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민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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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

1950-60년대에 일어난 아메리카 흑인들의 차별철폐 및 투표권 획득을 위한 일련의 운동.[1]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20세기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투쟁이자 시민 불복종 운동 중 하나로 꼽힌다.

흑인민권운동의 주제가격 노래였던 This little light of mine.

2 배경

흑인민권운동의 배경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노예제로부터 시작한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노예제는 세계적으로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장되어 가는 상황이었으나 미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목화농업이 주 산업이던 미국 남부주들은 노예제를 고수하려 했고 이로 인해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기실 노예제는 경제적으로 그리 큰 효용성이 없었으나 미국 남부주들은 노예제를 남부주들의 문화적 전통이자 자존심으로 여겨서 고수하려 한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1 노예해방과 자유를 획득한 흑인

1862년 9월 22일, 앤티덤 전투 며칠 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다. 흑인들은 미국 수정헌법을 통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는 흑인들도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남부의 흑인들은 선거에 참여할수 있었으며, 투표권도 행사할수 있었다. 사상 최초로 미시시피주에서 하이럼 로즈 레블즈가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조지프 레이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는 등 흑인 정치인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흑인들은 2명의 연방 상원의원과 14명의 연방 하원의원, 수백명의 주의회 의원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2.2 짐 크로 법안과 박탈된 흑인의 권리

1877년,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이 철수하면서 흑인들에게 악몽이 시작되었다. 연방군의 진주기간중에는 눈치를 보던 남부주들이 연방군이 철수하자마자 흑인들의 권리를 박탈하기 시작했다.

소위 짐 크로 법안이라 불리는 말도 안되는 법안들이 남부주들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짐 크로는 1830년대 한 백인배우가 만들어낸 흑인 캐릭터로 게으르고 바보스러운 캐릭터였다. 여기에서 유래한 짐 크로 법안들은 흑인들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법안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박탈된 권리는 투표권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권이 없다는 건 자신들을 대변할 대표자를 뽑을 수 없다는것을 의미했다. 미시시피 주는 1890년, 소위 문맹검사제란 걸 도입하면서 흑인 투표권 박탈의 서막을 올렸다. 투표권자로 명부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문맹검사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문맹검사란것은 실로 가관스러웠다. 말도 안되는 문제를 내거나 헌법을 읽고 해석하거나, 심지어는 라틴어를 읽고 해석하라는 문제까지 출제되었다. 반면 백인들에게는 한없이 쉬운 문제를 냈다. 예를 들면 고양이의 철자를 쓰시오라는 것과 같은.(...)

게다가 설령 문맹검사를 통과한다 쳐도, 인두세 영수증이 없으면 아예 투표소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인두세는 2달러였는데, 저소득층에 속하던 흑인들에겐 엄청난 돈이었다. 결국 흑인들은 투표권자로 등록되지 못하면서 선거에서 소외되었다.

이런 투표권 박탈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어(...) 루이지애나 주의 경우 1896년에 95.6%던 흑인 투표권자가 10년도 안되는 1904년에 불과 1.1%까지 떨어졌다. 흑인들을 가장 극렬하게 차별한 미시시피 주의 경우 20세기가 되기도 전에 흑인 투표권자 0%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남부주들에서는 더이상 의회에서 흑인 의원을 찾아볼수 없었다. 흑인을 대변하고 보호할 정치인이 사라지자 백인들은 마음껏 흑인들의 권리를 짓밟기 시작했다. 후일 아파르트헤이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흑백분리가 남부주들에서 공식화 되었던것이다. 예를 들어 식당은 백인전용 식당과 유색인 전용 식당으로 나누어서 흑인이 백인전용식당에 들어가면 폭행을 당하거나 감옥에 들어가도 항의할수 없었다. 심지어 백인이 반대편에서 다가오면 흑인은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야 했으며 만약 흑인이 차도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폭행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미국 남부주들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물론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흑인들이 저항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과 소위 KKK로 불린 백인우월주의자 민병대들의 친목질 유착으로 흑인들의 저항은 벽에 부딫쳤다. KKK단은 저항적이거나 거슬리는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해 처단했으며 경찰은 이런 KKK단의 전횡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겨버리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유명한 흑인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이런 남부의 현실을 그린 Strange fruit(이상한 열매)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남부의 나무에선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네. 이파리에도 뿌리에도 피가 가득하다네.라는 가사는 매우 충격적으로 이런 흑인들에 대한 린치를 그리고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 "이상한 열매"

