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한국

대한민국에서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대해서 적는 페이지.

1 시작

1.1 1961년~1962년 : 서울 진출

천규덕 선수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프로레슬링의 시초는 천규덕이 1949년에 육군항공대(현재 공군)에 입대하여 6.25 전쟁에 참전한 다음 29세이던 1961년 부산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부산에서 레슬링 체육관을 하던 장영철과 의기투합했던 때였다고 한다.

당시 장영철과 천규덕은 부산에서 잡히던 일본의 TV방송에서 역도산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역도산을 흉내내서 부산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열었는데 관중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링은 매트나 나무기둥을 세워서 만들고, 기술도 TV에서 본 것을 흉내내는 식으로 흥행을 했었다.

1961년 6월 17일~6월 18일, 장영철, 천규덕 등은 서울 운동장에서 '한국 프로레슬링 협회'라는 명의로 '5.16 혁명 기념 전국 프로레슬링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1962년에도 열렸는데, 20여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장영철이 한국 챔피언 자리를 확보했다.

천규덕은 이 때 포스터를 한 두장만 붙였는데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회고했으며, 이 무렵 그는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1년에 1,2차례 휴가를 얻어 상경해서 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1.2 1963년 : 역도산 방한

1월 8일, 재일교포 프로레슬러로서 크게 성공한 역도산이 방한하였다.장영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호텔에서 한국 프로레슬러들이 도열하여 역도산에게 인사를 했는데, 역도산이 자신을 구두로 스카웃 하여 일본에 가기 위해 제대를 했으나 그만 역도산이 절명하여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2월 20일~2월 21일에는 장충체육관에서 한국 프로레슬링 협회 주최로, 프로레슬링 국제선수 선발대회가 알렸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이 경기는 역도산 측과의 협약이 되어 있어서, 3월 16, 17일 내한할 예정인 일본 선수와 대전할 선수 및 4월 말 역도산 문하생들과의 친선시합에 출전할 선수들을 선발했다고 한다. 또 국내 여자 프로레슬러들의 시범도 있었으며, 5월 중순에는 일본 여자 선수들을 초빙하여 대결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21일 경기에서는 장영철이 우기환에게 9분 만에 승리, 천규덕이 송학수에게 12분 만에 승리하였다.

22일 경기에서는 장영철, 송학수 조가 천규덕, 우기환 조와 태그 매치 경기를 하여 35분의 싸움 끝에 승리하였다. 박정옥, 유미숙 등 여자 프로레슬러가 출연해서 시범경기를 가졌지만, 경기가 너무 단조롭고 승부 예측이 너무 쉬웠던 나머지 분노한 관중들이 방석을 경기장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벌어졌다.(이 때도 관중들이 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6월 28일,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 여자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는 방한한 일본 여자 프로레슬러 12명과 우리나라 여자 프로레슬러 4명이 참가해서 배틀로얄 방식으로 시합을 벌였다. 당시 기사에서 보면 일본 선수들이 우리 선수들보다 테크닉이나 체중이 월등했으며, 링 밖으로 까지 나가는 혈투였다고 한다.

7월 14일, 밤 8시 장충체육관에서는 한국 프로레슬링 협회 주최로 한일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렸으나, 탈퇴 선수들의 난동으로 경기가 중단되고 관중들이 입장료 반환을 요구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전날인 13일에도 유미숙, 옥경자 등은 체육관 문 앞에서 관중들의 입장을 가로막고 한국 프로레슬링 협회의 비리를 호소하였다고 하며, 이날에는 유미숙이 고함을 지르면서 경기장으로 들어오자 관람석에 분산되어 있던 탈퇴파 선수들이 방석을 던지고, 관중들도 덩달아 방석을 던지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이 난동은 이전에 한국 프로레슬링을 탈퇴하여 한양 프로모션이라는 단체에 들어간 유미숙, 옥경자 등의 여성 프로레슬러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었다. 한양 프로레슬링은 한미 프로레슬링 친선대회를 주최할 예정이었다고 되어 있다.

