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역사

동남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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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의 정복 이전에 있어왔던 원주민 왕국들. 지도를 보면 인도화,중국화,아랍화된 왕국들이 독자적으로 발전해왔음을 알수있으며 후에 들어온 서구 문명까지 포함시킬 경우 사실상 모든 주요 문명권들이 필리핀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다양성은 필리핀 사회의 발전에 음과 양 모두로 작용하였다.

1 개요


필리핀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고대사

흑인 계통의 네그리토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살아왔는지는 알려져있지는 않다. 지금 필리핀의 주류를 이루는 오스트로네시아인이 6,000년 전쯤 부터 대만중국 남부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네그리토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에게 밀려 산악지역이나 도서지방으로 밀려나거나 동화되었다.

이후에 여러 이민족이 오고 가다가 7세기부터 일부 섬지역은 인근한 스리위자야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 영향으로 힌두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필리핀으로 전파되었다. 그 영향으로 문자도 전파되어 인도계 문자와 아랍 문자를 개량한 문자도 존재했지만 스페인 식민지배 시기에 로마자로 대체되어가는 바람에 현재는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고, 거의 장식용으로나 쓰는 형편이다. 물론 민다나오의 무슬림들은 아직도 쓴다. 이런일은 꽤 흔해서 같은 동남아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아랍 문자를 개조한 자위문자를 썼지만 비슷한 식으로 로마자로 대체되었고, 베트남한자에서 파상된 쯔놈이라는 문자가 있었지만 로마자로 대체되었다. 같은 시기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중앙아메리카도 고유문자가 있었으나 로마자로 대체된 상황. 다만 로마자를 쓰는 형편이라도 해도, 필리핀내의 민족주의자들이나 필리핀 고유문화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은 이들 문자를 상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한다. 유니코드에도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역사적인 기록물들도 종종발굴되기도 한다. 동남아지역 특성상 특히 동남아 도서지역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유물과 특히 기록은 그 진위와 시기에 의혹이 상당히 많다. 같은 동남아지역 대륙국들도 기록 등에서 뚜렷하거나 진위여부가 확실하진 않는 경우가 많은 편이긴하지만 그래도 섬지역에 비하면 더 나은편이다.

이 시기에 바랑가이라 불리우는 가족공동체 중심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했으나 톤도, 부투안 같은 도시국가들도 소수 있었으며 유물이나 기록들도 간간히 발견된다. 이런 소국들의 지배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싸웠던 막탄의 라푸라푸(Lapu-Lapu)가 있다.

일부 사학자들(이도학교수가 대표적.)과 환빠들은 백제의 속국이었던 흑치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필리핀은 중국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했던 탓에 예로부터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크메르인, 태국인, 말레이인, 베트남인, 참파인, 일본인, 류큐인 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오고갔으며 이미 중세 시기에 주변국 기록에도 필리핀 인들이 자국으로 와서 교역했다는 기록이 간간히 남아있지만,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강력한 나라가 나오지 않고 각 지역별, 혹은 섬들별로 고만고만한 소국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다가 15세기부터 남부 지역에 소수 아랍인들이 정착하면서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필리핀 남쪽의 술루제도에 술루 술탄국도 15세기에 세워졌다. 홀로(Jolo)를 수도로 한 술루 술탄국은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 갔으며 전성기엔 말라카, 브루나이를 위시한 말레이계 국가들과의 해상 교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게다가 한때 브루네오 섬 일부 지역과 팔라완 섬, 민다나오 섬 일부을 점유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마긴다나오 술탄국, 마닐라 왕국 등의 이슬람 도시왕국도 몇몇 나타났다. 이러한 이슬람화의 추세가 계속 이어졌다면 필리핀 역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함께 동남아 도서부처럼 이슬람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리핀 역사에서 중대한 변수가 생기게 된다.

3 중세~근세사

그렇게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의 세가 확장되는 듯했다가, 16세기 중반 들어서 스페인이 나타났다. 1529년 스페인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에 의거 필리핀,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차지하고 포르투갈은 서쪽의 마카오동티모르를 차지하는 걸로 정리되어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았지만 실제 지배하진 못했고, 1565년에 돼서야 세부 섬에 기지를 마련한다. 이후 1571년 마닐라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스페인이 필리핀 지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 시기의 필리핀은 멕시코 총독을 통해 간접 통치를 받았다. 스페인은 애초엔 향신료를 기대했으나 필리핀에선 향신료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교역중계지로 주로 취급받았다. 처음엔 가까이의 명나라나 일본과 교역을 시도했으나 영 시원치 않았고,[1] 그래서 남미와 아시아간의 갈레온 교역이 이루어졌다.

