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선길

桓宣吉
(? ~ 918년)

1 생애

고려 초기에 반란을 일으킨 호족으로 동생 환향식과 함께 왕건을 섬겨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공을 세웠으며, 마군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왕건의 심복이 되어 항상 정예군을 거느리고 숙위하도록 했다.

그러나 처가 재주나 용력이 남들보다 뛰어나 남들이 복종하거나 큰 공을 세웠는데도 다른 사람이 권력을 잡았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냐고 꼬드기자 병사들을 집결했다가 변란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마군장군 복지겸이 이를 알고 왕건에게 보고했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건이 궁전에서 학사 몇 사람들과 국정을 논의할 때 부하 50여 명과 무장해 동쪽 곁채에서 안뜰로 돌입해 해치우려고 했는데, 왕건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너네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내가 왕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냐" 라며 "천명이 정해졌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일갈하자 그의 말과 얼굴빛이 태연한 것을 보고 군사를 매복시킨 것으로 의심해 달아났다.

그러나 왕건의 호위병들에게 격구장까지 추격을 받아 그 와중에 죽었다.

2 창작물에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원래 양길의 부장으로 있다 궁예에게 포섭되었으며, 궁예고려를 건국했을 때 궁예 밑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한 마군장군으로 등장한다. 방천극을 애용하는 용감무쌍한 장군으로[1], 실제로도 그 유금필과 호각으로 싸운 적이 있다. [2] 유금필이 작중 최강자 중 한명이란걸 고려하면 무력 하나만은 진퉁이다. 그러나 지혜가 무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양길이나 궁예 또는 견훤이랑 맞장을 뜨면 어땠을까

일례로 왕건이 부재중일때 그가 맡던 지역을 환선길이 대신 지휘를 했다가 후백제군에게 탈탈 털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후 궁예와 아지태, 종간 등이 함께한 회의자리에서 그 죄를 논하던 궁예가 "환장군은 용맹은 한데 지혜가 부족하다"며 크게 죄를 묻지는 않겠다 해서 넘어간다. 국호를 바꿀때는 '참으로 크고 웅대한 뜻입니다!'라고 말 한마디 건냈다가 궁예가 "환장군이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안단 말이오?"하고 묻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궁예가 광기를 보이기 시작하고,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군사 훈련을 빙자하여 역성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들에게 포섭되어 혁명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홍유 등은 애당초 환선길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그를 제거할 준비를 해둔 상태였고, 혁명 때에도 환선길은 어디까지나 그저 숟가락만 얹는 형식으로 참여한 셈이었다. 따라서 홍유 등에 비해서는 비교적 대우가 소홀했고[3], 왕건에게 내심 불만을 품게 된다. 나름 마군대장군으로 승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공신들에 비하면 상당히 밀린 편이었고, 한때 같은 급이었던 왕건 밑에 선다는 것에도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환선길의 아내와 친동생인 환향식이 환선길에게 충동질을 하면서 결국 왕궁에 군사들을 이끌고 난입, 왕건을 죽이려 든다.

그러나 왕건은 근위대장이었던 장일의 기지로 위기를 넘기고, 지레 겁을 먹은 환선길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고 태세를 정비했지만 이미 동생인 향식은 복지겸에게 목이 잘린 뒤였다.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얼마 뒤 참형에 처해진다. 형이 집행되기 전 가족들은 어떻게 되냐 물었지만 복지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반란을 꾀한 만큼 삼족을 멸한다는 말 뿐. 이에 허탈하게 웃으며 저승에서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긴다.

다만, 진행을 잘 보면 환선길이 불만을 가지긴 했지만 애초에 먼저 4기장과 유금필 등의 왕건의 의형제들이 환선길을 견제하려고 움직이긴 했다. 궁예와 가까웠기 때문인데, 복지겸은 환선길을 변방에 유배를 보내자고 했고 유금필은 아무 공은 없는데 밥숟가락만 얹은 친 궁예파라고 복지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렇게 환산길이 반기를 들 만한 떡밥을 다 깔아놓고 언제 족칠까 두고보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거의 노골적으로 환선길을 배척하는 데다, 환선길의 매제인 이흔암을 변방으로 보내는 등의 행동까지 겹치자 쌓이고 쌓인 불만이 청주 호족인 선장 등의 반란과 김순식이 왕건을 대놓고 까는 등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터진 것에 가깝다. 만약 공신들은 물론 왕건도 이미 다 알고 있던 환선길의 불만을 잘 달래서 풀어나가는 식으로 대처했다면 반란을 일으키진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이흔암의 매부로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가 환씨였다고 하므로 이흔암이 환선길의 매부였거나 그 집안의 인척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어째서인지 관계가 역전되었다.

명대사(?)는

(이흔암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지가 않습니다."(...)[4]
  1. 신숭겸(언월도)과 함께 고유 무기를 가진 몇 안되는 무장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검을 사용했던 신숭겸과 달리 등장 초기부터 말년까지 줄곧 방천극을 들고 다닌다. 박술희는 철퇴를 잘 다룬다 하였지만, 비뇌성 전투 이후론 그냥 검을 들고 나온다. 다만 철퇴라는 무기 특성상, 검보다 다루기 어렵다. 드라마 촬영중에 있을 배우들의 부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모양.
  2. 싸움이라 기보다는 '검무(劍舞)를 빙자한 싸움'. 궁예 집권 초창기에 여러 지방세력가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환선길이 검무를 추며 이들에게 대놓고 검을 겨누었는데, 보다 못한 유금필이 맞수를 자청하고 나선다.
  3. 이전 항목에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했는데, 적어도 작중에서는 홍유, 배현경 등의 네 명 가운데 상을 받은 인물은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들이 일등공신에 책봉되는 것은 환선길 사후의 일.
  4. 제21화 中. 본래 이흔암과 자신은 양길의 수하였으나, 궁예에게 의탁하기 위해 일부러 궁예와 함께 전쟁터에 나서기를 자원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말이다. 확실히 이때만큼은 상황판단을 잘 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여기까지였다. 이후 이 둘은 상황파악 못하고 까불대다 왕건에게 쌍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다만 환선길과 이흔암은 먼저 까불었다기 보단, 정치적인 견제에 낚여서 숙청을 당한거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