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김(성씨)/목록]]. [[동명이인/ㄱ]]. 동명의 정치인은 [[김산(1898)]] 문서로. http://img.khan.co.kr/newsmaker/699/book1-1.jpg 김산(金山). [[1905년]] [[3월 10일]] ~ [[1938년]] [[10월 19일]] 본명은 장지학(張志鶴) 또는 장지락(張志樂).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혁명가]], [[아나키스트]], [[시인]], 사상가. 11세 때인 1916년 [[가출]]하여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1919년 중학교 시절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되었다. 이 3.1운동을 계기로 김산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듬해 1920년 1월에 중국 지린성으로 들어가 3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6월까지 수료를 마친다. 그 해 겨울에는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교정과 식자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1921년 [[일본]]을 거쳐 잠시 지내다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쑨원]]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운것을 계기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지부에 입당한다.(김산은 이전에 개신교 신자였다.) 이듬해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5년 중국 대혁명에 참가,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하였다. 1927년에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는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후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및 소학교 교사로 생활하다가 1933년 4월 중국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1월에 탈출하였다. 이어 공산당 북부지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대학에서 [[물리학]],[[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38년, [[캉성]](康生)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그의 삶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1937년 말, [[작가]] 님 웨일스(Nym Wales)를 만나 3개월 동안 20여 회에 걸친 구술을 통해 그의 혁명적 생애를 다룬 《[[아리랑(김산)|아리랑]]의 노래 Song of Ariran》의 초고가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된 덕분이다. http://img.hani.co.kr/imgdb/resize/2005/0805/02615345_20050805.JPG (아리랑의 노래 원작 표지)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이 출판되었고,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출간되었다. 웨일즈는 그를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으로 격찬하였고, 훗날 김산의 아들이 아버지 김산의 명예회복을 요청한 재심의 요구하였다. 1983년 1월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임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였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200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에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을 초청하였다. 김산의 생애와 명예회복 과정을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에서 100회 특집으로 다루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평안북도 출신 인물]] 김산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