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틴 전투

(하틴의 뿔에서 넘어옴)

1 개요

Battle of Hattin. 1187년 7월 4일에 벌어진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아이유브 왕조의 결전으로써, 아이유브 왕조가 예루살렘 왕국의 가용 병력 대부분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을 포함한 대다수의 십자군 도시/요새들이 점령되었고, 이 소식이 유럽으로 전해져 제3차 십자군을 촉발하였다.

히틴(Hittin) 혹은 하틴의 뿔 전투라고도 하는데, 전장 근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개의 언덕을 하틴의 뿔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2 전투 배경

2.1 아이유브 제국의 성립

1174년 소심하고 유약해 보이던 쿠르드족 청년 살라흐 앗 딘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의 이름으로 이집트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레반트 지역에 정치적 격변이 찾아왔다. 살라흐 앗 딘은 주위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큰 야망과 지략을 보여주었고, 노쇠한 누르 앗 딘이 죽은 상황을 틈타 시리아까지 날로 먹어버림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앞뒤로 포위한 형국을 만들었다.

유능한 장군이었던 예루살렘의 젊은 왕 보두앵 4세는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자신만만하던 살라흐 앗 딘의 군대를 격파하여 그 기세를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살라흐 앗 딘은 휴전이 성립된 뒤 알레포와 모술에 웅거하던 장기 왕조의 잔당을 처리하며 오히려 세를 더욱 불렸다.

600px-Ayyubid_Dynasty.svg.png

살라흐 앗 딘이 차지한 영역. 동으로는 압바스 왕조의 영역과 접하지만 그는 칼리파를 지지하며 동맹 관계를 구축했고, 서로는 무와히드 왕조와 접하지만 그들과도 충돌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왕국은 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무슬림 세력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시리아의 아사신파나 모술을 거점으로 버텼던 장기 왕조의 잔당들처럼 노골적으로 살라흐 앗 딘에 적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그 세력이 미약했다.

2.2 예루살렘 왕국의 분열

한편 예루살렘 왕국은 젊고 유능한 보두앵 4세가 문둥병에 걸리면서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전(前) 안티오크 공작이자 케락의 영주였던 샤티용의 르노는 왕이 살라흐 앗 딘과 맺은 휴전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무슬림들을 공격했지만 왕은 이런 돌출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1185년 보두앵 4세가 죽은 뒤 그의 누이 시빌라의 어린 아들 보두앵 5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 역시 1년도 안 돼 죽었다. 그러자 시빌라는 자기 남편이었던 기 드 뤼지냥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이는 예루살렘 궁정에 큰 분열을 가져왔다. 르노나 리드포르의 제라르 같은 성전기사단장은 새 왕을 지지했던 반면, 보두앵 5세의 섭정이기도 했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은 새 왕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무력 충돌까지 갈 뻔할 정도로 험악해졌으나, 이벨린의 발리앙이 중재하여 내전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레몽 3세가 살라흐 앗 딘과 개인적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살라흐 앗 딘은 우호의 표시로 레몽의 영토에 군대가 지나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레몽은 이를 수용했는데, 마침 기 왕과 레몽 3세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그의 영토로 가던 성전기사단/구호기사단 지도부와 무슬림 군대가 마주친 것이다. 기사단 지도부는 압도적인 숫적 차이를 이기지 못하여 성전기사단장 제라르 외 3인을 빼고는 몰살당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왕국에서 완전히 고립되거나 파문당할 것을 걱정한 레몽은 왕에게 사죄하고 절대복종하기로 서약했다. 반대 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기 왕은 살라흐 앗 딘을 공격하기 위해 전군을 소집했다. 이 때가 1187년 7월이다.

2.3 티베리아스 포위

이에 맞서 살라흐 앗 딘 역시 군대를 소집했다. 살라흐 앗 딘은 속전속결을 원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제국은 중앙집권 국가라기보다는 살라흐 앗 딘 개인에게 복종하는 여러 아미르들의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장은 살라흐 앗 딘의 세력과 지하드라는 대의명분이 그들을 붙잡아둘 수 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가을의 수확 시기가 다가오면 이탈자가 속출할 것이 우려되었다. 따라서 살라흐 앗 딘은 더운 여름이라 수원(水原)을 끼고 버티고 있는 예루살렘 군대를 전장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살라흐 앗 딘은 레몽의 요새 티베리아스를 공격했다. 티베리아스에는 방위군이 얼마 없었으므로 외성은 손쉽게 함락되었으나, 무슬림 군대는 짐짓 공격하는 척 하면서 내성 포위는 질질 끌었다.

