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include(틀:다른 뜻1, other1=2016년 영화, rd1=덕혜옹주(영화))] 德惠翁主 [[파일:/image/busan/2010/02/25/20100225000020_0.jpg]] [[일본]]에 강제 유학길을 오르는 나이 14세 이전. 히노데(日出) 심상소학교 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얼굴이 정말로 [[흥선 대원군|할아버지]]를 닮았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환갑일 때 낳은 자식은 아버지를 꼭 빼닮는다는 속설을 상기하며 [[고종황제]]가 "과연 사실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성장 후 사진 http://www.k-heritage.tv/upload/DataFolder/now2/news/news_121221_02.jpg [[파일:FB_IMG_1474737167636.jpg]] [* 이 결혼사진에서 덕혜옹주는 평소 모습과 상당히 다르게 나왔는데, 결혼식 전에 많이 울어서 얼굴이 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케 [[이방자]] 비가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1300329205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13&officeId=00032&pageNo=5&printNo=11962&publishType=00020|덕혜옹주는 이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진 때문에 덕혜옹주가 엄청난 추녀였다는 오해도 있는 듯.]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 [목차] == 소개 == '''덕혜옹주'''(德惠翁主) 또는 이덕혜[* 구한국 시절 때 받은 '덕혜'라는 이름 외에는 덕혜옹주의 본명이 기록(호적)에 없어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덕혜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다룬 여러 매체에서도 '황녀 이덕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고종황제]]의 고명딸'''로,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귀인 양춘기(梁春基)]]이다. 양씨는 본래 [[궁녀]]였다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되었다. 양씨의 친정 오빠는 백정으로,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궐에 출입하는 귀한 신분으로 벼락출세했다. [[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 '덕혜'는 1921년에 순종황제가 내려준 작호인데,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서[* [[한국]] 측의 기록에는 그냥 '아기씨', ;복녕당 애기씨', [[일본]] 측의 기록에는 姬로만 되어 있다.]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 올릴 때 '이덕혜'가 성명으로 올라갔다. 흔히 이 덕혜옹주를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짜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4녀인 [[덕온공주]]'''[* 23세로 요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적자면 공주는 임금의 정처인 [[왕비]]의 여식(적녀), [[옹주]]는 첩인 [[후궁]]의 여식(서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밖에 [[세자]]의 적녀는 [[군주]], 서녀는 [[현주]]라고 했다.] 따라서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아닌 마지막 황녀로 보는 게 더 적합하다. 다만 이것은 지위에 따른 명칭 상의 문제고, 통상적인 황제나 왕의 딸이라는 개념에서는 마지막 공주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이러한 개념에서라면, 덕혜옹주는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으므로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맞다. == 유년기 == [[고종황제]]가 '''60세'''일 때 얻은 [[늦둥이]]라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고종이 어린 덕혜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변 유모상궁(후술되는 변복동 여사)이 어린 덕혜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면 고종은 덕혜가 놀라거나 울까봐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주상 전하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 [[덕수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덕수궁]]의 꽃' 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덕혜옹주가 조금 자라자, [[고종황제]]는 [[덕수궁]] 즉조당에 [[유치원]]을 만들기까지 했다. 함께 다닌 원생들은 덕혜옹주와 또래인 양반가의 딸들이었는데, 덕혜옹주가 제일 어렸지만 모두 덕혜옹주에게 극존칭을 사용했으며, 항상 시중을 들 [[궁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이었다. 그런데 덕혜옹주가 점점 성장하는데도, 일제는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려주지 않았다. 이에 [[고종황제]]가 직접 나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덕수궁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덕혜옹주를 보여주며 '''"이 아이가 내 딸이다"''' 라고 소개, 결국 황적에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데라우치가 관저로 돌아가서 측근들에게 '오늘은 멋지게 한 방 먹었다'라고 했다고.][* 훗날의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생각해 보면, 황적에 올리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오빠 [[영친왕]]이 '황족은 일본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 유학을 간 선례가 있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이 유치원의 보모는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라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유치원 졸업 후, 덕혜옹주는 일본인 학교인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도 신분고하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모양'''이다. 외삼촌인 양 상관이 [[덕수궁]]에 입궐할 때마다 "양 상관이가 온다"며 하대하고, "아기씨의 외가는 어디입니까?" 