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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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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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가 불행해질 것이다.

이종찬 전 육군 참모총장, 당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김영삼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 - 김영삼[1][2]

1979년 10월 4일 여당인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뉴욕타임스지 기자회견 내용을 문제삼아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서 변칙 통과시킨 사건이다.

2 배경

김영삼은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던 사쿠라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선출된 이후 줄곧 선명야당민주회복의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한 기치 하에서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다는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발언, YH 사건 등으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8월 들어 정치공작을 통해서 유기준, 윤완중, 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명한테 5월 전당대회에서의 대의원 몇 명의 자격을 문제삼아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한다. 결국 전당대회 의장이던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러던 중인 그 해 9월 12일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지와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대통령을 제어해줄 것" 즉,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내용의 발언을 했다.

3 과정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김영삼의 발언을 문제삼아서 10월 3일 합동조정회의에서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기로 결의하였다. 징계 사유로는 반민족적 사대주의 망동을 했다는 점, 주한미군의 존재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인 양 주장했다는 점, 남의 나라 선거에 대한 무분별한 언급으로 정치인의 체통을 손상시켰다는 점 등 9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여담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에게 "각하, 김대중도 연금 중이고 김영삼도 총재 잘랐는데 의원 제명까지 시키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하고 말렸음에도, 차지철은 "아, 언제는 반발 없었습니까. 저런 놈은 확 잘라버려야죠"하면서 밀어붙였다고 한다.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측이 10월 4일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하고 전격처리할 기세를 보이자 신민당 의원들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본회의장과 단상을 점거하여 제명안 통과에 대한 강력저지 방침으로 맞섰다. 결국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오후 4시 7분 경호권 발동으로 수백 명의 무술경위를 출동시켜 놓고 국회 별실에서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10여 분 만에 변칙 날치기 통과시켰다. 한편 의원직에서 제명되자 김영삼은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하고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라고 말했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김영삼은 자신은 건재하며 반드시 살아나갈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4 파장

한편 김영삼 총재 제명에 대한 반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항의의 표시로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10월 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을 발표하면서 10월 16일부터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는 17일 부산시민 전체로 번졌고 18일엔 마산으로 19일엔 창원으로 번져나갔고 이로 인해 김영삼 의원의 고향에서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강경책으로 나가서 아예 10월 30일 김영삼을 체포하고 황낙주 등의 김영삼 직계 세력을 싹쓸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나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10.26 사건이 일어난다.
  1. 출처 강성재,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 p139
  2. 당연히 정치적 충격이 클 것이라는 뜻의 비유적 의미였겠지만, 김영삼을 제명한 것의 나비 효과로 인해 박정희10.26 사건으로 진짜 사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