3 저항

20세기에 이르자 흑인 젊은이들은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노예생활을 경험했던 세대들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에 순응하고 살았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런 가운데 20세기에 흑인 차별은 여러 가지로 점점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흑백차별에 틈이 생긴 공간은 군대였다. 1,2차 세계대전에 미국은 많은 미군을 파병해야 했고 자연히 흑인들도 참전하게 되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법적으로 흑인 차별이 완화되어갔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중요한 두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첫째는 법무성에 민권 담당부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군대내에서 흑백차별을 공식적으로 금지한것이었다. 물론 이것들이 즉각 효과를 나타낸 건 아니었으나 이런 조치들은 후일 흑인민권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2차 대전의 전쟁영웅이기도 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트루먼의 조치들을 이어받았다. 흑백차별 조치를 완화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의 통치기간중 흑백차별을 무너뜨리기게 되는 단초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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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피 위 리즈

또한 스포츠에서도 중요한 흐름이 나타났다. 이때까지 흑인들은 메이저리그에서 뛸수 없었고 흑인들만의 리그인 니그로리그에서 뛸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인 브랜치 리키는 과감하게 흑인 선수를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는데 그가 바로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이었다. 리키가 로빈슨을 데뷔시킨 시점은 1947년으로 시대를 앞서간 과감한 조치였다.[2] 로빈슨의 활약으로 미국의 다른 야구팀들도 흑인 선수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적 흐름들은 점점 흑백차별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저항의 기원,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1954)

이런 가운데, 하나의 소송이 미국사회에 흑백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한 흑인소녀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1951년, 캔자스 주 토피카에 살던 린다 브라운이라는 소녀는 집에서 바로 가까운 섬너 초등학교를 놔두고 1마일이나 떨어진 흑인전용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은 딸을 가까운 섬너 초로 전학시키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흑인은 백인전용 학교에 다닐수 없다라는 이유때문이었다.

이 당시 미국은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원칙을 고수했다.[3] 즉,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교육에서도 이런 원칙이 고수되어 흑인과 백인은 따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나 올리버 브라운은 바로 앞에 있는 학교에 다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전미 유색인 연합(NAACP)의 도움을 받아 연방대법원에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고소하기에 이른다.

물론 올리버 브라운 이전에서 흑백분리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송은 여러번 제기된바 있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재판[4] 에서 흑인과 백인이 분리됨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고 이후 미국 법정은 흑백차별에 대한 재판마다 플래시 대 퍼거슨 재판의 판례에 기반하여 흑백분리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청구인측 변호인인 서굿 마셜은 기존의 흑백분리 재판과는 다른 전략을 구사하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한것이다.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되 시설과 교육면에서 평등하게 대우하면 문제가 없다는 주류적 생각과는 달리 미국 사회과학은 이미 흑백분리는 사회과학적으로 볼 때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마셜은 이런 사회과학자들의 광범위한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흑백분리의 무용성을 설득력있게 주장했던 것.

결국 1954년 5월 17일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과 대법관들은 공립학교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며 모든 공립학교는 흑백분리 교육을 시정하고 통합하라라는 판결을 내린다. 특히 워런 대법관은 마셜이 제출한 광범위한 사회과학 연구를 수용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제11번 각주"에 인용된 내용이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의 판결은 미국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일부 주들은 흑인 밀집지역의 흑인학생들을 백인전용 학교로 실어나르면서 판결을 수용했으나 남부주들은 이 판결을 씹어버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조차도 수백년동안의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힘들다면서 대법원 판결 시행을 거부하는 주정부들에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5]1950년대 후반까지도 흑인 어린이중 단 1%만이 흑백통합 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이 판결에 대한 저항은 엄청났다. 또한 판결이 공립학교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사립학교들은 적용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은 미국사회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것은 공립학교에서 흑백분리가 위헌이라면 다른 부분에서도 흑백분리는 위헌이 아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한것이다. 결국 이는 이어질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과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 사태에서 중대한 작용을 하게 된다.