라고 묻는 궁인들의 질문에 생모 [[귀인 양씨]]의 친정이 아니라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인 죽동(안국동)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자녀는 생모가 누구던 간에 모두 [[왕비]]의 자녀이기도 하였으므로, 자신은 조선의 황녀라고 의식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가 덕혜옹주를 이왕가의 호적에 올려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어딘가에서는 "[[고종황제]]가 [[순헌황귀비]] 사후에 여러 궁인들을 [[후궁]]으로 삼았으나, '''일제는 [[일부일처제]] 국가라서 [[후궁]]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연히 [[후궁]] 소생들을 황실의 호적에 올리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신뢰성이 없다.''' 역시 [[동아시아]]의 왕실인 [[일본 왕실]]부터가 [[후궁]]을 잔뜩 들이는 관습이 있었고, 덕혜옹주가 태어날 때 일왕인 [[메이지 덴노|메이지 일왕]]부터가 [[고메이 덴노|고메이 일왕]]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소생이다. 게다가 [[메이지 덴노|메이지 일왕]] 역시 후궁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정실인 쇼켄황후(昭憲皇后)[* [[화족]] [[이치죠]] 가문의 딸.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결혼하면서 하루코(美子)로 개명.]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1명도 없고, 후계자인 [[다이쇼 덴노|다이쇼 일왕]]를 비롯한 5남 10녀를 모조리 후궁들의 몸에서 보았다. 후궁을 하나도 들이지 않은 최초의 [[덴노|일왕]]은 다이쇼 일왕으로, [[데이메이 황후]]가 아들만 4명을 낳았기 때문에, 굳이 측실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쇼와 일왕 역시 아내 [[고준황후]]가 결혼 후 딸만 줄줄이 4명을 낳자,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는 신하들의 압박을 뿌리쳤고, 그 정성이 닿았는지 [[고준황후]]는 1933년에야 간신히 다섯째 아이로 그토록 바라던 아들 [[아키히토]]를 낳았다.[* 만약 [[쇼와 덴노|쇼와 일왕]]이 이때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면 오늘날 [[일본 황실]]의 후계자(=남자) 부족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긴 하다.], 이에 비하면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주장이 차라리 더 신뢰성이 있다. == [[일본]]행 ==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한 [[고종황제]]는 덕혜옹주가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황제]]가 세상을 뜬 후 약혼은 깨지고,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서 [[일본]] 황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가쿠슈인|여자 가쿠슈인]][* 현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가쿠슈인 여자대학교의 전신]에 [[편입]]되었다. 이때 함께 여자 가쿠슈인에 다닌 동기들 중에는 [[메이지 덴노|메이지 일왕]]의 외손녀인 다케다노미야 아야코(竹田宮禮子) 여왕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 여왕, [[사가 히로]], 소마 유키카(相馬雪香)[* '일본 헌정의 신'이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의 딸.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저서 <德惠姬>에 소개된 유키카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유키오는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등이 있었다. 그중 유키카는 덕혜옹주를 안타깝게 여겼고,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너는 하지 않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유키카는 이 말을 한 후, [[교무실]]로 불려가 교사들로부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 강제 유학 시절 ==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런데 [[1929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때부터 처음으로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2가지 추측'''이 있다. 황실의 호적에 올라간 탓에 생모와는 공식적으로는 남남이 되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자녀로서 3년 복상을 못한 것에 크게 상심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왕직에서는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왕공족이 아닌 [[귀인 양씨]]를 위한 상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해, 덕혜옹주는 3년상이 끝난 후에 입는 천담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한 후 이틀 만에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 이 시기 즈음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일본]]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후지마로(山階宮藤磨) 왕[* [[데이메이 황후]]의 형부 야마시나노미야 키쿠마로(山階宮菊麿) 왕의 아들. 키쿠마로 왕은 [[데이메이 황후]]의 동복언니 쿠죠 노리코 (九條範子)와 결혼했으나, 노리코 비는 2남 1녀를 남기고 사망했다. 키쿠마로 왕은 시마즈 히사코(島津常子)를 후처로 맞이하여 3남을 더 낳았는데, 히사코 비의 첫 아들이 후지마로 왕이다. 후지마로 왕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거론되었으나 [[신적강하]]를 신청하여 츠쿠바 (筑波)라는 성씨를 창씨, 황족에서 [[화족]] 츠쿠바 후지마로 [[후작]]이 되었으며, 모리 키요코(毛利喜代子)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을 거론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아버지가 의문사한 뒤 일본 사회에서 고립된데다 평소 독살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곤 했는데[* [[보온병]]을 갖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보면 "독살을 당할까봐 무서워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역시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본에 온 직후에 이방자 여사가 덕혜옹주를 만났을 때 "처음 내가 본 옹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함과 영롱한 눈초리는 없었다. 