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겸

卜智謙
(생몰년 미상)

1 일대기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로 초명은 사귀(沙貴) 또는 사괴(砂괴)이다.

배현경, 홍유,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추대한 4명의 마군장군 중 한명으로 거사 성공후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1]

다른 1등공신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전사한 신숭겸, 군졸이었다가 담력과 용맹이 남달라 출세한 배현경, 태조 원년부터 유금필과 함께 청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고창 전투에 참전하는 등 야전 지휘관으로서 확실한 군공이 전해지는 홍유에 비해 복지겸은 군공은 물론 종군기록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물론 거사전 복지겸의 직위가 마군장군이었으니 참전경력이 아예 없다는건 말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고려사나 다른 사료에 복지겸이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웠다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요즘으로 치면 기무사령관 겸 경호실장쯤 되겠다. 야전사령관으로 활동한 혁명동지들과는 달리 역성혁명 직후 혼란한 시기에 발생한 모든 반역 음모를 밝혀내며 왕건의 안정적인 권력승계에 기여했다.

마군장 환선길은 동생 향식(香寔)과 함께 왕건을 추대한 공으로 왕건을 보필하며 숙위(宿衛)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환선길의 아내가 “당신의 재주와 능력이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으며, 또 큰 공이 있는데도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고 부추기자 이에 넘어가, 일부 병사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실을 알아낸 복지겸은 왕건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왕건이 즉위한 지 겨우 4일이 지난 918년 6월에 환선길은 병사 50명을 거느린채 내정으로 뛰어들어와 왕건을 해치려 하다가 실패해 참수되었고 동생 향식도 도망가던 중 잡혀 죽었다.

여기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환선길의 처가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즉위후 겨우 4일 지나 아직 혼란한 정국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논공행상에 불만 품고 난을 일으킨다는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첫날 왕을 바꾸고 둘째날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셋째날 모의해서 넷째날 쳐들어갔으니...

이 때문에 환선길이 왕건의 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고 이흔암처럼[2] 궁예의 핵심적인 지지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심지어 그 모든것이 복지겸의 모략였다는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918년 9월에는 궁예가 904년 청주인 1,000여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킬 무렵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순군리(徇軍吏) 임춘길은 같은 청주사람 배총규, 계천(전남 장흥) 사람 강길ㆍ아차귀와 매곡(충북 회인) 사람 경종(景琮)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다 복지겸에게 발각되었고 도망친 배총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로잡혔다.

왕건의 측근 중 청주 출신인 현율은 경종의 매형이 후백제와의 접경지대인 매곡성주 공직임을 들어 이들을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염상의 반대로 모두 심문끝에 참수당했다. 이후 공직은 후백제에 투항해버렸고 그해 10월 청주에서 진선, 선장 형제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왕건의 대처도 신속해서 진성과 선장은 홍유와 유검필에게 척살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공직은 두 아들과 딸을 백제에 볼모로 보내고 그대로 백제에 투항해버렸고 이 바람에 매곡을 비롯하여 중북부의 요지들이 후백제에 무더기로 넘어가면서 아직 확실하게 기반을 다지지 못한 왕건은 한동안 후백제에 줄곧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복지겸의 활동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고려 건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동료 장군들에 밀려 이렇다할 공적을 세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며 성종 13년에 다른 개국공신 세 사람과 함께 태사 벼슬을 추증받고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2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배우는 길용우.[3]

초반에는 양길의 부하로 등장한다. 양길은 문무를 겸비한 은부와 복지겸을 가장 총애했는데, 사실상 복지겸이 양길의 책사 역할을 했다. 딴 마음을 먹고 양길에게 귀부한 궁예의 속셈을 눈치채고 양길에게 궁예를 경계할 것을 누차 진언하나 세력 확장에 눈이 먼 양길은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양길은 은부의 계략에 낚여 복지겸을 비롯한 주요 장수들을 죄다 궁예 휘하로 보내버리는데, 장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양길을 배반하는걸 반대하지만, 결국 궁예의 편이 된다. 물론 양길이 좋아서 그런건 아니고[4], 군주의 재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훤과 달리 폭군도 아닌 인물을 그냥 내칠 수 없어서 처음엔 반대했던 것. 이 때 만약 궁예가 백성들의 뜻을 저버릴때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원망하지 말라고 조건을 달았는데 결국 궁예가 말년에 미쳐 날뛰면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궁예 밑에서 맡은 역할은 군권을 총괄하는 병부령. 그렇다 보니 왕건이 궁예 밑에서 야전군 사령관일 당시에는 위계상 왕건의 상급자였다. 이 무렵의 장면을 보면 복지겸과 왕건은 상호 존대를 하긴 하지만 왕건이 좀 더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왕건이 시중이 되고, 종국엔 궁예 대신 황제가 되면서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기는 한다.