3.2 저항의 시작, 로자 파크스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19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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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몽고메리에 살던 여성 로자 파크스는 직장인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일을 마친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앨라배마주는 남부주인지라 흑백분리가 일상화된 지역이었다. 버스에서도 백인전용 좌석과 흑인전용 좌석이 분리되어 있었다. 관례적으로 앞 네 줄은 백인전용이란것이 통용되던 원칙이었다. 버스가 다 차지 않는다면 흑인들은 버스 중간 좌석에 타도 무방했으나 백인이 요구하면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로자가 탄 버스에 백인들이 많이 타게 되면서 버스기사는 유색인 전용 표시를 로자가 탄 좌석 뒤편으로 밀어버린후 로자를 비롯한 네 명의 흑인 승객들에게 뒤편으로 갈것을 요구했다. 세명의 흑인 승객들은 이 요구에 뒤로 이동했지만 로자는 이를 거부했다. 버스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자는 흑백분리에 관한 몽고메리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6]

경찰 조사에서 로자가 앉아있던 곳이 원래 유색인 전용 좌석이란 점이 감안되어 그녀는 저녁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건으로 인해 행동할것을 결심했다. 로자의 친구인 E.D 닉스는 앨라배마 주립대학 교수인 조안 로빈슨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문의한후 보이콧 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3만 5천여 장의 버스 보이콧 유인물을 만든후 이를 몽고메리 전역에 살포했다.

12월 4일에 이르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교회들에게 알려졌고 몽고메리의 흑인교회들은 잇달아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할 것을 선언했다. 이들의 요구조건은

1. 버스에서 흑인이 평등하게 존중받을 것
2. 흑인 운전기사를 고용할 것
3. 먼저 탄 순서대로 버스 중간 좌석을 앉을수 있게 할 것

이었다. 흑인교회들은 다음날인 12월 5일 하룻동안 버스 탑승을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흑인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직장까지 걸어다녔으며 버스는 대부분의 좌석이 텅텅빈 채로 운행했다. 하룻동안의 투쟁후 향후 투쟁방안이 논의되었고 "몽고메리 진보협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에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의 목사가 뽑혔는데 그가 바로 흑인민권운동의 상징적 인물 마틴 루서 킹이었다.

이후 흑인들은 대대적으로 버스 보이콧을 전개해 나갔다. 일련의 사태에 앨라배마주는 로자 파크스를 불법적으로 보이콧을 행하고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기소했고 법정은 그녀에게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비용을 물도록 판결했다. 당시 흑인들의 경제력으로 14달러라는 벌금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고 로자에 대한 판결은 흑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여 버스 보이콧의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 5만에 달하는 흑인들이 버스 보이콧에 동참했다.

짐승 같은 압제의 발길에 걷어차이고 사는 건 지긋지긋하다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할 때가 왔다. - 마틴 루서 킹.

앨라배마주는 이런 사태에 당황했고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을 체포하고 참가자들을 탄압하며 강경하게 나섰다. 로자 파크스와 그녀의 남편은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참가자들도 해고되거나 해고위협을 받았다. 심지어 일부 자가용을 소유해 카풀로 이 운동에 참여하던 흑인들에게 앨라배마 주정부는 자가용 면허를 말소하거나 자동차 보험을 취소하는 등의 조치로 온갖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심지어 운동을 주도하던 킹 목사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전 미국에 버스 보이콧 운동이 TV전파를 타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의 버스회사들은 무려 65%에 달하는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경제력있는 백인과는 달리 흑인들은 대부분 버스를 이용했는데 몽고메리 버스 승객중 75%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때와 마찬가지로 NAACP와 흑인 민권운동가들은 연방대법원에 버스에서의 흑백분리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1956년, 연방대법원은 "버스에서의 흑백분리는 위헌이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엄청난 손실을 입은 몽고메리 버스회사들의 아우성에 결국 앨라배마주는 백기를 들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민권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었고 이후 흑인민권운동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3.3 리틀록 센트럴 하이스쿨과 리틀록 9인의 저항(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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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군의 보호를 받으며 등교하는 리틀록 9인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공립학교의 흑백차별의 위헌판결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대다수의 흑인 학생들은 흑인전용 학교에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마저 흑인 어린이들은 흑인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이렇게 되자 전미 유색인 연합(NAACP)은 대담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백인전용 학교에 흑인학생들을 입학시켜 흑백차별의 공고한 벽을 깨부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NAACP는 이 계획을 실행할 곳으로 아칸소주의 리틀록에 있는 센트럴 하이스쿨을 선택했다. 그리고 9명의 흑인 학생들을 센트럴 하이스쿨에 지원하도록 도왔다. 이들은 어니스트 그린(Ernest Green, 1941년~), 엘리자베스 엑퍼드(Elizabeth Eckford, 1941년~), 제퍼슨 토머스(Jefferson Thomas, 1942년-2010년), 테런스 로버츠(Terrence Roberts, 1941년~), 칼로타 월스 라니어(Carlotta Walls LaNier, 1942년~), 미니진 브라운(Minnijean Brown, 1941년~), 글로리아 레이 칼마크(Gloria Ray Karlmark, 1942년~), 텔마 머더셰드(Thelma Mothershed, 1940년~), 멜바 빌스(Melba Beals, 1941년~)로 이들을 가리켜 리틀록 9인이라 부른다.[7]

