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田内 千鶴子 (たうち ちずこ) http://www.christiantoday.co.kr/files/article/db/2012/10/29/1351504854_1acf4290ee.jpg 1912~1968 [[일본]] 출신. 한국 이름은 [[윤학자]](尹鶴子). 남편의 성 윤씨에 자신의 이름 지즈코(千鶴子)에서 따와 만들었다. 때문에 이 문서는 [[윤학자]]로도 들어올 수 있다. [[1912년]]에 일본 [[고치(일본)|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면서부터로 아버지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아버지가 사망한후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때 목포에는 윤치호(尹致浩, 1909 ~ 1951?)[* 친일파 윤치호(尹致昊, 1864 ~ 1945)와는 다른 사람이니 유의하자.]라는 전도사가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우고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공생원에서 음악교사로 봉사를 하다가 윤치호와 부부의 연을 맺고 공생원에서 함께 고아들을 돌보았다. [[1945년]] 해방이후 그녀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할 뻔 했지만 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헌신을 익히 보아온 마을 주민들이 막아서 고초를 면했다.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고 목포에도 인민군들이 몰려들자 다른 이들이 피난을 권했지만 고아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하며 공생원에 그대로 남았다. 그로 인해 이들 부부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고초를 겪지만 마을 주민들이 다시 나서서 적극적으로 옹호한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공생원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남편 윤치호는 목포 죽교동의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고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자 이번에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남편 윤치호는 이듬해인 [[1951년]] [[1월]]에야 겨우 무혐의로 풀려났고 식량난 때문에 전남도청이 있었던 [[광주광역시]]로[* [[2005년]]에 도청을 [[무안군]]으로 옮겼다.] 구호요청을 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후 공생원 운영은 온전히 그녀의 손에 맡겨졌고 그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생원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그런 그녀의 노력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서 [[1963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했고 [[1967년]]에는 일본정부가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965년]]에 목포시에서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으로 그녀에게 수여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1968년]]에 그녀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목포시 최초의 목포 시민장으로 치뤄졌고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는 무려 3만여 명이 참석해 말 그대로 '''[[전미가 울었다|전 목포가 울었다]]'''고 할 정도였다. [[1995년]]에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한일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시다 에리가 다우지 치즈코역, 길용우가 윤치호역을 맡았다. 한일합작영화임에도 한국에서는 개봉을 못하다가 [[1998년]]에 일본문화 개방조치로 제일 먼저 수입허가를 받게 되었다. == 참고 문서 == * [[오부치 게이조]] 다우치 치즈코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