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디 클랜시

아일랜드가수.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
패디 클랜시톰 클랜시토미 메이컴리엄 클랜시
이름패디 클랜시(Paddy Clancy)
본명패트릭 클랜시(Patrick Clancy)
출생1922년 3월 7일, 아일랜드 카운티 티퍼레리 캐릭 온 수어
데뷔1956년 1집 앨범 'The Rising of the Moon'
소속한국 아이돌 그룹과 같은 소속사 개념은 없음. 레이블은 다수.
종교천주교(세례명: 파트리치오)

1 개요

1922년 3월 7일~1998년 빼빼로데이 11월 11일.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 가수, 영화배우, 축산업자. 아일랜드 포크 음악 계통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아티스트인 형제 그룹 클랜시 브라더스의 멤버이며, 멤버들 가운데 단 한 번도 탈퇴한 적이 없는 유일한 멤버이다.

간단히 말해 아일랜드 포크 음악이 오늘날 대중 음악 분야의 하나로써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일등공신. 클랜시 브라더스의 멤버 가운데 단 한 번도 탈퇴하지 않은 채 1998년 본인의 죽음으로 그룹이 해체되기까지 40년 넘는 세월을 클랜시 브라더스의 큰형으로써 그룹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라 할 수 있겠다. 심지어 두산백과에도 '클랜시' 라고 치면 자세히 서술되어 있을 정도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K-Pop에 소녀시대태연이 있다면, 아일랜드 포크 음악에는 클랜시 브라더스와 패디 클랜시가 있다!

2 상세

첫 직업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가. 가수 데뷔 전까지의 행적은 톰과 거의 일치한다. 당장 이것도 톰 항목에서 복붙한 것이다. 아주 젊었을 때는 동생 톰과 함께 IRA에 소속되어 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직업에 독립운동가가 있는 것은 이 때문. 패디와 톰은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947년 캐나다로 건너가 온갖 노가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던 패디와 톰은 1951년 미국으로 넘어와,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뛰어들게 된다. 물론 이 때는 절대 가수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배우로써.


1940년대의 패디와 톰 클랜시.

이 때 패디와 톰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 다이앤 해밀턴(Diane Hamilton)이라는, 뭐라고 직업을 나타내기는 미묘하지만 요즘으로 따지자면 PD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가 있었다. 이 PD는 1955년 아일랜드의 고전 포크송들을 채록하기 위하여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리고 아일랜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시골 사람들이 부르는 민요들과 바이올린 연주곡들을 녹음기로 녹음해 와서는, 미국에서 패디 클랜시가 사장으로 있던 트래디션 레코드(Tradition Record)를 통해 앨범으로 만들어 발매했다. 제목은 <The Lark in the Morning>.


그런데 이 '시골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름아닌 패디와 톰의 남동생인 리엄 클랜시와 여동생인 조안 클랜시, 페그 클랜시가 있었고, 또한 리엄 클랜시의 절친이었던 토미 메이컴과 그 어머니 세라 메이컴이 있었다. 졸지에 형들을 제치고 막내가 처음으로 음악계에 데뷔한 셈.

이 앨범은 지금도 구할 수 있고 심지어 다음 뮤직에서 팔기까지 하는데, 막상 들어 보면 그냥 시골 사람들 노래하는 걸 녹음해 놓은 거라 반주도 없고 굉장히 소박하다. 그러나 리엄 클랜시와 토미 메이컴의 데뷔 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듯.

그리고 토미 메이컴은 이 해 말에, 그리고 리엄 클랜시는 이듬해인 1956년에, 역시 연기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패디와 톰, 리엄과 토미가 서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토미 메이컴이 인쇄소에서 알바를 뛰다가 2톤짜리 철제 프레스에 손이 깔리는 대형사고를 당하게 된다. 흠좀무.

아무튼 이 사건 직후, 각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패디, 톰, 리엄, 토미가 의기투합하여 앨범을 하나 녹음을 하여, 패디 클랜시가 운영하는 레이블인 트래디션 레코드를 통해 발매를 하게 되었다. 물론 결코 공식적으로 가수로 데뷔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취미로. 모두 1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통점은 모두 아이리시 레벨 송(Irish rebel song), 즉 아일랜드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는 반영가요라는 것이다.


클랜시 브라더스의 첫 앨범.

이 앨범의 제목은 <The Rising of the Moon>. 이것은 문자 그대로 급조 그 자체여서, 악기 소리라고는 패디 클랜시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만 들린다. 토미 메이컴이 아일랜드 전통 관악기인 틴 휘슬과 드럼을 비롯한 몇 가지 악기를 다룰 수 있지만, 당시 메이컴은 손을 거의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급조한 앨범인데도 엄청나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당시 이 4명은 전혀 음악계에 뛰어들 생각조차 없었고 그냥 재미에 가깝게 만든 앨범이었는데도 이런 흥행을 기록한 것. 1959년까지 3년간 이 4명은 철저하게 연기판에 집중했지만, 1959년 다시 본격적으로 음악판에 뛰어들 시도를 하게 된다.

