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글렌 하버트 굴드 |
이름(영문) | Glenn Herbert Gould |
출생지 | 토론토, 캐나다 |
생몰년도 | 1932년 9월 25일 ~ 1982년 10월 4일 |
1 소개
흔히 미국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피아니스트이다. 바흐에 능통한 거장이며,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명이다. 해외와 국내를 막론하고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 10명을 선정하는 기사에서 항상 들어가는 피아니스트이다.
매우 특이한 연주스타일과 성격으로 평생 괴짜라는 칭호를 달고살았던 연주자이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이 파티장에서도 장갑을 끼고 있는데 결벽증이 매우 심했다. 실제로 결벽증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을 갖고있던 피아니스트였고, 신경과에서 처방받았던 약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수트케이스에 늘 담고 다닌다는 루머가 있었을 정도였다.
2 어린 시절
토론토의 사우스우드가 32번지에 자리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굴드는 어린시절부터 천부적인 피아니스트였다. 갓 태어난 굴드가 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것을 보고, 의사가 '이 아이는 커서 피아니스트 아니면 의사가 되겠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남미 출신 피아니스트인 알베르토 게레로[1] 밑에서 배웠다. 글렌은 어린시절부터 은둔형 폐인끼가 충만했다. 그의 어린시절 친구인 로버트 풀포드는 '글렌은 어린시절부터 늘 혼자있기를 좋아했어요'라고 할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글렌은 머리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음악뿐만이 아니라 뭐든지 잘했다. 학창시절 그의 지능은 전설 수준이였고, 우리로 따지면 실력정석 기하와벡터 같은 걸 일주일만에 마스터하였다고 한다. 50분짜리 관현악을 한번 듣고서는 그대로 피아노로 연주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스펙을 지녔다는 모짜르트의 추정 아이큐가 160정도라고 한다. sd 15겟죠? sd 24로 바꾸면 196;;
3 데뷔
1955년도에 미국 음반회사인 CBS(콜롬비아)[2]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계기로 젊은 나이로 세계적인 거장반열에 올랐다. 당시 녹음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 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음반은 1955년에 녹음하여 1956년 출시되자마자 곧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후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이 오늘날까지 잘 팔리고 있다. 이는 엄청난 성공이였으며, 글렌의 주위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으나 조용하고 고독함을 즐기는 그에게는 힘든 점도 있었다. 그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듯이 갑자기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왔고, 글렌은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젊은 피아니스트가 한 순간에 세계적 거장 반열에 드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늘 고독함 속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즐기던 굴드에게 주위의 관심을 받고 세계의 무대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힘든 시련이였다. 그 시기에 굴드는 다양한 정신적-신체적 고통과 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30대에 은퇴를 선언했고, 무대활동보다는 녹음활동에 더 열중했다.[3][4] 사실상 30대 이후로 굴드는 20세기판 히키코모리나 다름없었다, 그의 음악은 원래부터 개성적이였지만, 30대 이후의 녹음을 들어보면 음악 초보자도 굴드 연주라는걸 알 수 있을정도로 완벽한 굴드표 녹음이라는걸 알 수 있다.
4 말년
쉰에 요절한 말년의 굴드는 정신상태 뿐만이 아니라 육체적 상태도 엉망이었다. 당시 10년만에 굴드를 방문한 굴드의 친구와 그의 아내는 굴드를 보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얼굴은 퉁퉁 붓고 피부는 죽은사람 같아서 젊었을 적의 미모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눈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굴드는 친구부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이미 그 당시 그는 음악작업 보다는 방송작업과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말그대로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수준이었다. 사실 굴드는 젊었을 적부터 자신이 피아노만 잘치는 사람보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모든 분야에 만능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었다. 당시 CBS스튜디오에서 가끔식 연주녹음 작업을 했는데, 죽기 몇 해전부터 굴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며 자신이 사교성이 없어서 친한 이가 거의 없기에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안 올 것이라며 말었다. 이렇게 매우 비관적으로 삶과 동시에 다시한번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고 싶었는지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세월동안 과다한 약물복용으로 인해 그의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고, 그의 말년 연주 동영상을 보면 손가락이 가끔식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게 약물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굴드의 일기에는 말년에 손가락의 이상을 호소하는 글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굴드는 재녹음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다시 한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81년에 녹음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사실 1982년, 굴드 사후에 발매되었다. 비평가 팀 페이지에 의하면 첫번째 골드베르크 녹음중에서 몇몇 부분이 굴드 맘에 들지 않았던 것도 재녹음의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5 죽음
1982년 9월 27일 굴드는 발작을 호소했다. 그의 비서가 의사를 불렀으나, 굴드의 비상 전화에 질린 의사는 그냥 응급실에나 가라고 했었지만, 병원을 매우 싫어하는[5] 굴드는 계속 버티다가 뒤늦게 병원에 갔으나 병원에서 어찌할 방법은 없었고 증상은 갈수록 악화되어 의식을 잃고 뇌사 상태에 이르자 아버지의 동의 하에 호흡기를 떼고 장례식을 치렀다.
