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http://dbscthumb.phinf.naver.net/2644_000_6/20130613094709921_4DZ89T9O3.jpg/5de08db2-2689-48.jpg?type=m250_fst_nce&wm=Y 茶山草堂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문화재]]. 사적 107호.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생활하던 집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18년 간의 강진의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야사로 이 주모의 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약용과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의재는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윤규로(尹奎魯)가 소유한 초가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이 초가가 바로 다산초당이다. 유배에서 풀려 정약용이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1958년 강진 지역민들의 주도로 집을 고치고 그 해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이름의 초당(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601010314430610010|계획]]을 세웠으나 2014년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다산초당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