내성 안에는 레몽의 부인인 에시바 백작부인이 남아 있었고, 이 소식은 곧 예루살렘 지휘부에 도달했다. 7월 2일 열린 지휘부의 회의에서 레몽은 이것이 살라흐 앗 딘의 낚시라는 점을 간파하고 티베리아스를 구원하자는 의견에 반대했다. 자신의 요새와 아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르노는 그를 비겁한 겁쟁이라고 비웃으며 당장 살라흐 앗 딘을 공격하자고 주장했고, 결국 르노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살라흐 앗 딘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2.4 양측의 전력

예루살렘 왕국은 원정에 동원 가능한 전군을 동원했으며,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도 대부분 가담했다. 그 병력은 1,200명의 중무장한 기사, 그보다 많은 수의 기병, 1만 명 이상의 왕국 보병, 주로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루어진 석궁병들, 튀르크인들을 포함한 용병 등을 합하여 대략 2만~2만 5천 명 정도였다. 왕인 뤼지냥의 기를 포함하여 트리폴리의 레몽, 샤티용의 르노, 리드포르의 제라르, 이블랭의 발리앙 등 다수의 주요 귀족들이 참전했다.

살라흐 앗 딘의 군대 역시 2만에서 3만 명 사이였다. 정확한 병력 구성은 알 수 없으나 상당수가 기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병은 주로 이집트 군대가 많았다. 기병 부대의 대부분은 휘하 아미르들이 모아 온 튀르크, 아랍, 베두인 경기병/궁기병이었지만, 쿠르드인과 튀르크인들로 구성된 살라흐 앗 딘 직속의 중장기병들도 있었다.

3 전투 경과

c36bc308ed.jpg

7월 3일 예루살렘 군대가 수원이 있는 세포리아(아랍어로는 사푸리야)를 출발했다. 그들은 진지를 나서자마자 살라흐 앗 딘이 보낸 궁기병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물론 예루살렘 군대는 기사, 보병 할 것 없이 큰 방패와 갑옷으로 중무장했으므로 궁기병들의 공격에 큰 피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진격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날아드는 화살, 내려쬐는 햇빛과 싸우며 반나절 동안 6마일을 행군한 예루살렘 군대는 우물을 찾아 잠시 휴식했다. 하지만 우물에서 티베리아스까지는 9마일[1]이 더 남았고, 상식적으로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요새를 떠나온 마당인 예루살람 군대는 행군을 재개했고, 무슬림 기병들에게 포위 공격당하면서 느릿느릿 전진했다. 결국 저녁때까지 행군했지만 티베리아스에는 도착하지 못하고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언덕 근처에 진지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Hattin.jpg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히틴 전투.[2]

이미 사방을 무슬림 기병들에게 포위당한 좁디 좁은 캠프에서 더위와 갈증, 기습 위협에 시달리며 밤을 보낸 예루살렘 군대에게 매캐한 연기까지 덮쳤다. 무슬림 군대가 그들을 괴롭히려고 불을 지펴 연기를 날려보낸 것이다. 아침을 맞은 그들의 눈앞에는 갈릴리 호수가 어른거렸지만, 그들과 호수 사이에는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버티고 있었다. 예루살렘 군대는 완전 포위된 상황에서도 전투 대형을 갖추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호수에 당도하기 위한 기사들의 절망적인 돌격은 오히려 틈을 노출시켜 예루살렘 기병과 보병대를 분리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분리된 각 부대는 무슬림 군대에게 포위되어 각개격파되었고, 왕의 근위대가 끝까지 무슬림 군대를 몰아붙이며 분전하였으나 결국 궤멸되었다.

4 경과 및 의의

600px-Saladin_and_Guy.jpg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한 기 드 뤼지냥.

전투 결과 2만 명이 넘던 예루살렘 군대는 3천 명 정도의 생존자를 남기고 궤멸되었으며, 무슬림 군대의 피해는 미미했다. 왕인 기 드 뤼지냥과 르노, 성전기사단장 제라르를 비롯한 다수의 귀족과 지휘관이 사로잡혔다. 레몽과 발리앙은 전투 도중 포위망을 벗어나 각각 트리폴리와 예루살렘으로 도주했다. 이전부터 휴전 중 무슬림 대상을 공격하며 살라흐 앗 딘을 도발하던 르노는 살라흐 앗 딘에게 손수 처형당했고, 나머지 귀족들은 모두 몸값을 받고 풀려났다. 기는 다마스쿠스에 잠시 압송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났다.

이후 레몽의 영지인 트리폴리와 결사 항전으로 버텨낸 티레 등을 제외한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모든 영토가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하거나 점령당했으며, 유럽에도 그 소식이 알려져 제3차 십자군을 촉발하였다. 이후 역사의 자세한 양상은 살라흐 앗 딘, 리처드 1세, 십자군 전쟁, 아이유브 왕조, 예루살렘 왕국 , 제3차 십자군 원정 항목을 참고하라.
  1. 14.48km
  2. 단 전투장면은 생략 되었고 전투 초반부와 전투 종료후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아무래도 원래 러닝타임이 긴 영화다 보니 커트해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