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 '''[[고대 로마|로마]]의 역사''' || ||<width=30%> [[플라비우스 왕조]] || {{{+1 ←}}} ||<width=30%><#fbc4c4>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1 →}}} ||<width=30%> [[로마 내전|내전기]] || [목차] == 개요 == [[로마 제국]]의 세번째 왕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어 단절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뒤를 이어 서기 96년부터 198년까지 로마를 통치한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가 이 왕조에 속하는 황제들. 여기서 [[콤모두스]]만 빼면 그 유명한 [[오현제]]다. 콤모두스를 제외하면 모두 [[양자]] 관계로 황위가 계승됐기 때문에 양자 왕조라고도 불리며, 이처럼 혈연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자를 양자로 맞이하여 제위를 계승했던 것이 이 시기 로마를 최전성기로 이끈 원동력으로 꼽히곤 한다.[* 다만 이게 정말로 중요한 원동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이전 로마 역사에서도 [[플라비우스 왕조]] 정도를 제외하면 양자 관계로 권력이 세습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 우선 [[카이사르]]부터가 [[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입양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역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양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모두 훌륭하게 통치를 수행해냈다. ~~티베리우스는 성격이 소시오패스여서 문제였지만~~][* 그리고 사실 양자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던게 아우렐리우스 이전 황제들은 모두 친자가 없었다. 즉 왕위를 세습하고 싶어도 세습할 수가 없었던 것.] == 내용 == * 자세한 내용은 [[오현제]] 항목 또는 각 황제들의 항목을 참고할 것. '''고대 로마 제국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시대이며, 동시에 쇠퇴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 시기부터 이민족의 본격적인 침입이 시작되면서 로마가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한다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하드리아누스를 제외하고는~~[* 하드리아누스의 경우 즉위 직후 원로원의 요인 네 명을 반란혐의로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해버린데다가, 재위 기간 내내 속주 순방에만 열심인채 본진인 로마는 비워둬서 원로원과 사이가 개판이었다. ~~정작 속주 순방이 하드리아누스의 최고 업적인게 아이러니~~] 황제와 [[원로원]]과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호하였다.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우선 왕조의 설립자인 [[네르바]] 본인이 원로원의 승인에 의하여 정통성을 확고히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역시나 하드리아누스를 제외하고는~~ 황제들이 전반적으로 원로원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었던 점도 컸다. 하지만 정작 실제적 권력의 측면으로 보자면 원로원의 기능 쇠퇴가 가속화된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기 원로원은 더 이상 주요한 인적 풀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황제들은 측근 관료층이라고 부를만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당장 로마 역사상 최고의 역사가이자 지식인으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가 공직상으로는 별다르게 한 게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즉 원로원은 거수기 노릇하기 시작했다 이 말이다.~~ 군사적으로도 제국은 제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로 영토를 확보하여 안정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는 [[다키아]]를 정복하여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참패를 앙갚은한데 이어, [[파르티아]] 원정까지 감행해서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해버리기까지 한다.[* 여담이지만,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한 후 트라야누스가 한 말은 '''"[[알렉산더 대왕|내가 젊었으면 인도까지 갈텐데..]]"'''였다고 한다. ㅎㄷㄷ]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와중에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제국의 역량을 감안할 때 무리수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파르티아에서 군사를 철수하였으며 이후로 로마는 팽창 정책보다는 철저히 국경 수성에 몰두하게 된다.[*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경우 '너무 국경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국경 밖 게르만족의 세력 구도가 대격변을 일으키는 것을 놓쳤고, 이로 인해 후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똥을 치워야만 했다.'라는 비판을 사기도 한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항목 참조.]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재임 기간 내내 게르만 족의 외침에 시달린 나머지, 재임 말기에 [[게르마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속주화하려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쟁 도중에 아우렐리우스가 병사하고 후임~~트롤러~~ 콤모두스가 전쟁을 중간에 포기해버리면서 무산됐다.[* 근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역사학자들은 '콤모두스가 전쟁을 포기한 동기는 아마 그냥 막사생활이 지겨워서(...)였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재정 상황이나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때 현명한 결정이 됐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 이러한 정치, 군사적 안전성을 바탕으로 제국 각지에서 활발한 물자 교류가 이루어어지면서 경제력 역시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다만 지나친 식민도시 개발 및 농작지 확대로 인해서 서서히 경제적인 엔트로피의 고갈의 이루어지던 시기도 이 시기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여러모로 황금 시대(Saeculum Aureum)이라는 표현이 걸맞는 시기.''' == 여담 == * 다른 양자 사이와 달리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사이의 나이 차이는 10살 밖에 안됐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입양법을 개정해야했다고 한다. 그 전의 입양법으로는 그 정도 나이차이로는 양자관계가 성립이 안됐다고... *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인데 이 왕조에는 또다른 황제가 한 명 있다. [[루키우스 베루스]]라는 인물로, 하드리아누스의 첫 후계자였다가 병사한 아일리우스의 아들로 안토니누스의 피우스의 양자로 받아들여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같은 양아버지를 둔 형제 사이. 사실 본인은 황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아우렐리우스의 강한 요청에 따라 원로원이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면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황제 즉위 후에도 국사에는 별로 관심을 안보이다가 ~~아우렐리우스 [[하드캐리]]~~169년 병사.[* 오늘날에는 뇌와 관련된 급성질환으로 추정되고 있다.] * 가계도를 고려해보자면 그게 두 가문이 결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피는 하나도 안 섞인 양자관계인게 함정~~ 하나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로 이어지는 라인이고, 다른 하나는 안토니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로 이어지는 라인. 이렇게 된 원인은 안토니누스가 하드리아누스가 짜놓은 결혼 계획[*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의 아들 루카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키려고 했다.]을 임의적으로 변경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 == 역대 황제 == ||<#DCDCDC> 대수 ||<#DCDCDC> 이름 ||<#DCDCDC> 재위 기간 || || 1대 ||[[네르바]] || 96년 9월 18일 ~ 98년 7월 27일|| || 2대 ||[[트라야누스]] || 98년 7월 27일 ~ 117년 8월 8일 || || 3대 ||[[하드리아누스]] || 117년 8월 10일 ~ 138년 7월 10일 || || 4대 ||[[안토니누스 피우스]] || 138년 7월 11일 ~ 161년 3월 7일|| || 5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161년 3월 8일 ~ 180년 3월 17일 || || 공동통치 ||[[루키우스 베루스]] || 161년 3월 8일 ~ 169년 || || 6대 ||[[콤모두스]] || 180년 3월 17일 ~ 192년 12월 31일 || [[분류:왕조]][[분류:고대 로마]]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