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수당시대/황제]] ||||||||||||<:><tablealign=center><#a48252> '''[[당나라#s-4|{{{#ffffff 당의 역대 황제}}}]]''' || ||<width=30%> 8대 [[당대종|대종]] 예황제 이예 || {{{+1 ←}}} ||<width=30%> '''9대 덕종 소황제 이괄''' || {{{+1 →}}} ||<width=30%> 10대 [[당순종|순종]] 안황제 이송 || ||||<tablealign=center><:>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4/Tang_Dezong.jpg?width=300 || || '''[[묘호]]''' || '''[[덕종]](德宗)''' || || '''[[시호]]''' || 신무효문황제(神武孝文皇帝) || || '''[[연호]]''' || 건중(建中, 780년 ~ 783년)[br]흥원(興元, 784년)[br]정원(貞元, 785년 ~ 805년 8월) || || '''[[성]]''' || 이(李) || || '''[[휘]]''' || 괄(适) || || '''생몰기간''' || 742년 5월 27일 ~ 805년 2월 25일 || || '''재위기간''' || 779년 6월 12일 ~ 805년 2월 25일 || * 생몰년 : 742년 천보(天寶) 원년 ~ 805년 2월 25일 정원(貞元) 21년 (63세) * 재위기간 : 779년 6월 12일 대력(大歷) 14년 ~ 805년 2월 25일 정원(貞元) 11년 (17년 5일)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980000>'''[[당나라|{{{#yellow 당 제국}}}]]''' '''{{{#yellow 상서령}}}''' || ||<:>전임 [[이세민]] ||←||<width=30%><#980000><:> '''{{{#yellow 이괄}}}''' [BR] {{{#yellow 763년~764년}}} ||→||<:>후임 [[곽자의]] || [목차]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 당대종 이예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예진황후 심씨이다. 휘는 괄(适).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신무효문황제(德宗 神武孝文皇帝)로 줄여서 소황제(昭皇帝). 능호는 숭릉(崇陵)이다. 소황제(昭皇帝, 밝은 황제)라고도 하는 것처럼 [[당헌종]]과 함께 대표적인 [[중흥]] 황제였다. 그의 치세를 흔히 중흥의 치라 부르는데, 연호인 건'''중'''(建中, 780년 ~ 783년)과 '''흥'''원(興元, 784년)에서 글자를 딴 것이지만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으면 마침 '중흥'과 음이 겹치는 우연의 일치가 있다. 양세법 등의 세제계편으로 연호를 따 '중흥의 치'라는 번영을 회복했으나 [[환관]]을 중용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리고 "중흥의 치"에서 드러나듯 정원년간, 즉 재위기간의 후반 9년은 전반 5년에 미치지 못했다. 대내적인 평가는 번진에 집착해서 큰 공을 놓쳤고 대외적인 평가는 위구르에 집착해 토번에게 이용당했다고 한다. == 생애 == === 황제 즉위 이전 === 젊었을 때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회흘과 연합작전을 할 때 당한 치욕으로 [[회흘]]([[위구르 제국]])에 대한 복수심이 매우 컸다. 회흘에게 당한 치욕이란 당나라가 사사명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회흘의 가한이 당시 옹왕이던 덕종에게 "나와 네 아버지는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나는 너의 숙부다. '''숙부인 가한을 위해 직접 춤을 추라'''."라는 모욕을 당했고, 반대하던 당의 신하들이 회흘 가한에게 채찍 100대를 맞다가 죽어나가는 수모를 직접 당했으며, [[낙양]]이 재수복되자, 회흘군이 대약탈극을 벌여 수만의 백성들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눈 앞에서 목도한 것이다. === 치세 - 양세법 ===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즉위 직후(780년) 재상 양염(楊炎)의 건의에 따라 [[중국사/세금 제도#s-11|세금제도]]를 개편하여 단일세율(단세)인 [[중국사/세금 제도#s-11|양세법]](兩稅法)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 여기서 '나가는 것을 헤아려 들어오는 것을 정한다'라는 뜻인 양출제입(量出制入)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무릇 백역에 드는 비용과 한 푼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것들은 먼저 그 수를 헤아려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지출할 것을 잘 따져서 수입 계획을 세운다'''(凡百役之費, 一錢之斂, 先度其數而賦於人, '''量出制入''')" ─ 신당서 양염전 中.] 균전제를 폐지하고 __현재의__[* 이는 본관지 이탈을 용인한 것이며, 소작민을 과세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토지와 재산에 따라''' 세금을 해마다 두번(여름(하세) - 6월, 가을(추세) - 11월) 기준을 금전으로 걷고[* 정확히는 여름에 걷는 것은 맥麥전, 즉 [[보리]]농사, 가을에 걷는 것은 속粟전 및 도稻전, 즉 [[좁쌀]]농사와 [[벼]]농사를 걷는 것이니 [[이모작]]을 때에 따라 각각 걷는 것이지 이중과세는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간단한 세법은 이후 [[명나라]] [[만력제]]까지 800년간 운용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양세법의 기본 원칙은 하급 행정단위에서 쓰고 남은 돈을 상부로 올리는 방식이었던 만큼, 하북3진은 물론 평로절도사 조차 상공(上供 - 중앙으로 세금을 바치는 것)을 아예 하지 않았고, 나머지 절도사들도 이따금 매우 적은 상공만을 했다. 조금 사정이 나은 것이 [[강남]]의 순지順地절도사 들이었는데, 이것도 [[대운하]]를 통해서 상공이 가능한 것이기에 하북의 절도사들이 막을 경우 정기적이지 못했다. 이는 뒤에 보듯 [[이정기]]의 [[치청번진]]([[제나라]])과 같은 절도사들의 난에서 잘 드러난다. === 절도사들의 봉기와 반란 진압 === 장군인 주비가 황제를 [[참칭]]하자, 장안을 버리고 파천해야했으나, 결국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토번의 원군을 끌고 왔으나 전후처리과정에서 반발이 생겨 결국 토번과 결별하고 이필의 건의로[* 당 숙종의 그 이필맞다.] 위구르 제국과 연합해서 토번을 공격했으나 '''되레 깨져서 그나마 소유하고있던 북정지역마저 상실당했다.''' 이후 중국 왕조는 두 번 다시 서역 경영을 하지 못했다. 이후 사망까지는 [[추가바람]] == 기타 == 전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에게 사과했다. 사실 그가 전란의 원인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정작 [[6.25 전쟁]] 때 수도 서울을 버리고 떠난 [[이승만]]은 사과하라는 [[제2대 총선]]으로 수립된 [[국회]]의 비판에 "내가 무슨 당 덕종이냐!"라고 우겼다. ~~중세만도 못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망~~ 당덕종 재위기간에 [[낙산대불]]이 완공되었다. [[낙산대불]]은 [[당현종]] 개원 원년인 713년 해통화상(海通和尚)이 처음 대불공사를 시작하여 당덕종 정원 19년인 803년에서야 겨우 완공되었는데 무려 90년에 걸쳐 [[사천성]] 민강 강가 절벽에 조각되었으며 높이 71m, 폭 28m, 머리 너비만 해도 10m에 이를정도로 현존 세계 최대 좌불상이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당덕종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