10월 2일, 10월 3일 에는 제일 프로모터 주최 프로레슬링 헤비 급 및 쥬니어 헤비 급 챔피언 쟁탈전이 2일에서 3일 7시에 장충 체육관에서 열렸다고 한다.

10월 29일에는 한미일 국제 프로레슬링 대회 최종경기가 열렸다. 이날 천규덕 장영철 조는 태그 매치를 가졌는데, 한 명은 일본인 황웅 선수이나 다른 한 명은 기사에는 이름이 없다. 다만 같은 기사의 사진에는 미국의 재크라는 복면 레슬러가 실려 있어서 천규덕-장영철 조가 황웅-재크 조와 경기를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천규덕은 폴 패를 하였고, 장영철은 황웅(荒熊)이라는 일본 선수와 대결을 가졌는데 황웅 선수의 부상(이마의 유혈상)으로 기권승을 거뒀다.

1.3 1964년

2월 7일~13일에는 장충체육관에서는 한일 대항전이 열렸다. 이 시합에도 참가한 황웅은 장영철에게 설욕을 다짐했으나, 7일 경기에서는 태그 매치에서 무승부. 9일 경기에서 장영철과 싱글 매치에서 맞붙어 폴 패하였다. 9일 벌어진 다크매치는 일본의 호전형제(戶田), 호전무웅(戶田武雄)과 호전화웅(戶田和雄)이라는 두 선수와 천규덕 이석윤 조의 태그매치 경기였으며 천규덕 이석윤 조가 승리하였다.

5월 13일~21일 사이에 열린 한일 프로레슬링 경기에서는 13일에 열린 태그 경기에서 천규덕, 홍무웅 조가 산기(山岐)와 황웅(荒熊)이라는 일본 선수 조에 패배하였다. 하지만 14일 경기에서는 장영철, 우기환 조가 산기 황웅 조에 설욕을 거뒀다. 19일 경기에서는 장영철, 옥태진 조가 산기 황웅 조에 또 승리를 거뒀고, 20일에는 천규덕이 황웅과, 장영철이 산기와 각각 싱글 매치로 대결을 가져 각각 승리를 거뒀다.

8월 12~14일에는 역도산 추모 프로레슬링 경기 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또 11월에는 한미일 프로레슬링 경기 대회, 혹은 한일비(필리핀) 프로레슬링 경기 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두 경기가 비슷한 시기에 중복되어 있는데, 같은 대회를 잘못 표기한 것인지 비슷한 다른 대회가 두 번 열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12월 25일에는 한중일 프로레슬링 경기 대회가 열렸으며, 나생문이라는 중국 선수가 참가했다고 한다.#

1.4 1965년 : 김일 귀국

1961~1964년은 장영철과 천규덕, 특히 장영철의 전성기였다. 1965년에는 일본에서 귀국한 김일이 인기 몰이를 하기 시작한다.

5월 10일, 11일 동안 국내선수들만으로 태그매치가 열렸다가, 7월 말에는 김일이 귀국하여 일본 정상급 선수들을 불러들여 "극동 헤비급 선수권 쟁탈전"을 주재하였다.#

8월 6일, 7일에 열린 극동 헤비급 선수권 쟁탈전은 한국 프로레슬링 협회와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의 합의로 이루어졌다. 한국 선수로는 김일, 장영철, 천규덕 등 10여명의 선수가 출전하고 일본에서는 역도산의 제자 4명이 출전했다고 한다. 7일 열린 준결승전에서 김일은 길촌(吉村)에게 2대1로 판정승을 거두고, 천규덕은 일본의 요시노 사도에게 패배하였다. 11일 열린 결승전에서 김일은 일본의 방리(芳里)를 물리치고 제1회 극동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1.5 60년대 후반

1965년 중반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일 선수가 귀국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965년 11월 27일에는 프로레슬링은 쇼다 사건이 터져서 프로레슬링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대체로 원로 프로레슬러들은 이 사건이 가장 큰 타격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김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파 레슬러의 경우는 이 사건으로 크게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1974년에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의 흥행이 벌어지는 등 흥행이 잘 되었다는 설도 있다.