한편 스페인은 필리핀에 가톨릭을 전파했으며, 스페인 통치자들과 달리 가톨릭 사제들은 현지 주민과 접촉하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갈레온 무역이 쇠퇴해 가면서, 스페인은 이곳에서 플랜테이션을 운영했다. 이렇게 18세기 말 플랜테이션이 시작되면서 스페인인과 현지 혼혈인인 메스티소가 대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는데, 메스티소 중 부유한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 스페인어로 "배운자들", "지식인들")라고 부르는 지식인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1854년 마닐라가 개항되었고, 이렇게 플랜테이션은 더욱 확대되었다.

한편 남부의 무슬림들은 스페인에 지속적으로 저항해 왔다. 또한 초기에 일부지역에서 저항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부실한 연유로 흐지부지 끝났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저항은 조직적으로, 그리고 더 많아졌다. 또한 19세기 앞서 말한 일루스트라도스 등에 의해 필리핀에도 민족주의가 생겼다. 위에 언급했듯 필리핀은 각 섬이나 지역마다 종족과 언어, 문화, 역사등이 다른데다가 이 시기까지도 "통일"되었던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때문에 필리핀인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필리핀인 독립운동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곰부르자 사건[2][3]이 있다. 1872년 카비테의 산 펠리페 요새에 위치한 무기고에서 강제 노역과 과중한 조세 등에 시달리던 혼혈 메스티조들이 집단 봉기를 일으키자, 스페인 당국은 이를 당시 개혁적 성향의 가톨릭 신부들이었던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에게 반란 사주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한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마닐라 대주교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 신부들의 신부직을 박탈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교회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에서였는데, 사주 혐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독실한 가톨릭 문화가 지배하는 필리핀에서 스페인 지배에 대한 반란을 대주교가 '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간접적으로 인증한 셈이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후로 필리핀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 필리핀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으론 호세 리살(Jose Rizal)이 있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곰부르자 사건에 연루된 신부 부르고스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호세 리살은 지주 출신으로 필리핀 민족동맹을 조직했으나 체포되었고, 이후 1896년 KKK(카티푸난)이 일으킨 무장투쟁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4][5] 필리핀에 가면 리잘의 사형당할때를 생생하게 청동으로 만든 게 전시되어 있다. 같은 필리핀(스페인군 소속 필리핀인들에게 총살)의 총에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며 일부러 등을 돌려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게 재현되어 있다. 그리고 1896년부터 무장투쟁을 전개한 에밀리오 아기날도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자 그 기회를 노리고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 필리핀의 국기도 홍콩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만들었다.

다만 필리핀 독립은 한계가 있던 게 이러한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크게 확대하던 지식인이 필리핀과 스페인계 혼혈이 다수였고 이들이 독립하려고 하던 것도 실상은 스페인인이라고 자부하고 비혼혈 필리핀이나 무슬림을 하등하게 보던 이들이 스페인에게 무시당하자 독립했던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독립과 같이 스스로 귀족적으로 모든 기득권을 챙겨 지금까지 무시못할 기득권이 되었다.

4 근대사

그러나 자칭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 필리핀 제1공화국의 운명은 안습으로 끝났다. 제대로 된 선거도 아니고 위에 서술한 대로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내세운 민주주의 국가는 말만 다르다 뿐. 한마디로 중남미랑 같이 스페인인이 거의 독점하던 땅과 온갖 기득권을 지들이 나눠먹기하니 필리핀 다수 서민들에게는 그냥 지배자가 달라진 거 하나 뿐.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그리고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이슬람 지역은 하등하다고 무시당하니 분노하여 독립투쟁을 벌였고 온갖 시위와 여러 사회적 문제가 폭발하여 제대로 국정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미군을 필리핀에 보내 저항하는 필리핀인 60만여 명을 학살하였고[6] 끝에 필리핀을 차지했다. 미국 대통령이던 윌리엄 매킨리는 대체 필리핀으로 쳐들어가야 할 이유가 뭐임? 이란 지적에 "꿈에 하나님이 나와 야만족의 땅을 선교하라 했다능."이라는 개드립을 쳐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한편 이 사건은 미국에서도 말이 많았다. 마크 트웨인은 처음엔 이 전쟁을 지지하다 나중에 돌아가는 꼴에 경악하여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책을 썼다가 출판금지를 먹은 전력이 있다.

그리고 1901년 아기날도가 체포된 이래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필리핀은 그대로 지배자만 바뀐 채, 또 독립도 미국이 놔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미국은 1907년 의회선거를 실시하고 1914년 양원제 의회를 도입했으며 영어를 널리 보급했다. 그 의도에 관해서는 민족의식 희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혀튼 현재 필리핀에서도 스페인어는 거의 안 쓰이는 편이라 한다. 스페인어의 잔재는 사람 이름과 숫자, 지명 정도.

