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金山).
본명은 장지학(張志鶴) 또는 장지락(張志樂).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혁명가, 아나키스트, 시인, 사상가.
11세 때인 1916년 가출하여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1919년 중학교 시절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되었다. 이 3.1운동을 계기로 김산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듬해 1920년 1월에 중국 지린성으로 들어가 3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6월까지 수료를 마친다.
그 해 겨울에는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교정과 식자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1921년 일본을 거쳐 잠시 지내다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쑨원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운것을 계기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지부에 입당한다.(김산은 이전에 개신교 신자였다.) 이듬해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5년 중국 대혁명에 참가,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하였다.
1927년에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는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후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및 소학교 교사로 생활하다가 1933년 4월 중국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1월에 탈출하였다.
이어 공산당 북부지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대학에서 물리학,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38년, 캉성(康生)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그의 삶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1937년 말, 작가 님 웨일스(Nym Wales)를 만나 3개월 동안 20여 회에 걸친 구술을 통해 그의 혁명적 생애를 다룬 《아리랑의 노래 Song of Ariran》의 초고가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된 덕분이다.
(아리랑의 노래 원작 표지)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이 출판되었고,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출간되었다. 웨일즈는 그를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으로 격찬하였고, 훗날 김산의 아들이 아버지 김산의 명예회복을 요청한 재심의 요구하였다. 1983년 1월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임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였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200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에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을 초청하였다.
김산의 생애와 명예회복 과정을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에서 100회 특집으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