일단 3년 전에 발매한 급조한 앨범에서 불렀던 곡들을, 이번에는 패디 클랜시의 하모니카는 물론이고 토미 메이컴의 틴 휘슬과 드럼 반주에, 다른 세션맨들의 기타와 하프 반주까지 덧붙여 새로 녹음했다. 이렇게 해서 4명은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 그룹 이름은 '클랜시 형제들과 토미 메이컴'(The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 곧 클랜시 브라더스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4년경의 클랜시 브라더스.

클랜시 브라더스는 메인보컬과 서브보컬의 구분이 없다. 패디 클랜시의 경우 100% 보컬 전담은 아니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기도 한다. 당장 패디 클랜시의 하모니카 외에는 맨 첫 번째 앨범에서 들리는 악기가 없지 않은가? 물론 하모니카를 대부분의 곡에서 연주하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패디도 보컬 전담이다. 그러나 하모니카 연주는 정말 잘 해서, 패디 클랜시가 하모니카를 깔아 주는 곡과 그렇지 않은 곡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하모니카는 다이아토닉 하모니카로 보이는 10홀짜리 짧은 하모니카를 손으로 완전히 감싸 쥐고 연주하는데, 비브라토는 그렇게 많이 넣지는 않는 편.

목소리는 톰보다 약간 높고, 톰보다 약간 덜 걸쭉한 저음이다. 패디의 목소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걸쭉하고 소박하지만 약간 중심이 있는 저음'. 로이킴처럼 감미로운 저음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후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이다. 하모니카를 다루긴 하지만, 하모니카를 안 다루는데도 메인보컬을 안 부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다른 멤버가 메인보컬을 부르는 곡에서는 패디는 코러스가 나올 때까지 그냥 멍 때리고 서 있거나 박수만 짝짝 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걸그룹이라면 댄스도 있고 랩도 있지만 클랜시 브라더스는 포크 음악 그룹이니 그렇게 된 것.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패디 클랜시 역시 외모로 승부하는 타입은 결코 아닌 듯. 만일 2010년대의 한국에서 데뷔를 했다면 아마 (네 멤버들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동양 사람처럼 머리, 눈 색이 검은색이지만 그렇게까지 잘 생겼다고 할 수도 없고, 게다가 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탈모 유전자까지 있으니... 패디는 리엄과 함께 이 탈모가 심한 축에 들어서, 1970년대 이후로는 모자를 눌러 쓰고 나온다. 모자는 자주 바뀌지만 거의 대부분 헌팅캡이다. 그러니 (이 장르의 가수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철저한 실력파 가수라 할 수 있겠다.


1980년대의 패디 클랜시.

클랜시 브라더스 항목에 나오는 것과 같은 큰 성공을 거둔 후, 1964년 고향인 아일랜드 캐릭 온 수어로 돌아와 목장을 사들여 축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본인이 사장으로 있던 트래디션 레코드는 1966년에 팔아 넘겼다. 이후 트래디션 레코드에서 나왔던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들은 여러 다른 레이블들을 통해 재발매되어, 오늘날에도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1969년 토미 메이컴이 그룹을 탈퇴하고, 셋째인 보비가 합류했을 때는 그대로 그룹에 남았다. 1971년 보비가 탈퇴하여 잉글랜드인인 루이스 킬런이 합류했을 때도 그대로 그룹에 남았다. 1974년 그룹은 공중분해.

그룹 해체 이후 3년간 목장 경영에 집중하다가, 1977년 다시 그룹이 복원되었을 때 멤버로 합류했다. 이 때 멤버는 패디, 톰, 보비, 그리고 조카인 로비 오코넬. 원래 동생인 리엄 클랜시를 설득했으나, 당시 리엄 클랜시는 문자 그대로 어려서부터 절친이었던 토미 메이컴과 듀엣으로 활동하며 아일랜드 음반 차트 1위에 오르는 엄청난 히트를 올리고 있었기에 당연히 거절. 지금 현아보고 포미닛 그만두고 원더걸스 다시 가입하라 그러면 하겠는가?

이 때 복구된 클랜시 브라더스는 풀 타임 그룹이 아니고 1년 중에 한 3번 정도만 모여서 음악 활동을 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각자 흩어져 개인 활동을 하는, 요즘 걸 그룹과 비슷한 시스템을 취했다. 그런데 그 '개인 활동' 이라는 게 패디 클랜시는 다름 아닌 목장 경영이다. 이건 뭐랑 같은 거냐 하면 태연이 소녀시대, 태티서로 활동 안 하는 기간에는 대관령에서 목장 운영하는 것과 같다!