그러다가 1934년에 자치법안이 통과되었고, 1935년 대통령 선거에서 첫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케손이 맞붙는 구도였는데 선거에서 케손이 압승을 거두어 제2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케손은 타갈로그어를 영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를 지정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고, 1941년 대선에서 81.7%라는 압승을 거두어 재선에 성공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략했으며, 일본의 괴뢰 정부인 필리핀 제2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4년도 못 가 괴뢰 정부는 무너지고, 게다가 전쟁 도중 100만여 명의 필리핀인이 죽게 했다. 마닐라 대학살 등의 참극도 일본의 손에 의해 자행됐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필리핀은 대만과는 달리 반일 감정이 상당하게 되었다.

1945년 다시 미군이 마닐라를 점령했고, 1946년 마침내 완전 독립에 성공해 4세기간 외세 지배를 끝내고 필리핀 전 지역을 포함한 그들만의 첫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일제에 투쟁해오던 후크발라합(Hukbalahap)은 이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고 하며, 토지개혁(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등을 요구하며 반미 무장투쟁을 개시해 1950년에는 단원이 무려 7만에 이르렀으나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에 의해 거의 진압되었다.

5 독립 이후

필리핀은 1946년 7월 4일에 독립하였다. 그리고 독립하기 전인 1945년 10월 24일에 유엔에 가입하였다. 이때 필리핀의 인구는 1900만명에 조금 못 미쳐 남한보다 50여만명 적었고[7] 경제는 동시대 남한에 비해 탈1차산업 측면에서 낙후되어 있었으나[8] 한국의 국민소득이 일본 패망으로 103달러에서 추락함에 따라 명목 소득액은 80달러대로 비슷하였다.[9] 물론 필리핀의 경제도 오랜 전쟁탓에 상당히 피폐해졌다. 1946년 실질 농업 최종생산량은 1938년에 비해 24%감소하였고, 공업 최종생산량은 1938년의 2/3 수준을 기록하여 1946년 GNI는 1938년의 87%밖에 되지 못했다.[10]. 그러나 40~50년대 필리핀 인근 아시아 국가들이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후에도 여전히 전쟁, 내전에 여념없거나, 쿠데타, 게릴라에 시달릴 때고[11] 워낙 환율이 비현실적이었던데다 인구조사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던 탓에 당시 필리핀이 잘살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물론 국민소득이 50달러에서 맴돌던 인도, 파키스탄에 비하면 부유했던 것은 사실이나[12] 50년대의 성장은 50년대에 한국 수준에서 60년대 한국 수준으로 성장한 것 정도. 이후에는 인구압을 이기지 못한 채 말레이시아,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게 차례로 따라잡힌다.

한때 한국이 이 국가를 롤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때 장충체육관을 지을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대신 필리핀이 지어 줬단 루머가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5.1 마르코스 이전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로하스이나 재임 2년만에 사망했다. 그 다음 대통령인 키리노는 원래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한 사람이었으며, 대미협조를 근본정책으로 삼고 장제스와 유대하려 했다. 이후 1953년 역시 항일 게릴라 투쟁을 했던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공산주의 게릴라인 후크발라합을 진압하였으나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다음엔 카를로스 P. 가르시아가 잠깐 집권했다가 1961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뒤를 이었다. 그 역시 반일 운동을 지원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반공을 표방하며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으나, 그도 1965년 선거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그 때 당선된 사람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망했어요

5.2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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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경제를 아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아쳐먹은 이 인간이 바로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이다. 이 사람은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 항전을 벌이던 사람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데 의심스런 점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본인에 대한 항목을 참조.

중국인 계통의 필리핀 유력가문 출신[13]으로 전쟁 전에는 정적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도 받았었다. 그러다가 최종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며 석방되었고, 이후에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지냈고, 이후에 필리핀 자유당원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마닐라 시장직에도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려고 했으나, 경선에서 패배당한 후에 자유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당소속을 바꾸고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소련 등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14], 동시에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도 호황을 누리면서 사회문제들도 어느정도 해결되는듯 보였다. 때문에 1969년 대선에서 61.5%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면서 전후 최초의 재임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재임 2기 중반부터 점차 막장화되어가며 결국 1972년에 계엄령을 발포, 반공을 내세워 야당인사들과 만디나오 섬의 무슬림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경제도 족벌독점체제로 성장이 뒤쳐져가며 한때 아시아에서 영국홍콩 다음으로 두번째로 잘사는 국가라는 타이틀은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후발 주자인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그리고 신생국인 싱가포르브루나이 등에게 차례 차례 추월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마르코스는 1981년에 계엄령을 풀지만 부정선거로 3선에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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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정적으로서 탄압했던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Benigno Simeon "Ninoy" Aquino Jr.)가 미국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반마르코스 여론이 거세지면서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마르코스는 이에 대해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러, 이 대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연장할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치르면 낙선할 게 뻔하므로 부정선거를 저질러 상대인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 후보에 승리했다. 그러나 코라손 아키노는 물론 필리핀 국민들도 이에 불복하였으며, 결국 1986년 마르코스는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해야 했다.