굴드가 나고 자라고 생활하고 죽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골드베르크의 아리아의 처음 몇 마디가 각인되어 있다.
6 그의 음악적인 면
당대 최고의 명성을 지닌 바하 음악 스페셜리스트 답게 성부를 나눠 경중에 차등을 준 채로 선적인 흐름을 만드는 식의 바하음악에 필수불가결한 비상한 테크닉을 지녔다.[6][7] 이상하게도 낭만음악을 매우 싫어해서[8][9][10]낭만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런 식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19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독주 기악곡들은 다소의 베토벤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보잘 것 없는 실패작들이라 생각한다.이러한 일반화는 쇼팽, 리스트, 슈만...등에도 해당된다. 당신도 알다시피 초기 낭만파 작곡가들 중 어느 누구도 피아노곡 쓰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참, 그들은 페달 사용이나 극적 효과를 내는 것, 사방팔방으로 음들을 흩뿌려 놓는 것은 알았지만 진정한 곡다운 곡은 쓰여진 것이 별로 없다.
그 시기에 쓰여진 음악은 공허한 극적 제스처와 전시효과로 가득 차 있고, 세속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성향이 나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했다.
위대한 음악을 접할 때 내가 바라는 모든 기준이 되는 화성과 리듬의 다양성, 대위법적 창안은 이런 곡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선지 그의 레퍼토리에 말기 고전주의 곡, 초,중반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곡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현대 음악과 후기 낭만에 나타난 현대악파를 어느정도 표방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그 등의 피아노곡들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는데 피아노곡을 주로 작곡하지 않은 작곡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표방이라도 하는 듯 엄청나게 지겨운 곡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의 몇몇 안되는 고전,낭만주의 음반의 해석은 논란이 뜨겁다. 그가 연주한 그런 곡들의 속도는 대부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거나 전혀 말도 안되는 듯한 해석을 집어 넣기 일쑤여서 그 작곡가의 음악에 정통한 전문가들에게 욕을 밥먹듯이 먹는 건 양반이고 그를 매장시키려는 음악가 집단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가장 유명한 음반이 바흐 음반이 된 것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바흐 음반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대의 현재나 과거,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해석과도 일맥상통하지 않는 생명적이고 독창적인 해석과 그만이 낼 수 있는 미켄란젤리 같은 대가들과 비견되는 특이한 톤으로 많은 평론가들이나 매니아, 전문가들에게 바하를 연주할 때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절찬받는다.
헤럴드 쇤베르그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상당히 많이 참고했다.
추천 음반- 대부분 바흐의 곡,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유튜브에서는 1964,59,54년도 연주도 볼 수 있다. 55년도와 81년도 앨범도 존재.), 프랑스 조곡, 영국 조곡, 파르티타,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토카타, 리스트 편곡에 의한 베토벤 교향곡 5번(운명) 6번(전원)
모차르트-별로 평은 안 좋지만 소나타 10번의 경우 실황연주는 매우 아름답다. 굴드는 녹음된 음반보단 실황연주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구하기 어렵다. 실제로 레코딩들은 바흐 외에는 평가가 별로다. 게다가 굴드는 연주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어서 레코딩 도중에도 그 콧노래가 희미하게 녹음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사실 거의 모든 음반이 다 그렇다, 레코딩 회사는 허밍 지우느라 죽어난다..
낭만파 작곡가의 몇 안되는 레코딩 곡. 말그대로 클래식하게 연주해서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7 일화
1955년 6월 미국 뉴욕의 오래된 교회에 23세의 청년 피아니스트가 찾아왔다 한여름이었지만 외투에 베레모까지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의 장비에는 악보 뭉치 외에도 수건 묶음, 큰 생수 두 병, 서로 다른 색깔과 용도를 지닌 작은 알약 다섯 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반 녹음을 앞두고 언제나 몸을 움직이는가 하면, 흥분에 들떠서 지휘를 하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발레를 하기도 했다 비스킷을 우걱우걱 씹어먹기도 했다.
