성은 결승전에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차범근은 직접 주도해서 들었다는거....
  14. 공격수 평점 1위는 뮌헨의 칼 하인츠 루메니게, 2위는 함부르크의 케빈 키건. 누군지 잘 모르겠다면 키건은 77, 78년, 루메니게는 80, 81년 발롱도르 수상자. ㅎㄷㄷ.
  15. Sportsbild에서 차범근을 79-80시즌 베스트 11에 선정하기도 했다. 링크참고
  16. 레버쿠젠 이적 비화
  17. 16위를 기록한 81-82 시즌은 강등 플레이오프까지 치뤄 겨우 잔류했다.
  18. 1차전에서 3:0으로 지고, 2차전에서 3:0으로 이겨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한다. 이때 마지막 세 번째 골을 넣은 선수가 다름 아닌 차범근이다!
  19. 여담으로 이 대회에서 레버쿠젠의 8강 상대는 FC 바르셀로나였다. 1차전에서 비기고 2차전 캄프 누에서 바르셀로나를 1:0으로 이겼다.
  20.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스트라이커인 스위스 출신의 스테판 샤퓌자가 99년에서야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참고로 샤퓌자를 처음 스위스 국가대표팀에 발탁한 감독이 바로 울리 슈틸리케다. 상당히 묘한 인연. 추후 바이에른 뮌헨의 브라질 출신 선수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기록을 깼지만 몇 년 뒤 또다시 바이에른의 페루 출신의 클라우디오 피사로가(당시에는 베르더 브레멘) 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2015년 바이에른의싹슬이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차붐의 기록을 넘어섰다. 그래도 차붐은 여전히 외국인 최다득점 6위에 랭크되어 있다.
  21. 그 중 한 명이 울리 슈틸리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슈틸리케는 1975년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소속으로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10년 뒤인 1985년에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다시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다른 인물들로는 로타어 마테우스위르겐 클린스만이 있다. 이들은 1991년 인테르 밀란에서, 1996년에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22. 퍼거슨은 1974년부터 감독을 맡고 있었다. 에버딘 감독은 1978년부터. 이전에는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때려쳤다고 하는데, 이 분 1941년생이다. 33살이면 약간 이른 감이 있긴 해도 충분히 선수생활을 접을 만한 나이였다. 다만 33세(저 발언을 한 당시에는 38세)라는 나이는 감독을 맡기에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젊은 나이이긴 하다.
  23. 1997년 쯤 나온 '내 꿈을 펼쳐라'라는 자서전에서 보면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동남아의 모 대회에서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왔는데 홈런 킥으로 대표 팀이 패하자 페널티 킥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고 회고한다.
  24. 2014 브라질 월드컵전 S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장면. 현역 시절은 정말 위대한 선수였지만 현 세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을 생각해 보면 씁쓸한 장면이다.
  25.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레버쿠젠에서 뛰었다. 발락의 출생지는 동독의 골릿츠라는 도시이다.
  26. 당시 대한민국의 위상은 그야말로 듣보잡 내지는 공기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어서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게 어딤요?"라고 할 정도라 "차붐의 나라에서 왔다."고 해야 알았다고 할 지경이었다.
  27. 차범근의 답변에 따르면, 1984년 당시 대표 팀 감독이 윱 데어발이었는데, "차붐 같은 공격수만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얘기가 바다를 건너면서 왜곡되었다고 한다.
  28. 감독은 위르겐 클린스만. 1994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었고 지금은 미국 대표 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29. 대한축구협회와 차범근은 현재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30.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
  31. 레버쿠젠의 구단 소유사가 약제 아스피린의 제조사 바이엘이기 때문이다. 팀 엠블럼에도 사자 두 마리가 좌우에서 아스피린을 붙들고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32. 대놓고 험한 말을 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루디 푈러 본인도 또한 바이어 레버쿠젠 출신이다. 욕으로 써먹으려면 바로 적용되는게 자기 자신이 되겠지...
  33. 2위는 아트사커의 일원이자 세계최고의 윙백 중 한명이었던 비셴테 리사라수, 1위는 1977년 덴마크 인으론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은 작은 거인 알란 시몬센. 알란 시몬센의 경우 축구선수들이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뽑는 라우드럽을 제치고 덴마크 최고의 선수로 뽑힌 선수다. 그리고 1977년 발롱도르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