리틀록 교육위원회는 흑백통합교육 시행을 선언했고 1957년 9월 2일부터 이를 시행하기로 했다. 리틀록 9인에 대한 입학도 허가되어 이들은 학교에 등교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등교는 백인들의 거센 저항을 부르게 된다. 리틀록의 백인우월주의자들과 백인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 흑인들이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면서 리틀록 9인이 등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칸소 주지사인 오벌 포버스도 흑백통합교육을 용납할수 없다면서 주방위군을 동원해 리틀록 9인의 등교를 차단했다.

이렇게 되자 NAACP는 연방항소법원에 아칸소주를 고소했고 연방항소법원은 "흑백통합교육 시행을 막을수 없다"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오벌 포버스는 판결의 시행을 거부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결국 9월 14일, 아이젠하워와 포버스는 사태 해결을 위한 회담을 열어 논의를 거듭했으나 합의에 이르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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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폭도들에게 고립된 엘리자베스 엑퍼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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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사 포버스씨, 우리의 개신교 미국을 지켜주세요>, <인종 혼합은 공산주의다!>

9월 23일,백인 폭도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리틀록 9인에 대한 위해를 가하려 했다. FBI를 통해 위급상황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결국 결단을 내린다. 리틀록 시민들에게 리틀록 9인에 대한 위해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한후, 연방군을 투입해 학교를 차단하고 있던 아칸소 주방위군을 연방군 지휘하에 두도록 했다. 이에따라 미 연방육군 101공수사단이 리틀록으로 출동해 아칸소 주방위군을 통제한후 리틀록 9인을 보호해 학교에 등교하도록 했다.

비록 아이젠하워는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결과를 따르지 않는 주들에게 압력을 넣지 않았으나 리틀록에서 보여준 그의 결단은 흑백통합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리틀록 9인은 제101공수사단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학교운동장에 주둔하여 이들을 보호했다. 이런 호위는 반년간 지속되었다. 이후에는 리틀록 9인들만 등교를 했지만 근방에 101 공수사단이 주둔해 언제든지 위급상황이 오면 출동하도록 대기했다.

리틀록 9인들은 백인 학생들의 온갖 멸시와 차별을 당했다. 살해협박은 우스운 수준이고, 실제로 다이너마이트 막대에 불을 붙여 던진 후 학생들을 살해하려던 시도도 폭도들에 의해 꾸준히 일어났다. 학교 밖에서도 이런데 학교 안에서 다른 백인 학생들의 대우는...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무자비한 핍박을 견뎌내며 리틀록 9인은 학교에 다녔고 마침내 1년간의 노력끝에 리틀록 9인중 한명인 어니스트 그린이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 최초의 흑인 졸업생이 되었다. 하지만 어니스트 그린이 졸업한 후에 오벌 포버스는 센트럴 고등학교의 문을 닫으면서까지 남은 흑인학생들이 졸업하는걸 막았다. 결국 1960년에 다시 문을 연 후에 졸업한 칼로타와 제퍼슨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다른 학교에서 졸업해야만 했다. 참고 도서로는 리틀록 9인의 한명인 멜바 빌스가 쓴 "전사는 울지 않는다"를 읽어보는것을 추천한다. 그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3.4 위험한 저항, 싯인 운동(195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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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오클라호마주 그린스보로의 백인전용식당 울워스에서 벌어진 싯인 운동

흑백차별과 인종분리에 대한 저항은 백인전용식당에서도 일어났다. 소위 싯인(Sit in) 운동이 일어난것. 본래 싯인이라는 말 자체는 어떤 장소에서 하는 연좌농성을 일컫는 말이다.