5.3 마르코스 이후

독재자 마르코스가 망명한 후 베니그노 아키노의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6년을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필리핀의 민주화에 기여하여 반정부 인사들을 대거 사면시키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하고 지방분권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로는 피델 라모스, 조지프 에스트라다, 글로리아 아로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등의 대통령을 거치며 절차적 민주주의가 점차 정착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마르코스 시절부터 악화된 치안, 내전 문제나 정치계에 만연한 부패, 몇몇 가문의 정치 독점 등은 필리핀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2016년 5월 대선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당선되어 과격한 방법으로 필리핀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어 전세계에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1. 당시 경제권을 쥐고있던 중국인들과의 갈등이 심했던데다가 일본이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무역에 타격을 입은영향이 컸다. 그래서 중국인 학살 사건이 여러번 일어나기도 했다고...
  2. Gomburza. 스페인에 의해 희생된 3명의 신부인 Gomez, Burgos, Zamora를 합친 약어다
  3. 문서 첫머리의 동영상 38초쯤에 나온다. 16세기 사람인 라푸라푸 다음으로 나온다는 점에 주목하자. 곰부르자 사건은 필리핀 중세사와 근대사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4.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단체 KKK와는 연관이 없다! 필리핀 쪽에선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영문위키에도 상관이 없다고 굳이 명시되어있다.
  5. 그렇지만 국가기념일에 빨간 바탕에 하얀글씨로 KKK가 박혀있는 카티푸난기가 걸리는데 섬뜩한 것은 어쩔수 없다.
  6. 이러한 일 때문에 미국이 터키에게 오스만 제국 시절 터키가 자행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정하라고 하자 터키는 미국의 필리핀인 학살을 들먹이며 웃기네 그런 늬들은 필리핀에서 뭐했어? 라고 따져든 적이 있었다..
  7. 매디슨의 추계에 따르면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인구가 필리핀에게 추월 당한 것은 1950년대부터다.
  8. 해방무렵 남한의 1차산업 종사자가 전 인구의 80%였는데, 필리핀은 89%. 산업구조의 경우, 1938년 41%의 비중을 보였던 필리핀 경제에서의 농업 비중은 1946년 45%로 늘어나 1953년 남한의 42%보다 3%p 높았다.
  9. 필리핀-미국 재정 위원회에 따르면 1946년 필리핀의 명목 GNI는 32억페소, 명목 NNP는 28억페소였고, 1인당 소득은 176페소 정도였다. 필리핀의 고정환율 2페소 1달러. 반면 한국의 고정환율은 수년에 한번 꼴로 변경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국민소득( GNI)의 경우 80달러면 6.25 사변 이전 수준 내지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던 시점의 수준이고 70달러대는 60년대 환율을 수배 올릿 탓에 나온 왜곡된 수치다.
  10. 미국-필리핀 재정위원회가 보고한 1938년 기준 실질 GNI. 서비스업은 2.7억 페소에서 3.6억페소로 동기간 33% 늘었다. 전산업으로는 11.6억 페소에서 10억페소로 감소(1938 불변가액). 이상 1946 필리핀 연간 통계, 1947, the Bureau of the Census and Statistics in Manila와 필리핀-미국 재정위원회 보고서 참고
  11. 일본 패망 이후부터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1949년까지 베트남은 1954년까지 건국전쟁을 치뤘고, 이후 한국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을, 베트남이 1956년부터 1975년까지, 라오스는 1953년부터 1973년까지, 스리랑카는 1958년부터 내전을 겪었으며, 태국, 파키스탄, 미얀마 등은 군사쿠데타에 시달렸고, 인도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과 라오스, 캄보디아 사이에는 국경분쟁이 일어났으며 이외에도 식민지배가 초래한 민족 종교 갈등과 게릴라가 만연하였다.
  12. 인도와 파키스탄은 인당소득이 당시 한국의 절반밖에 되지 못했던 최빈국. 1인당 소득 115루피. 1946년 가치로 환산할 때 45달러. 한국은 1938년 103달러를 찍었는데, 인도는 1954년에야 50달러를 달성.
  13. 아이러니하게 정적인 베니그노 아키노도 화교계였다.
  14. 물론 그러면서도 베트남필리핀군을 보내거나 필리핀 내의 공산반군을 때려잡는 행위는 게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