나를 보고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 후 [[가쿠슈인|여자 가쿠슈인]]에 편입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영친왕]], [[이방자]]와 함께 살았다. 영친왕 부부는 아직 어리고 그동안 여러 일로 충격이 컸을 덕혜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살며 보살피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덕혜옹주를 기숙사로 보냈다고 한다.[* 참고로 [[영친왕]]은 자신에 이어 어린 여동생이 볼모로 끌려온 데 대해 매우 불쾌해 하고 있었는데, 오라비 내외가 데리고 있는 것조차 거부당한 것에 심하게 화가 나서 오랫동안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후반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등교 거부를 한다. 이후 올케 [[이방자]] 여사는 [[의사]]를 불러 덕혜옹주를 진찰하게 했는데,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덕혜옹주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으나,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여자 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영친왕 부부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덕혜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 영화 [[덕혜옹주(영화)|덕혜옹주]]의 등장인물인 한택수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당시 이왕직 장관으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다만 한창수는 한택수와 달리 해방되기 한참 전에 죽었다. 참고로 이런 한창수에게 당당하게 박찬주 여사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며 빅 엿을 날린 게 [[이우]] 공이다.]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그 결혼 반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이방자]] 여사의 기록에는 "식사도 잘 하시고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어 무사히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말은 이미 증상은 지속되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나았다는 뜻이 된다. 어쨌든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자 1931년 [[데이메이 황후]]에 의해, [[데이메이 황후]]의 오빠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를 후견인[* [[소 다케유키]]는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으로 두고 있던 [[대마도]]의 번주 출신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혼인'''하게 된다. == [[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 == 민족 감정 때문인지 [[소 다케유키]][* [[http://ruliweb.daum.net/link/bbs/read.daum?bbsId=G005&articleId=15945935&itemId=145|그에 대한 글]].][* 댓글 중에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의견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동정심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켰을 뿐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시길. 다만 [[소 다케유키]]의 인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건 간에 좋은 평가를 내리는 편이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순정남이고 동정심에서라도 남편의 도리를 다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훌륭한 것이니.]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니느니, 꼽추라느니, 덕혜옹주를 폭행했다느니 하는 소문에 시달렸다. 아예 부부가 나란히 찍은 결혼사진에서도, 다케유키는 지워버리고 덕혜옹주의 모습만 남겨 신문지상에 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 다케유키]]는 [[가쿠슈인]] 고등과와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초 엘리트[* 중학교까지는 [[대마도]]에서 다녔다.]에 허우대도 멀쩡, 아니 오히려 [[미남]]으로 부부 사이도 원만한 편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신혼 초에는 각종 행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표정도 밝았다고 한다. 다만 한쪽 눈이 [[사시]]였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 딸 마사에의 출산 == 결혼한 지 1년쯤 후인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사에(正惠)'''라는 딸이 태어났다. [[소 다케유키]]는 아픈 아내 대신 마사에를 데리고 여러 번 조선 황족들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마사에의 양육도 다케유키가 도맡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병환과 이혼 == 그러나 마사에를 낳은 후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재발했고, 점차 부부 사이도 파탄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신병]]이라는 사실이 더욱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고[* 혼마 야스코에 의하면, 다케유키를 비롯한 덕혜옹주의 주변인들이 [[정신장애]]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한다. 다케유키는 치료를 시도하려 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신분상의 이유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정신과]] [[의사]]가 아닌 안마사 등을 불러 긴장을 풀어주는 정도의 시도를 하는 것에만 그쳤던 모양이다.] [[소 다케유키]]가 아내의 병을 숨기기 위해서 집안에 감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일본 구 [[화족]] 축소에 따른 생활고 문제 탓이 컸다. 