싯인 운동의 핵심은 흑인이 백인전용식당에 들어가 앉아서 주문을 하는것이었다. 얼핏 단순해보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앉아있는 곳이 백인전용식당이란 점이었다. 식당주인이나 점원은 당연히 흑인들에게 음식을 내오는 걸 거부했고 흑인 운동가들과 청년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운동이었던지라 대단히 위험한 운동이기도 했다. 당장 흑인이 백인전용식당에 들어가는것 부터 백인들의 공격을 받을수 있었고 설령 앉았다 해도 역시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백인들은 거세게 반응하며 자리에 앉은 흑인들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거나 구타를 가했으며 흑인들을 질질끌고 식당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흑인 운동가들과 청년들은 무지막지한 폭력과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운동을 이어나갔다.

최초의 싯인 운동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월 20일, 메릴랜드볼티모어에 있는 리즈 약국(Read's Drug Store)에서 인종분리에 저항하기 위해 모건 주립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코어라는 단체가 리즈 약국에 들어가 싯인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 이들은 30분정도 리즈 약국에 머물렀고 평화적 방식으로 시위를 진행했다.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지 않았고 이틀후 결국 리즈 약국은 인종차별조치를 철폐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리즈 약국 싯인은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2년뒤인 1957년 6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더럼에서 싯인 운동이 일어났다. 로열 아이스크림이라는 가게에서 벌어진 운동은 흑인목사 더글러스 E.무어[9]가 이끄는 시위대가 로열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무어목사를 포함한 7명의 시위대는 백인전용좌석에 앉았고 가게주인은 7명에게 백인전용좌석이니 일어나 달라고 요구했으나 무어 목사와 시위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가게주인은 경찰에 신고했고 7명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의 기소로 이들은 재판을 받았고 불법침입혐의로 10달러의 벌금을 판결했다. 그러나 무어목사와 시위대는 더럼 카운티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7월 16일, 고등법원은 불과 30분도 안되는 심의를 거쳐서 오히려 1심보다 더 무거운 25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후 무어목사는 더럼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싯인 운동에 대한 최초의 공권력의 법적 처벌이 이뤄진 사건이기도 했다.[10]

더럼 로열 아이스크림 싯인 운동은 흑인민권운동의 노선을 두고 논란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NAACP(전미 유색인 연합)은 법적투쟁을 통한 흑인민권 신장이란 투쟁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싯인 운동은 백인들의 거센 반발을 부를수 있었고 온건한 법정투쟁 노선에도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흑인사회 내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싯인 운동은 기본적으로 비폭력 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에선 흑인민권운동의 유용한 투쟁수단이 됨이 입증되었다.

이후 1958년 캔자스주 위치타에서 싯인 운동이 벌어졌다. 위치타의 NAACP 청년위원회 회장이었던 론 월터스는 자신의 사촌인 캐럴 팍스 한과 함께 백인전용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주문했다. 점원이 백인전용식당이므로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하자 그들은 하루내내 식당에 앉아있었고 백인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3.5 프리덤 라이더(1961)

민권운동가와 대학생들이 흑백분리에 반대해 이것을 없애기 위해 흑인학생과 백인학생이 함께 장거리 버스를 타고 미국 남부 지역을 순회하는 프리덤 라이더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여러곳에서 폭행을 당하고 kkk단과 무리들에게 화염병으로 버스가 불태워지고 심지어 이들을 지켜줘야 할 경찰들은 수수방관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권운동가들은 끓임없이 활동했다.

