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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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세번째 왕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어 단절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뒤를 이어 서기 96년부터 198년까지 로마를 통치한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가 이 왕조에 속하는 황제들. 여기서 콤모두스만 빼면 그 유명한 오현제다. 콤모두스를 제외하면 모두 양자 관계로 황위가 계승됐기 때문에 양자 왕조라고도 불리며, 이처럼 혈연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자를 양자로 맞이하여 제위를 계승했던 것이 이 시기 로마를 최전성기로 이끈 원동력으로 꼽히곤 한다.[1][2]
2 내용
- 자세한 내용은 오현제 항목 또는 각 황제들의 항목을 참고할 것.
고대 로마 제국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시대이며, 동시에 쇠퇴기의 시작이기도 하다.[3]
정치적으로는 하드리아누스를 제외하고는[4] 황제와 원로원과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호하였다.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우선 왕조의 설립자인 네르바 본인이 원로원의 승인에 의하여 정통성을 확고히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역시나 하드리아누스를 제외하고는 황제들이 전반적으로 원로원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었던 점도 컸다. 하지만 정작 실제적 권력의 측면으로 보자면 원로원의 기능 쇠퇴가 가속화된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기 원로원은 더 이상 주요한 인적 풀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황제들은 측근 관료층이라고 부를만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당장 로마 역사상 최고의 역사가이자 지식인으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가 공직상으로는 별다르게 한 게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즉 원로원은 거수기 노릇하기 시작했다 이 말이다.
군사적으로도 제국은 제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로 영토를 확보하여 안정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는 다키아를 정복하여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참패를 앙갚은한데 이어, 파르티아 원정까지 감행해서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해버리기까지 한다.[5]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와중에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제국의 역량을 감안할 때 무리수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파르티아에서 군사를 철수하였으며 이후로 로마는 팽창 정책보다는 철저히 국경 수성에 몰두하게 된다.[6]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재임 기간 내내 게르만 족의 외침에 시달린 나머지, 재임 말기에 게르마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속주화하려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쟁 도중에 아우렐리우스가 병사하고 후임트롤러 콤모두스가 전쟁을 중간에 포기해버리면서 무산됐다.[7] 이러한 정치, 군사적 안전성을 바탕으로 제국 각지에서 활발한 물자 교류가 이루어어지면서 경제력 역시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8]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여러모로 황금 시대(Saeculum Aureum)이라는 표현이 걸맞는 시기.
3 여담
- 다른 양자 사이와 달리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사이의 나이 차이는 10살 밖에 안됐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입양법을 개정해야했다고 한다. 그 전의 입양법으로는 그 정도 나이차이로는 양자관계가 성립이 안됐다고...
-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인데 이 왕조에는 또다른 황제가 한 명 있다. 루키우스 베루스라는 인물로, 하드리아누스의 첫 후계자였다가 병사한 아일리우스의 아들로 안토니누스의 피우스의 양자로 받아들여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같은 양아버지를 둔 형제 사이. 사실 본인은 황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아우렐리우스의 강한 요청에 따라 원로원이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면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황제 즉위 후에도 국사에는 별로 관심을 안보이다가
아우렐리우스 하드캐리169년 병사.[9] - 가계도를 고려해보자면 그게 두 가문이 결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피는 하나도 안 섞인 양자관계인게 함정하나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로 이어지는 라인이고, 다른 하나는 안토니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로 이어지는 라인. 이렇게 된 원인은 안토니누스가 하드리아누스가 짜놓은 결혼 계획[10]을 임의적으로 변경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
4 역대 황제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1대 | 네르바 | 96년 9월 18일 ~ 98년 7월 27일 |
2대 | 트라야누스 | 98년 7월 27일 ~ 117년 8월 8일 |
3대 | 하드리아누스 | 117년 8월 10일 ~ 138년 7월 10일 |
4대 | 안토니누스 피우스 | 138년 7월 11일 ~ 161년 3월 7일 |
5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161년 3월 8일 ~ 180년 3월 17일 |
공동통치 | 루키우스 베루스 | 161년 3월 8일 ~ 169년 |
6대 | 콤모두스 | 180년 3월 17일 ~ 192년 12월 31일 |
- ↑ 다만 이게 정말로 중요한 원동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이전 로마 역사에서도 플라비우스 왕조 정도를 제외하면 양자 관계로 권력이 세습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 우선 카이사르부터가 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입양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역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양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모두 훌륭하게 통치를 수행해냈다.
티베리우스는 성격이 소시오패스여서 문제였지만 - ↑ 그리고 사실 양자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던게 아우렐리우스 이전 황제들은 모두 친자가 없었다. 즉 왕위를 세습하고 싶어도 세습할 수가 없었던 것.
- ↑ 전반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 시기부터 이민족의 본격적인 침입이 시작되면서 로마가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한다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 ↑ 하드리아누스의 경우 즉위 직후 원로원의 요인 네 명을 반란혐의로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해버린데다가, 재위 기간 내내 속주 순방에만 열심인채 본진인 로마는 비워둬서 원로원과 사이가 개판이었다.
정작 속주 순방이 하드리아누스의 최고 업적인게 아이러니 - ↑ 여담이지만,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한 후 트라야누스가 한 말은 "내가 젊었으면 인도까지 갈텐데.."였다고 한다. ㅎㄷㄷ
- ↑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경우 '너무 국경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국경 밖 게르만족의 세력 구도가 대격변을 일으키는 것을 놓쳤고, 이로 인해 후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똥을 치워야만 했다.'라는 비판을 사기도 한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항목 참조.
- ↑ 근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역사학자들은 '콤모두스가 전쟁을 포기한 동기는 아마 그냥 막사생활이 지겨워서(...)였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재정 상황이나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때 현명한 결정이 됐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 - ↑ 다만 지나친 식민도시 개발 및 농작지 확대로 인해서 서서히 경제적인 엔트로피의 고갈의 이루어지던 시기도 이 시기이다.
- ↑ 오늘날에는 뇌와 관련된 급성질환으로 추정되고 있다.
- ↑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의 아들 루카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