2 몰락

아무튼 70년대 말기에 프로레슬링 인기는 크게 저조해졌으며,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전두환 대통령 시대인 80년대에는 완전히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이미 80년대 기사에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시들해졌다.'는 언급이 나올 정도다.)

또 한국 프로레슬링 몰락의 이면에는 국내파와 해외파의 대립이 있다.

50년대부터 프로레슬링을 시작하고 있던 천규덕, 장영철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선수들이 있었으나, 6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귀국한 김일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김일 도장과 김일 후원회를 중심으로 한 해외파가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된다. 처음에는 같이 경기를 하였으나, 70년대에 대립이 극단적으로 벌어지면서 단체가 양분되면서 국내파와 해외파는 서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일본이나 미국 같이 큰 시장이라면 양분된 단체도 공존할 수 있었으나 한국은 워낙 시장이 작았고 그만큼 선수들의 폭도 좁았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또한 한국 스포츠 계에 빠지면 섭섭한 협회의 만행도 있었다.

3 1980년대 이후 : 미국 프로레슬링 시대

1960 ~ 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 프로레슬링이 몰락을 하고 80년대 후반 주한 미군방송 AFKN이 토요일 오후 4시에 편성했던 WWF 프로레슬링 (현 WWE) 이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당시 편성 했던 프로그램은 WWF 슈퍼스타즈로 메이저 레슬러가 마이너 레슬러와 대결하는 경기였는데 재미도는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동시간대 시청률이 무려 10%대가 나왔다고 한다.[1] 저화질 방송에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서울, 수도권과 대구, 군산등 일부 지역에서만 볼수 있었던 방송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실로 엄청났다. WWF 최근 소식을 알수 있었던 전문잡지 WWF 매거진이 대한민국에서도 정식 발매되었으며 헐크 호건, 얼티밋 워리어등 정상급 레슬러들의 경기영상과 4대 특별이벤트 경기인 로얄럼블, 레슬매니아, 섬머슬램, 서바이버 시리즈가 비디오로 출시되었다.[2] 아이큐 점프등 만화잡지에서 레슬러들의 브로마이드와 WWF 최신정보책자를 부록으로 증정하기도 하였다. 게임 WWF 슈퍼스타즈와 후속작 WWF 레슬페스트가 격투게임 열풍속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WWF 레슬러들이 나오는 장태산의 만화 스카이 레슬러도 많은 인기가 있었다.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레슬링 기술을 흉내내기도 하고 언론에서는 프로레슬링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 AFKN에서도 대한민국내 인기를 인지했는지 일요일에는 WCW 프로레슬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 프로레슬링 열풍은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90년대 후반 국내 유선방송에서 WWF 간판 프로그램 RAW를 방영중이었던 위성방송 스타 스포츠를 송출하면서 다시 한번 인기가 치솟으며 매니아층이 더욱 두터워진다. 이 시기에 형성된 매니아층의 영향으로 1998년 iTV 경인방송에서 WCW를 처음으로 정식 방영한데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SBS, KBS 스포츠 채널에서 WWE를, SUPER ACTION, 온게임넷에서는 TNA를 정식방영하였으며 2003년 역사적인 첫 WWE 월드투어 한국경기가 개최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주었다.

4 21세기

현재는 WWA, 신한국 프로레슬링, PLA, PWF 등의 단체가 존속하고는 있으나 1년에 1번 흥행하는 것도 보기 어려운 실정. WWA는 2011년에 2회, 신한국은 2009년 3월 이후 흥행을 개최하지 않았고. PLA는 2011년에 3회의 흥행을 치뤘다. 현재 2014년 기준으로 PWF는 매달마다 '슈퍼노바'라는 하우스쇼 흥행을 열고 있고, 인생공격 같은 큰 흥행도 열고 있다. PLA도 매달마다 월미도에서 흥행을 열고 있다. 현재는 휴식 중.
  1. 메이저 레슬러간 경기인 새러데이 나잇 메인이벤트도 비정규적으로 금요일에 편성되었다.
  2. 4대 특별이벤트 경기는 AKFN에서도 방송되었으며 3시간 경기로 1년에 4번 토요일 오후 3시에 편성되어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