글렌 굴드의 1955년 첫번째 레코딩 때의 일화.
8 관련서적
- 피아니즘의 황홀경
- 글렌굴드-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주로 인터뷰 모음집)
- Wondrous Strange(번역판이 없다, 가장 상세한 굴드서적이기도 하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 굴드의 스승으로서, 피아노 교수법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피아노에 관해서 둘은 항상 생각이 달랐으며, 실제로 굴드가 성공한 후에 인터뷰 등에서 게레로에 대해 한번도 언급해주지 않자 게레로는 무척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굴드와 게레로는 할아버지와 손자같이 친했다.).
- ↑ 현 소니 클래식의 전신
- ↑ 이 분석에 대해 이의가 제기될 소지가 몇 가지 보인다. 위에 기술된 그의 성격은 일면 맞기도 하나, 다양한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로 활동 시 정신적 부담에 시달렸다는 것은 받아들여지기가 힘들다. 굴드는 활동 당시 무대에서 이상한 행동으로 상당히 나대는 성격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베토벤 4번 협주곡 협연 당시 물 한컵을 들고 나와 오케스트라가 튜티(오케스트라만 독주하는 부분)를 연주하고 있을 때 다리를 꼬고 청중을 바라보며 물을 마셨던 등의 여러 기행은 항상 매스컴에 의해 이슈화 됐었는데(그 기행에 대해 타임즈 지는 다음 번 그 협주곡을 연주할 땐 맥주 한 병과 햄 샌드위치를 들라고(...) 제안하기도 했다)그기 ADHD가 아닌 이상
그럴리가 있겠냐은 의도적으로밖에 매스컴이나 청중들의 관심을 의식하고 이를 받기 위한 행동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 ↑ 표면적으로 드러낸 그의 조기 은퇴 이유는 다소 황당하긴 하지만 전자 기술의 중요성이라고 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공학은 예술가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고도 곡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최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 공학은 음악회가 줄 수 있는 끔찍하고 혐오스러우며 인간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치명적 불확실성을 제거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라고 장황히 설명했다고 한다.
- ↑ 결벽증이 심했던 굴드는 병원을 병균 창고로 생각
틀린 말은 아니다했기 때문에 병원 가기를 평생 싫어했다. 실제로 그는 일생에 걸쳐 유일하게 마음 놓고 대할 수 있었던 존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까지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 가지 못하고 전화로만 어머니와 대화했다. - ↑ 추가 상식으로 덧붙이자면, 연주하는 음악은 작품 하나하나가 그에 따로 필요한 테크닉을 지녀야 표현이 좀 더 살아나는 법이다. 더 넓은 범위에선 작곡가의 스타일에 따라 한 작곡가의 작품들에 쓰여지는 악기 테크닉의 패턴이 서로서로 비슷하다. 바흐 같은 경우는 성부 테크닉이 중점적으로 사용되는데 작곡가의 곡을 중점적으로 연주하는 굴드같은 스페셜리스트 연주가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기도,
- ↑ 왼손-반주/오른손-선율의 구조를 띄는 피아노곡보다 양손이 고르게 역할을 분담하는 바흐의 곡에 더 유리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한다.
- ↑ 그는 '나에게는 1세기의 긴 공백이 있는데 그 경계의 한쪽 끝은 대략 푸가의 기법(바흐의 곡)이고, 다른 한끝은 트리스탄이다(바그너의 오페라). 그 사이에 쓰인 모든 음악들은 사랑한다기 보다는 기껏해야 때때로 칭찬이나 할 수 있는 그런 것들 뿐이다.'라고 자신의 곡 취향을 설명했다.
- ↑ 특히 리스트-바그너 파에 속하는 음악을(쉽게 말해서 가장 낭만주의적인 곡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쇼팽을 상당히 평가절하 했다.
- ↑ 다만 브람스 1번 협주곡은 종종 연주했다. 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중2병자라고 까기도 했으며 곡은 상당히 호불호를 나눈다. 4번을 포함한 몇몇 협주곡과 말기 3개 소나타를 상당히 많이 연주했고, 대 푸가(Grosse Fuge)같은 경우는 "베토벤이 쓴 가장 위대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음악 역사상 가장 경탄할 만한 작품이다"라고 호평할 정도였는데 비해 나머지 교향곡,소나타,상당수의 협주곡들은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 '황당함을 금치 못할 정도.'라고까지 혹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