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제4공화국]], [[사건 사고 관련 정보]], [[흑역사/목록/정치와 행정]] * 이 항목은 [[김영삼 제명 사건]]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파일:/content/image/2015/09/16/20150916170252404427.jpg]] > [[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가 불행해질 것이다.''' >ㅡ [[이종찬]] 전 육군 참모총장, 당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당시 >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김영삼 >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 - 김영삼[* 출처 강성재,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 p139][* 당연히 정치적 충격이 클 것이라는 뜻의 비유적 의미였겠지만, 김영삼을 제명한 것의 나비 효과로 인해 [[박정희]]는 [[10.26 사건]]으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진짜 사망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 여당인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김영삼]] [[신민당(1967년)|신민당]] [[총재]]의 [[뉴욕타임스]]지 기자회견 내용을 문제삼아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서 변칙 통과시킨 사건이다. == 배경 == 김영삼은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던 [[사쿠라]]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선출된 이후 줄곧 '''선명야당'''과 '''민주회복'''의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한 기치 하에서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다는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발언, [[YH 사건]] 등으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8월 들어 '''정치공작'''을 통해서 [[유기준(1924)|유기준]], [[윤완중]], [[조일환(1916)|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명한테 5월 전당대회에서의 대의원 몇 명의 자격을 문제삼아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한다. 결국 전당대회 의장이던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러던 중인 그 해 9월 12일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지와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대통령을 제어해줄 것"''' 즉,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내용의 발언을 했다. == 과정 ==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김영삼의 발언을 문제삼아서 10월 3일 합동조정회의에서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기로 결의하였다. 징계 사유로는 반민족적 사대주의 망동을 했다는 점, [[주한미군]]의 존재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인 양 주장했다는 점, 남의 나라 선거에 대한 무분별한 언급으로 정치인의 체통을 손상시켰다는 점 등 9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여담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에게 "각하, 김대중도 연금 중이고 김영삼도 총재 잘랐는데 의원 제명까지 시키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하고 말렸음에도, [[차지철]]은 "아, 언제는 반발 없었습니까. 저런 놈은 확 잘라버려야죠"하면서 밀어붙였다고 한다.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측이 [[10월 4일]]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하고 전격처리할 기세를 보이자 신민당 의원들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본회의장과 단상을 점거하여 제명안 통과에 대한 강력저지 방침으로 맞섰다. 결국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오후 4시 7분 경호권 발동으로 수백 명의 무술경위를 출동시켜 놓고 국회 별실에서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10여 분 만에 변칙 [[날치기]] 통과시켰다. 한편 의원직에서 제명되자 김영삼은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하고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라고 말했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김영삼은 자신은 건재하며 반드시 살아나갈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 파장 == 한편 김영삼 총재 제명에 대한 반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항의의 표시로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10월 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을 발표하면서 10월 16일부터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는 17일 부산시민 전체로 번졌고 18일엔 [[마산]]으로 19일엔 [[창원]]으로 번져나갔고 이로 인해 김영삼 의원의 고향에서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강경책으로 나가서 아예 [[10월 30일]] 김영삼을 체포하고 [[황낙주]] 등의 김영삼 직계 세력을 싹쓸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나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10.26 사건]]이 일어난다.''' [[분류:정치 사건사고]] [[분류:제4공화국]]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사건사고 (원본 보기)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