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이 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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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35)

미국의 정치가.

풀네임은 휴이 피어스 롱 쥬니어로 1893년 미국 루이지애나배턴루지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세일즈맨을 하면서 돈을 모은뒤 오클라호마 뱁티스트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변호사가 된 후 정치에 관심을 두고 대기업들을 공격해 정치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24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낙선한뒤 4년동안 열심히 표밭을 일구어서 1928년 선거에서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당당히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롱은 적극적인 실업자 구제를 위해 고속도로, 아스팔트 포장도로, 신규 교량 건설을 시행했다. 하지만 주의 적자가 10배나 불어났는데 이는 건설사업 과정에서 각종 뇌물수수 밑 리베이트등의 비용들까지 추가된 탓이었다.

자칫 주지사에서 쫓겨날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롱은 주의회 의원들을 구워 삶아서(당연히 돈으로 삶았다) 주의회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롱의 입김은 심지어 주지사가 관여하기 어려운 주 사법부나 교육기관에까지 미쳐서 사실상 루이지애나를 쥐고 흔들게 되었다.

1929년, 재정적자를 타개할 요량으로 석유회사 스탠다드에 중과세를 부과하려 했다. 주 하원이 이에 반발해서 롱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롱은 매수와 협박으로 이를 부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추진한 롱은 1932년, 자신의 수하인 오스카 K 알렌을 루이지애나 주지사로 당선시키고 자신은 뒤에서 루이지애나를 계속 쥐고 흔들었다. 한편으로 루이지애나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초 롱은 32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지지했지만 롱의 급진적인 정책을 내심 못마땅해한 루즈벨트가 롱과 거리를 두려고 하자 루즈벨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1936년 대선에는 본인이 직접 출마하려고 구상했다.

적이 많았던 롱은 항상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다니며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본거지인 루이지애나에서 연방판사 벤자민 페이 리가 급부상하자 페이 리를 견제하기 위해 주법을 개정했고 이에 분개한 페이 리의 사위이자 의사였던 콜 와이즈가 1935년 9월 8일, 루이지애나 주의회 의사당 건물에서 롱을 저격했다. 콜 와이즈는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롱은 이틀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결국 사망했다. 롱의 장례식에는 무려 10만여명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그를 애도했다고 한다.

미국 역사상 몇손가락 안에 들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로 꼽히는 롱의 모토는 "모든 사람이 "(Every Man a King)이었다. 세계 대공황의 불황 가운데 롱은 모든 사람이 왕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서 부의 재분배 정책을 주장했다. 물론 롱은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롱의 주장은 정부가 나서서 대기업의 부를 국민들에게 분배한다는 정책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롱의 정책은 국가사회주의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다. 근데 이 이름 너무 나치필 나잖아 역사학계에서는 "미국사상 주류 정계에 진출 했던 최고의 거물급 진보주의자"나 "미국에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 시키려고 했던 남자" 등 엇갈리는 평을 내리고 있다.

롱이 만약 암살되지 않고 미국 민주당 대선경선에 뛰어들었다면 어찌되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물론 루즈벨트라는 산을 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롱의 암살에 음모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롱이 유력한 대선주자였기 때문에 암살당한 것이라는 주장이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건 아니다.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롱이 암살되지 않고 1936년 대선에 출마한다고 나온다. 물론 민주당 경선에선 루즈벨트가 재선후보로 나섰기 때문에 여기에 반발해 민주당을 탈당해 출마한다는 가상 시나리오다(...) 근데 정작 루스벨트는 후보 되자마자 암살당했다(...) 거기다 당선이 안되면 남부맹방 짝퉁 남부에 북미연합을 만들어 내전을 일으킨다(...) 흠좀무.

롱의 모토였던 "모든 사람이 왕"은 롱의 생애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1949년2006년에 영화화 되었는데 2006년 작에는 숀 펜이 롱 역으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