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치 치즈코

田内 千鶴子 (たうち ちず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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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68

일본 출신. 한국 이름은 윤학자(尹鶴子). 남편의 성 윤씨에 자신의 이름 지즈코(千鶴子)에서 따와 만들었다. 때문에 이 문서는 윤학자로도 들어올 수 있다.

1912년에 일본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면서부터로 아버지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아버지가 사망한후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때 목포에는 윤치호(尹致浩, 1909 ~ 1951?)[1]라는 전도사가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우고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공생원에서 음악교사로 봉사를 하다가 윤치호와 부부의 연을 맺고 공생원에서 함께 고아들을 돌보았다.

1945년 해방이후 그녀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할 뻔 했지만 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헌신을 익히 보아온 마을 주민들이 막아서 고초를 면했다.

1950년6.25 전쟁이 터지고 목포에도 인민군들이 몰려들자 다른 이들이 피난을 권했지만 고아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하며 공생원에 그대로 남았다. 그로 인해 이들 부부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고초를 겪지만 마을 주민들이 다시 나서서 적극적으로 옹호한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공생원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남편 윤치호는 목포 죽교동의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고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자 이번에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남편 윤치호는 이듬해인 1951년 1월에야 겨우 무혐의로 풀려났고 식량난 때문에 전남도청이 있었던 광주광역시[2] 구호요청을 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후 공생원 운영은 온전히 그녀의 손에 맡겨졌고 그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생원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그런 그녀의 노력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서 1963년박정희 대통령이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했고 1967년에는 일본정부가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965년에 목포시에서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으로 그녀에게 수여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1968년에 그녀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목포시 최초의 목포 시민장으로 치뤄졌고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는 무려 3만여 명이 참석해 말 그대로 전 목포가 울었다고 할 정도였다.

1995년에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한일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시다 에리가 다우지 치즈코역, 길용우가 윤치호역을 맡았다. 한일합작영화임에도 한국에서는 개봉을 못하다가 1998년에 일본문화 개방조치로 제일 먼저 수입허가를 받게 되었다.

참고 문서

  1. 친일파 윤치호(尹致昊, 1864 ~ 1945)와는 다른 사람이니 유의하자.
  2. 2005년에 도청을 무안군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