1984년,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듀엣의 매니저가 긴급 제안을 하게 된다. 클랜시 브라더스가 한참 잘 나가던 리즈시절인 1960년대 라인업으로 복귀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 이 제안에 따라 1984년의 클랜시 브라더스 리유니언 투어(The Clancy Brothers Reunion Tour)가 성사된다. 네 멤버들은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했고, 토미와 리엄의 레이블이었던 샤나키(Shanachie)를 레이블로 하여 앨범도 냈다. 당시 클랜시 브라더스의 레이블은 뱅가드(Vanguard) 레코드였지만, 토미와 리엄 듀엣의 인기가 하도 절정이었던 관계로...

1986년부터 다시 원래 멤버들로 복귀한 클랜시 브라더스는 이후 1988년에 앨범을 하나를 냈지만, 본인들도 쓰레기라고 평가할 정도로 조잡하고, 대부분의 곡들이 예전에 정말 미친 듯이 마르고 닳도록 불렀던 곡들이라서 본인들조차도 별로 가치를 두는 앨범은 아닌 듯.

1990년 톰 클랜시가 위암 진단을 받았다. 이미 투어 일정은 다 짜 놓았는데 그걸 빵꾸를 낼 수는 없는 관계로, 1988년 이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리엄 클랜시가 그룹에 복귀를 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는 그냥 땜빵 차원이었지만... 톰 클랜시의 상태는 결코 호전되지 않았고, 11월 3일 톰은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톰 사후, 1991년 봄부터 리엄이 톰을 대신하여 멤버로 합류하였다.

패디, 보비, 리엄, 로비 오코넬은 1991년 봄부터 클랜시 브라더스로 활동을 재개했고, 아이리시 페스티벌 크루즈(Irish Festival Cruise)라는 행사에 출연하고, 리엄 클랜시절친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기념 행사에 토미 메이컴까지 피처링하여 출연하고, 1995년에는 스튜디오 앨범도 발매하는 등 5년간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그러나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의 분배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으니, 그야말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결국 1996년 봄 마지막 투어를 끝으로, 리엄과 로비 오코늘이 그룹을 탈퇴하면서 그룹은 사실상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패디와 보비는 보비의 아들로써 마지막 투어 때 베이스 연주를 맡기도 했던 핀바 클랜시와 함께 3인조로 그룹의 명맥을 잇긴 했으나, 사실상 1996년을 끝으로 그룹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오죽하면 1996년 봄 투어 이름이 대놓고 Farewell Tour였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이 1997년에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수 에디 딜런(Eddie Dillon)이 이렇게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에 합류했다. 하지만 리엄과 로비 오코넬이 이미 탈퇴를 했고, 진짜 클랜시 '브라더스' 는 패디와 보비 둘뿐이니, 이것이야말로 클랜시 브라더스 최대의 흑역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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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흑역사 라인업. 왼쪽이 패디, 오른쪽 위가 핀바, 아래가 보비.

그러나 이 흑역사도 오래 가지 못했으니, 1998년 패디가 뇌종양에 폐암까지 겹쳤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뇌종양은 어떻게 제거를 했으나, 폐암은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1998년 10월쯤, 죽음을 눈앞에 둔 패디는, 2년여 전에 금전 분쟁으로 그룹을 탈퇴한 리엄을 불러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그리고 패디, 보비, 리엄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실제 공연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시험문제에 '클랜시 브라더스의 마지막 라인업이 무엇인가?' 를 묻는다면 '패디, 보비, 리엄 클랜시' 라고 쓰도록 하자. 그런데 그런 시험문제가 나올 리가 있나?


말년의 패디 클랜시.

1998년 11월 11일, 패디 클랜시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른 나이인 것 같지만 형제들 중 가장 장수했다.) 장례식은 11월 13일에 본인이 교적 등록이 되어 있던 캐릭 온 수어의 성당에서 치러졌고,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여러 인사들이 조문을 왔다. 패디 클랜시의 아들이나 딸 중에 딱히 음악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패디 클랜시는 한 번도 그룹을 탈퇴한 적은 없고, 공식적인 솔로 앨범을 낸 적도 없다. 다만 아래 있는, 여러 가수들이 출연하는 앨범들 셋에서는 그룹 멤버가 아닌 솔로 가수로 나오기는 한다.

3 음반

  • Newport Folk Festival 1959 (1959년)
  • The Folk Music Of The Newport Folk Festival (1959-1960) (1961년)
  • Uncommon Bonds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