3.6 워싱턴 행진(1963)

1963년 흑인지도자들 중 한명이었던 A.필립 랜돌프는 전 운동세력을 광범위한 전선에 결집시킬 수 있는 강력한 행동으로 워싱턴 행진을 제안했다. 그러자 흑인의 능력과 ,자제심 . 규율성을 믿고 집회를 추진하자는 쪽과 그런 엄청난 집회를 하기에는 흑인의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쪽으로 갈렸는데 그러나 찬성파의 열기가 더 강해 워싱턴 행진 강행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8월 28일 마침내 워싱턴에서 총집결한 흑인과 이 운동에 동조하는 백인들이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에 도착해 모였고 그 수는 무려 25만 명이나 되었다. [11] [12] 킹은 27일 밤 10시에 워싱턴에 도착했고 28일 연단에 서서 연설을 하게 될 때 본래 이 날을 위해 따로 준비한 원고가 있었지만, 수많은 인파를 보자 마음이 바뀌어 평소 그가 즐겨 하던 연설을 했다고 한다 . 그것이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이다. 이 워싱턴 행진은 진지한 활동을 하고 있는 흑인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전국의 미국인들이 보게 되었으며 흑인들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방송되었다.

3.7 미시시피 자유여름(1964)

1964년 미국의회는 남부출신 상원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교육,주택, 접객업소, 직장등에서 흑인차별을 금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방기구까지 만들어졌지만 아직까지도 투표권은 행사되지 못하고 있었다. 민권운동가들은 투표권에 주목했고 1964년 6월 미시시피 자유여름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에는 무려 천여명의 백인 대학생들이 흑인의 유권자 등록을 돕기 위해 미시시피로 내려왔다.

3.7.1 미시시피 버닝, 희생된 민권운동가 3인

그러다가 선발대로 내려간 민권 운동가 3명[13]이 6월 22일 미시시피 내셔널카운티에서 실종되었다. 실종 44일만에 그들은 싸늘한 시체로 댐에서 발견되었다. 시체에는 구타와 함께 총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죽음을 계기로 더더욱 더 미시시피 자유여름운동은 거세지게 된다. 미시시피 자유여름 운동이 진행되는 2달동안 흑인 6명이 살해되었고 천명이 체포되었으며 30채의 집이 폭탄공격을 당했다. 30여채의 흑인교회가 불길에 휩싸였다. 미시시피 자유여름에 관한 도서로는 "프리덤 서머, 1964"가 있다.

3.8 뉴올리언스 풋볼 리그 보이콧(1965)

3.9 셀마운동, 전환점이 되다(1965)

1965년 3월 7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 시. 600여 명의 흑인들이 80번 고속도로를 걷고 있었다. "흑인도 투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몽고메리 시까지 행진에 나선 것. 셀마 시는 남북 전쟁 당시 노예 해방에 반대했던 남군이 마지막까지 북군과 맞서 싸운 도시로, 흑인 차별이 심했다. 이 때문에 도시 인구 절반을 차지하는 흑인은 헌법에 보장된 투표 권리도 가질 수 없었다.

흑인들의 시위 행진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최루 가스와 몽둥이였다. 경찰이 시위대를 폭행했고 부상자가 잇따라 발생했다. 분노한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셀마 시로 내려갔다. 이틀 뒤인 9일, 킹 목사가 주도하는 2차 시위가 열렸다. 이번엔 시위 참석자 한 명이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같은 달 21일에 예정된 3차 행진에서 또 한 번의 폭력 사태가 우려됐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연방 군인 2000명을 파견해 시위대를 보호했다. 마침내 킹 목사가 이끄는 2만 5000여 명의 시위대는 나흘 후 몽고메리 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3.10 미국의 약속, 마침내 쟁취한 투표권(1965)

마침내 1965년에는 연방 투표권법이 통과되어 존슨 대통령의 법 서명식에 마틴 루터 킹 박사가 참석했다. 이 법의 주요 골자는. 미국 수정 헌법 제15조에 반향하여 이 법안은 주와 지방 정부로부터 선거 자격을 한정하거나, 투표에 필요한 요건, 표준, 관행, 또는 절차를 요구하는 것을 금지시킨 법안으로 인종이나 얼굴색 때문에 미국의 시민의 권리로 선거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정하거나, 줄이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또한 그 법의 중요한 집행 수단으로는 역사적으로 흑인 참정권을 방해했던 주들이나 군들이 선거법이나 정책을 변경하려 할 경우 연방 법무부나 연방법원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게 되었다.