미군정은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을 평민으로 강등시켰고([[신적강하]]), 그에 따른 특권 상실로 인해 생계유지가 어려웠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덕혜옹주의 병세는 계속 심해졌고, 결국 1946년에 남편에 의해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을 주선했던 [[데이메이 황후]]가 1951년에 죽었고, 1955년[*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1955년으로 되어 있다. 다케유키도 이에 대해 특별히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덕혜옹주는 '''[[이혼]]'''을 당했다. 다소 의외인 사실로, 이 이혼은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다케유키와 [[영친왕]], [[이방자]] 여사 세 사람의 논의 이후 결정된 합의이혼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대신 오빠 부부인 [[영친왕]]ㆍ[[이방자]] 여사와 함께 협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에 다케유키는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장남 다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사실 이 때문에 더 비판받는 측면도 있긴 하다. 하지만 다케유키의 입장에서 보면 그도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고, 게다가 정신질환을 앓는 아내를 수십년에 걸쳐 감당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뒤 [[한국]]에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옛 아내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나 당시 정부에서 이를 거절하였기에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 레이타쿠(麗澤)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 선친들의 묘터에 함께 안장되었다. == 딸 마사에의 자살 == 이혼 후 1년 후인 1956년, 갓 결혼한 새댁[* 다케유키가 재혼할 즈음, 1살 위의 스즈키 노보루 (鈴木昇)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분가. 노보루는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의 중학교 교사였으며, 결혼 후 처가의 성씨를 따라 소 노보루가 되었다. 이는 장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였다고 한다.]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현해탄 ([[대한해협]])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근거 없는 소문이다. 유서에 의하면 [[야마나시]] 현과 [[나가노]] 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 정확히는 카이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불명. 분명한 건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실종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처리되었다. == 정신병원 입원 후 == 덕혜옹주의 입원비를 내준 사람은 오빠 [[영친왕]]으로,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 현재 시가로 약 30만 엔 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보면 된다. 참고로 대졸 초임 평균연봉이 6,500엔 하던 시절이니 당시로서도 상당히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한 것도 영친왕이라고 한다.[* 이게 대단한 것이, 현재의 시가로 계산해도 엄청난 금액을 내 준 거지만, 이 당시는 [[영친왕]]은 더 이상 왕공족이 아니어서 예전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신적강하]]나 [[이승만]] 정권의 황실재산 강제 국유화 등으로 인해 이때부터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한 시점이었기에, 원래 살았던 이왕가 저택마저 헐값으로 내놓는 지경에 이르는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집세를 핑계로 참의원에서 공건물을 빌렸다고 서류에 쓰고 돈을 줄 정도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이복 여동생을 위해 거액의 병원비를 내 주고 있었던 거다. 더군다나 이 시대가 가족이라 해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면 영친왕이 나름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 귀국 == 1962년에 되어서야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 시아주버님이 될 뻔했던 분. [[김을한]]의 아내 민덕임은,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함께 [[덕수궁]] 유치원을 다닌 친구이기도 하다.][* [[덕혜옹주(영화)|영화]]에서는 김장한이 직접 모셔오는 것으로 나온다.]의 노력 덕에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말 어렵게 돌아왔다. (덕혜옹주와 같은 [[전주 이씨]]지만 한낱 [[양녕대군]] 서자의 후손인, 그러면서도 자칭 프린스) [[이승만]] 대통령은 공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황족들이 귀국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전부 묵살했다. 게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다이쇼]] 덴노의 직계자손들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 전원이 '''평민'''으로 격하되어 [[일본]]에서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귀국이 이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난 [[박정희]] 대통령 때인데,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가혹한 삶을 살던 조선 황족들을 동정하는 편이었고, 어차피 [[대한민국]]이 확실하게 국가로 자리잡은 상황이라 그들이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기에 [[영친왕]]을 비롯한 생존 황족들 중에 아예 일본인이 된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을 제외한 나머지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김을한은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고 "[[고종황제]]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가쿠슈인|여자 가쿠슈인]] 재학 시절 동기들이 꽃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다. 