양길군 출신 장수중 유일하게 왕건 및 패서 호족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뭔가 일이 있을때마다 패서 호족(가령 유장자라거나)들과 의논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 때문에 궁예 암살미수 사건 당시 종간은 복지겸 역시 살생부에 올렸다. 물론 궁예가 깨어나면서 무사히 넘어갔지만. 또한 군권을 총괄하는 병부령이다보니, 궁예가 혼수상태에 빠져있을때 강장자가 찾아와서는 다음 황위 얘기를 꺼낸적도 있었다. 물론 너무나 어이없고 위험한 일인이자 복지겸은 강장자의 말을 듣는걸 거부했지만.

다른 장수들에 비해 높으신 분이긴 했지만, 워낙 내군의 견제와 감시도 많이 받는데다, 궁예가 무리한 요구[5]를 할 뿐만 아니라, 철원에 있다보니 궁예의 리얼타임 킬링 쇼를 자주보게 되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습을 보인다. 차라리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전쟁터 나가서 싸우는게 더 좋았다고 한탄할정도(84회) 이후 궁예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변경하면서 복지겸은 마군장수로 좌천당했지만, 어자피 복지겸은 병부령 자리에 앉아있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관계로 오히려 좌천당한 걸 좋아한다.

왕건의 역성혁명때는 4기장(복지겸, 신숭겸, 홍유, 배현경) 중에서도 리더 역할을 맡아 동지들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병부령 원극유와 내군출신인 염상을 포섭해 혁명군이 내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모을수 있도록 했다. 이후엔 내군장군을 역임하면서 환선길, 임춘길 등의 반역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후로는 왕건을 항상 곁에서 보필하며 내부를 단속하고 전장상황이나 주어진 정보들을 취합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한 공산전투에서는 왕건을 무사히 고려까지 모셔다 드리는 역할을 수행하며, 일리천 전투까지 참전 후 후삼국 통일을 지켜본다. 그러나 역사서에 전공 관련 기록이 없는 것을 반영해서인지 빅 이벤트가 아닌 이상 어지간해서는 야전으로 나가지 않는 장군(...).

다른 동료들이 거칠고 과격한 이미지였다면 본편의 복지겸은 그야말로 지장의 모습으로 나온다. 문무를 겸비해 그가 처음으로 섬겼던 양길도 그를 매우 아꼈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싸움에서도 직접 싸운 상대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홍유, 배현경 급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흔암과 싸워서 비겼다.

의리를 중시하는 편인 만큼, 양길의 딸인 미향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장수(가령 환선길, 이흔암 등)들이 미향을 내칠 것을 주장해도 유일하게 복지겸은 미향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지킬 것을 주장했으며, 궁예가 새로 황후를 들일 때, 유일하게 미향을 찾아가서 미향을 위로하기도 했다. 거기다 미향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때, 속으로 미향의 명복을 빌기도 한다. 다만 28회에서 양길과 싸울 때 양길이 복지겸에게 네 놈만을 믿었건만 이라고 외치자, 복지겸은 '다 당신의 욕심 때문이오!'라고 맞 받아치는거 봐서는, 양길의 몰락은 자업자득으로 여기는 모양. 그러나 똑같이 옛 주군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미향은 의리로 끝까지 모셨는데도 궁예의 아들[6]은 후환이 될 테니 죽이라고 간언하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랑타령이 넘쳐나는 요즘 드라마 같았으면 주군의 따님과의 로맨스 운운하는 팬들의 망상이 폭주했을 것이다 드라마가 장기화되면서 나온 캐릭터 붕괴인지, 아니면 주인공 보정으로 왕건의 인품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인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여담이지만 왕의 친위대장격인 내군장군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전장에서 왕건 다음으로 갑옷이 화려하다. 그래서 적에게 눈에 잘 띄인다. 그런데 잘 보면 이 갑옷은 제1화에서 철원성 성주가 입던 갑옷의 재활용이다.

마지막 회(200회)에서 어쩌다 보니 왕건의 얼굴과 함께 맨 마지막 장면에 찍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1. 왕건은 역성혁명 성공이후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 4명, 2등공신에 염상, 김락 등 7명, 3등공신은 각지의 군웅들 포함 무려 2천명을 책봉했다.
  2. 웅주를 지키던 이흔암은 왕건 즉위후 도성에 올라와 있다가 같은해 8월, 복지겸과 함께 반역자 색출에 열을 올리던 수의형대령 염상에게 걸려서 일가가 몰살당했다.
  3. 대조영에서 보장왕, 삼국기에서 의자왕 역할을 맡았다.망국의 왕 전문배우
  4. 아예 궁예가 독립하기 전에, 은부가 복지겸에게 대놓고 양길을 깠지만, 복지겸은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복지겸 역시 양길이 군주가 될 인물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던 모양.
  5. 백제 및 신라와 전쟁중이고, 천도 및 잇따른 가뭄등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나고, 세금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궁예는 북벌을 준비한다며 부역과 세금을 배로 늘려버린다. 그리고 계획이 진전이 안되면 책임자를 엄벌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6. 역성혁명 직전에 강비가 출산한 궁예의 아들. 이름은 '순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