3.11 주거 운동(1966~1968)

3.12 민권법 개정안 통과(1968)

4 의의 및 영향

흑인민권운동은 이후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사회적 인종차별 완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물론 완전히 인종 갈등이 가라앉지는 않아서 이후 수많은 인종 폭동들이 일어나기도 했다.(LA 흑인 폭동)

5 여담

흑인민권운동 당시 대표적인 운동가이던 마틴 루서 킹과 멜컴 X는 노선에서 세부적인 차이를 보였다.

6 창작물

6.1 오페라

6.2 다큐멘터리

EBS 다큐멘터리 강대국의 비밀 5편 미국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흑인민권운동을 통해 본, 미국의 인종에 대한 관용정신이 현재의 미국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 링크

6.3 영화

6.4 소설

6.5 만화

6.6 드라마

6.7 애니메이션

7 관련 운동 조직

8 개별 운동 참여인

  1. 1860년대부터 1890년대, 189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도 이런 민권 운동은 존재했으나 이 시기에 일어난 운동의 파급력이 매우 높으므로 사람들은 50, 60년대에 일어난 흑인민권운동을 많이 떠올린다.
  2. 이때 피 위 리즈의 저 유명한 로빈슨 어깨동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피 위 리즈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한게 맞다.
  3. ...라고는 하지만, 사진 자료들만 살펴봐도 그냥 눈 가리고 아웅식 논리일 뿐 실제로는 취급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유색인종 전용이라고 해도 우선권은 백인에게 있는 등 말만 평등하게였지 분리하고 불평등하게나 다름없었다.
  4. 8분의 7 백인혈통, 8분의 1 흑인혈통이던 흑백혼혈 호머 플래시란 사람이 백인전용 객실에 타고 있다가 차장에게 적발되어 흑인전용 객실로 쫓겨난일이 있었다. 플래시는 이에 격분해 루이지애나주 법원에 이를 고소했으나 패소하자 다시 연방대법원에 자신에게 패소판결을 내린 루이지애나주 법관 존 하워드 퍼거슨을 고소했다. 그래서 플래시 대 퍼거슨 재판이라 부른다.
  5. 다만 이런 아이젠하워의 행동이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아이젠하워와 워렌 간의 관계에서 나왔다는 설이 꽤 유력하다.
  6. 이런 사례는 로자만 겪은 건 아니다. 흑인 최초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도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단 이유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7. 대법원 소송. 이에 지역 백인 사회는 격렬한 반발을 하면 온갖 협박을 다 한다.원래 11인의 흑인 학생들이 참여했으나 결국 2인은 중도 포기. 등교후 결국 이들은 졸업장을 받았는데,이때도 백인들의 살해 협박..오죽하면 교장이 이들에게 안전을 위해 졸업식에 오지 말 것을 부탁했다.
  8. 참고로 엑퍼드와 뒤에 고함을 지르고 있는 백인 여성 은 훗날 90년대에 인종차별 관련 강의가 있던 대학에서 같이 만나 서로 화해한다.이미 언론을 탄 후 북부주에서는 엄청난 항의 메일을 보냈다고..그후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지 생각하다가 가정을 꾸린 후 진심으로 반성을 했다고 한다.다른 가해자인 남성은 97년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직접 사과
  9. 마틴 루서 킹 목사와는 보스턴 신학대 동기였다.
  10. 다만 로열 아이스크림을 타깃으로 선택한 걸 두고 흑인사회 내부에서 논란이 일었다. 로열 아이스크림의 주인은 와스프가 아니고 그리스 이민자 출신 백인이었기 때문. 같은 백인중에서도 와스프계가 아니면 미묘하게 차별이 있었고 그리스와 동구권 출신 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1. 이 때 흑인들의 그 집회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대중폭동이 일어날 것이며 남부지역에서는 공공연히 보복적 폭력행위의 조짐을 보였다.
  12. 이 워싱턴 행진에서는 놀랍게도 백인교회도 참가했으며 미국노동총연맹과 산업별회의 전국협의회는 행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대신 중립을 선언했고 대신 수많은 국제노조들이 지지성명을 보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수천 개의 지역노동조합이 행진에 참여했다.
  13. 실종된 사람들은 백인이었던 마이클 슈워너와 ,앤드류 굿맨,미시시피의 흑인인권운동가였던 제임스 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