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 ||||
907 ~ 1279 | 오대십국(五代十國) | 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 당항(黨項) | |
송(宋) ,대리국(大理國), | 북송(北宋) | 백고대하/서하(西夏) | ||
남송(南宋) | 안춘 구룬/대금(大金) | |||
1270 ~ 1368 |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 |||
1368 ~ 1644 | 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
중국의 역사 | ||||
명 | ← | 청 | → | 청 |
남명 |
南明
명나라가 멸망한 뒤, 1644년에서 1661년까지 존속했던 명의 잔존 정권이자 중국판 남베트남.
북경(베이징)을 이자성 군이 함락하고 숭정제가 자살해 명나라는 멸망했다. 하지만 아직 명의 제2수도였던 남경(난징)에는 명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았고, 황족을 옹립하여 명을 재건하려 했다. 게다가 남경은 제2의 수도였기 때문에 소규모의 조정을 남겨놓았고 물자·장비·군대를 집중시킨 뒤 수시로 관리했다. 거기다 성곽도 튼튼했으므로 설사 북경이 적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국가 자체는 살아남을 만했다. 따라서 외적 조건으로만 따지면 오호십육국시대나 정강의 변 때보다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었다. 따라서 명나라 부흥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송이나 동진처럼 강남을 기반으로 중국을 양분할 만했겠지만...
대실패하고 허망하게 멸망했다.
같은 입장의 망명 정권이었던 남송과 동진은 각각 송고종 조구, 원제 사마예를 옹립하여 하나로 뭉쳤다. 물론 내부적인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최소한 리더가 누구인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외부에서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최우선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남명은 동시에 여러 황제가 각지에서 나와 내부에서 서로 정통성을 놓고 다투는 구도였다. 아래의 황제 목록에 있는 남명 황제들은 편의상 대수로 정리했지만, 거의 다 차례대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병립'한 것. 각각 정권을 만들어 통치기간이 겹치고, 이 정권들은 서로를 인정하거나 협력도 안했으며 심지어 전투를 벌이기까지 하는 상황이였다. 그나마 1대 황제인 주유숭은 정통성도 있었고, 명 제2의 수도라 할 만한 남경을 먹고 있었기에 이 인간이 잘 했다면 남명이 길게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주유숭은 무능[1]한데다 무개념[2]이었다.
남송의 경우 지방 군벌들이 송고종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한 때 송나라의 신하였다가 금나라에 투항한 신하들 역시 은밀하게 송나라에 도움을 주는 때마저 있었다. 그러나 남명은 오히려 투항한 한족 신하(당장 오삼계라든가)들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왔다.
남명은 과거 남송이 그러했듯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청의 남진을 막는 전략을 폈다. 해전에 약한 청군이 장강을 건너 화남지방으로 내려오기란 사실 어려운 일. 그런데 북경 함락 뒤 겨우 1년만에 남경이 다시 함락되었으니 충격적이다.
여기에는 청군에 투항한 한족 출신 장수 및 군대가 많았다는 점과 함께, 남명 스스로가 멸망의 길을 열어제낀 것이 크다. 1645년 당시 남명은 장강 방어선 곳곳에 장수와 병력을 주어 청의 침공에 대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좌량옥(左良玉)이 남명조정 실권자인 마사영(馬士英)과의 갈등 끝에 반란을 일으키고 남경을 들이친다. 남명은 또 이걸 막겠다며 최전선에서 청을 막던 병력들을 소환했고 이런 상황에서 청이 장강 방어선을 못 뚫을 리가 없다. 게다가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긴 커녕 외면했는데 그나마 이것도 청이 상당히 잔혹한 대우를 해서 청도 싫어했기 때문일 뿐이다. 한마디로 남베트남.
남명의 역사는 <명사>에 있는데, 본기가 아니라 열전에 있다. 이것은 청나라에서 남명을 공식적으로 왕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은 중국 본토에서의 명나라 부활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대만을 공격해 차지하고 정씨 왕국을 건국한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2 역대 황제
이 가운데 주이해, 주본현은 비정통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명의 연장이므로 18대부터 표기한다.
대수 | 묘호 | 연호 | 휘 | 재위기간 | 비고 |
18 | 안종(安宗)[3] | 홍광 (弘光) | 주유숭 (朱由崧) | 1644 ~ 1645 | 만력제의 3남인 복왕(福王) 주상순의 장남으로 남경에서 옹립되었다. |
19 | 소종(紹宗) | 융무 (隆武) | 주율건 (朱聿鍵) | 1645 ~ 1646 | 주원장의 23남 당왕(唐王) 주경의 8세손으로 홍광제가 죽은 뒤 복건성 복주에서 옹립되었다. |
- | 의종(义宗) | 감국노 (監國魯) | 주이해 (朱以海) | 1645 ~ 1646(?) | 주원장의 제10자인 노왕(魯王) 주단의 9세손이다. 남경이 떨어진 뒤, 칭제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절강성에서 감국(監國)을 자칭하여 독립하고 감국노(監國魯)라는 연호를 쓰면서 복건성의 융무제 정권과 대립했다. |
20 | 문종(文宗) | 소무 (紹武) | 주율오 (朱聿鐭) | 1646 | 융무제 주율건의 동생으로 융무제 정권이 붕괴한 뒤 복건성 광주에서 즉위했다. |
21 | 경종(敬宗) | 동무 (東武帝) | 주상청 (朱常淸) | 1647~1649 | 홍희제의 7남 유왕(淮王) 주담환(朱瞻墺)의 7대손이다. 1647년 소무제가 후사 없이 갑자기 죽자 황제로 추대받아 즉위했다. |
22 | 소종(昭宗) | 영력 (永曆) | 주유랑 (朱由榔) | 1649~1662 | 만력제의 손자로 융무제가 굶어 죽자 조경에서 즉위했다. 버마에서 잡혀 곤명에서 피살되었다. 사실상의 마지막 황제. |
23 | 평종(平宗) | 정무 (定武) | 주본현 (朱本鉉) | 1661~1664 | 홍무제의 20남 한왕(韓王) 주송의 자손이자 마지막 황제로 영력제가 피살되자 즉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