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명나라]][[분류:국가(17세기)]] * [[중국사 관련 정보]] [목차] == 개요 == [include(틀:중국의 역사/1644)]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 '''[[중국사 관련 정보|중국의 역사]]''' || ||<width=30%><:><|2> [[명나라|명]] ||<:><|2>{{{+1 ←}}}||<width=30%><:> [[청나라|청]] ||<:><|2>{{{+1 →}}}||<width=30%><:><|2> [[청나라|청]] || ||<:><#fbc4c4> '''남명''' || 南明 [[명나라]]가 멸망한 뒤, 1644년에서 1661년까지 존속했던 명의 잔존 정권이자 중국판 남베트남.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6/Koxinga_territory.jpg?width=600 [[파일:남명/순 영토.jpg|width=530]] [[북경]]([[베이징]])을 [[이자성]] 군이 함락하고 [[숭정제]]가 자살해 명나라는 멸망했다. 하지만 아직 명의 제2수도였던 [[남경]]([[난징]])에는 명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았고, 황족을 옹립하여 명을 재건하려 했다. 게다가 남경은 제2의 수도였기 때문에 소규모의 조정을 남겨놓았고 물자·장비·군대를 집중시킨 뒤 수시로 관리했다. 거기다 성곽도 튼튼했으므로 설사 북경이 적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국가 자체는 살아남을 만했다. 따라서 외적 조건으로만 따지면 [[오호십육국시대]]나 [[정강의 변]] 때보다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었다. 따라서 명나라 부흥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송이나 동진처럼 강남을 기반으로 중국을 양분할 만했겠지만... 대실패하고 '''허망하게 멸망했다'''. 같은 입장의 망명 정권이었던 [[남송]]과 [[동진]]은 각각 [[송고종]] 조구, 원제 [[사마예]]를 옹립하여 하나로 뭉쳤다. 물론 내부적인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최소한 리더가 누구인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외부에서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최우선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남명은 동시에 여러 황제가 각지에서 나와 내부에서 서로 정통성을 놓고 다투는 구도였다. 아래의 황제 목록에 있는 남명 황제들은 편의상 대수로 정리했지만, 거의 다 차례대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병립'한 것. 각각 정권을 만들어 통치기간이 겹치고, 이 정권들은 서로를 인정하거나 협력도 안했으며 심지어 전투를 벌이기까지 하는 상황이였다. 그나마 1대 황제인 [[주유숭]]은 정통성도 있었고, 명 제2의 수도라 할 만한 남경을 먹고 있었기에 이 인간이 잘 했다면 남명이 길게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주유숭은 무능[* 남쪽으로 쫓겨내려와서도 내분을 벌이는 신하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신하들도 주유숭이 무능하다고 무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한데다 무개념[* 제위에 오른 후 줄곧 사치와 주색잡기에 열을 올렸다.]이었다. 남송의 경우 지방 군벌들이 송고종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한 때 송나라의 신하였다가 [[금나라]]에 투항한 신하들 역시 은밀하게 송나라에 도움을 주는 때마저 있었다. 그러나 남명은 오히려 투항한 한족 신하(당장 [[오삼계]]라든가)들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왔다. 남명은 과거 남송이 그러했듯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청의 남진을 막는 전략을 폈다. [[해전]]에 약한 청군이 장강을 건너 화남지방으로 내려오기란 사실 어려운 일. 그런데 북경 함락 뒤 겨우 1년만에 남경이 다시 함락되었으니 충격적이다. 여기에는 청군에 투항한 한족 출신 장수 및 군대가 많았다는 점과 함께, 남명 스스로가 멸망의 길을 열어제낀 것이 크다. 1645년 당시 남명은 장강 방어선 곳곳에 장수와 병력을 주어 청의 침공에 대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좌량옥(左良玉)이 남명조정 실권자인 마사영(馬士英)과의 갈등 끝에 반란을 일으키고 남경을 들이친다. 남명은 또 이걸 막겠다며 최전선에서 청을 막던 병력들을 소환했고 이런 상황에서 청이 장강 방어선을 못 뚫을 리가 없다. 게다가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긴 커녕 외면했는데 그나마 이것도 청이 상당히 잔혹한 대우를 해서 청도 싫어했기 때문일 뿐이다. 한마디로 남베트남. 남명의 역사는 <[[명사]]>에 있는데, [[본기]]가 아니라 [[열전]]에 있다. 이것은 청나라에서 남명을 공식적으로 왕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은 중국 본토에서의 명나라 부활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대만을 공격해 차지하고 [[정씨 왕국]]을 건국한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 역대 황제 == 이 가운데 주이해, 주본현은 비정통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명의 연장이므로 18대부터 표기한다. ||<#dcdcdc> 대수 ||<#dcdcdc> 묘호 ||<#dcdcdc> 연호 ||<#dcdcdc> 휘 ||<#dcdcdc> 재위기간 ||<#dcdcdc> 비고 || || 18 || [[안종]](安宗)[* 처음엔 질종(質宗).] || '''홍광'''[br](弘光) || [[주유숭]][br](朱由崧) || 1644 ~ 1645 ||[[만력제]]의 3남인 복왕(福王) [[주상순]]의 [[장남]]으로 남경에서 옹립되었다.|| || 19 || [[소종]](紹宗) || 융무[br](隆武) || [[주율건]][br](朱聿鍵) || 1645 ~ 1646 ||주원장의 23남 당왕(唐王) 주경의 8세손으로 홍광제가 죽은 뒤 [[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복건성]] 복주에서 옹립되었다.|| || - || [[의종]](义宗) || 감국노[br](監國魯) || [[주이해]][br](朱以海) || 1645 ~ 1646(?) ||주원장의 제10자인 노왕(魯王) 주단의 9세손이다. 남경이 떨어진 뒤, 칭제여부는 불확실하지만[br] [[절강성]]에서 감국(監國)을 자칭하여 독립하고 감국노(監國魯)라는 연호를 쓰면서 [[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복건성]]의[br] 융무제 정권과 대립했다.|| || 20 || [[문종]](文宗) || 소무[br](紹武) || [[주율오]][br](朱聿鐭) || 1646 ||융무제 주율건의 동생으로 융무제 정권이 붕괴한 뒤 복건성 광주에서 즉위했다.|| || 21 || [[경종]](敬宗) || 동무[br](東武帝) || [[주상청]][br](朱常淸) || 1647~1649 ||[[홍희제]]의 7남 유왕(淮王) 주담환(朱瞻墺)의 7대손이다.[br] 1647년 소무제가 후사 없이 갑자기 죽자 황제로 추대받아 즉위했다.|| || 22 || '''[[소종]]'''(昭宗) || '''영력'''[br](永曆) || '''[[주유랑]]'''[br](朱由榔) || 1649~1662 ||[[만력제]]의 손자로 융무제가 굶어 죽자 조경에서 즉위했다. [br] [[버마]]에서 잡혀 곤명에서 피살되었다. 사실상의 마지막 황제. || || 23 || [[평종]](平宗) || 정무[br](定武) || [[주본현]][br](朱本鉉) || 1661~1664 ||홍무제의 20남 한왕(韓王) 주송의 자손이자 마지막 황제로 영력제가 피살되자 즉위했다.|| == 관련 항목 == * [[대만]] * [[정성공]] * [[정지룡]] * [[정씨 왕국]]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중국의 역사/1644 (원본 보기) 남명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