덕혜옹주의 [[유모]]였던 변복동 여사는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는데,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하자 [[창덕궁]]에서 [[순정효황후]]가 보낸 상궁들과 함께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라 불렀고,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맞은 황실의 친척들 앞에서 옛 황실 예법을 그대로 따라 황실의 큰어른 되는 [[순정효황후]][* 이복오빠 [[순종황제]]의 아내이므로 덕혜옹주에게는 손위올케에 해당한다.]에게는 모로 꺾어 큰절을 올리고, 아랫사람 되는 [[이우]] 공의 아내 박찬주 여사[* 이우가 덕혜옹주의 또 다른 이복오빠 [[의친왕]]의 아들이므로 조카며느리에 해당.]가 자기한테 절을 할 때는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전부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적어도 본인이 [[조선]]의 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간간히 잠깐동안 정신을 차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상인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으며, [[덕혜옹주]]의 간병 및 간호는 유모 변복동 여사와 올케 [[이방자]] 여사의 몫이 되었다.[* 오빠 [[영친왕]]은 귀국 당시에는 이미 말도 못 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어 있었고, 1970년에 사망했다.] 변복동 여사는 [[1972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옹주만을 걱정했다. == 말년 == [[파일:ivDsHGn.jpg]] 말년의 덕혜옹주가 정신이 맑아졌을 때 썼다는 글. 기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영친왕|전하]][* [[순종황제]] 사후 명목상 이왕(李王)의 자리를 계승해 황실 가족들은 '왕전하' 라 불렀다.] [[이방자|비전하]]가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이구]][* [[영친왕]]의 아들. 즉 덕혜옹주의 조카다.] 씨가 보고 싶어요''' 이 글귀가 <한국사 전(傳)>과 소설 <덕혜옹주>에서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런데 이 글귀가 1983년 KBS 뉴스파노라마에 처음 공개될 무렵에는 '살고 싶어요' 부분만 공개되어서 이게 '살려 달라'는 뜻으로 왜곡이 되는 바람에 덕혜옹주가 낙선재에서 학대를 당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귀국 이후에는 다른 [[대한제국]]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1970년대 한국을 방문했던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고자 찾아온 일이 있었으나, 측근들에 의해 거절당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전처를 만나려 했던 시도였다. 그 외 덕혜옹주를 모신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정신이 간혹 맑아지면 옛 상궁들과 '''[[화투]]'''를 즐기곤 했다고 하며, 의사 표현도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때만 "싫어" 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https://cdn.mirror.wiki/http://www.epochtimes.co.kr/wp-content/uploads/2014/10/%EB%8D%95%ED%98%9C1234567891011234.png?width=400 ||<:>http://royaltombs.cha.go.kr/new/images/content/gallery/story01/st25_02.jpg?width=330|| ||<:>덕혜옹주의 빈소 ||<:>홍유릉 능역에 마련된 덕혜옹주의 무덤 || 1985년 남편 다케유키가 사망했다. 4년 후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도 78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별세한다. 장례식은 4월 25일에 황실 가족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의 앞면과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묘표]]가 새겨졌다. * 앞면 : '''大韓德惠翁主之墓(대한 덕혜옹주지묘)''' * 뒷면 : 開國五百二十一年五月二十六日生 五百九十八年四月二十一日卒 全州李后李旺載謹書(개국[* [[서력기원]]이 아닌, [[대한제국]] 이전 잠시 쓰였던 연호 '개국(開國, [[태조(조선)|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서기 1392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을 사용했다.] 521년 5월 26일 생 598년 4월 21일 졸 전주 이씨 후손 이왕재 삼가 씀) 덕혜옹주가 사망하고 9일 후, 올케 [[이방자]]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우리황실사랑회 등 대표적인 황실복원, 근왕주의 단체 및 모임에서 [[대동종약원|전주이씨종친회]], 혹은 [[남양주시]]에 옹주의 제향을 지낼 것을 건의했으나 전자는 --말 같잖은--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후자 측에서는 관할 밖의 일이란 이유로 이뤄지지 못해 우리황실사랑회가 이갑 황손[* [[의친왕]]의 9남. 호적명은 해룡이며, 도미하여 [[미국]]에서 거주. 국내에 몇 번 귀국하여 남긴 인터뷰, 방송 출연 등이 있다. 사적으로는 덕혜옹주와 고모/조카의 관계가 된다. 2014년 별세.]으로부터 일임 받아 추모제향을 지냈다. 2014년 4월 제향부터 전주이씨 종친회에 제향 업무를 이관하였다. 2015년 6월 24일 [[일본]]으로부터 덕혜옹주가 입던 한복 유품을 돌려받았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9/1821282_19354.html|MBC 뉴스테스크 덕혜옹주 사망 보도]] == 대중매체에서 == 1996년 8월 [[문화방송|MBC]]에서 [[8.15 광복]] 특집극으로 <덕혜-[[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제목의 단막 드라마를 방영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연속극이 아닌 [[8.15 광복]] 특집 1일 2부작 단막극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까지는 덕혜옹주에 대한 존재감은 잘 알려지지 못했으며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리 주목도 받지 못하였다. 당시 덕혜옹주 배역은 배우 이혜숙이 맡았으며, [[고종(조선)|고종]] 배역은 배우 故 [[이낙훈]]이 맡았고, 영친왕[* 해당 드라마에서는 영왕이라고 한다.] 역은 김홍석이 맡았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덕혜옹주 역을 아역 배우 전유경과 [[김민정(1982)|김민정]]이 각각 따로 연기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공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인]] 여자아이라는 '헤이코' 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옥에 티가 있다. 첫 번째로 덕혜옹주의 약혼자 이름이 김장한이 아닌 '김재영([[전광렬]] 분)'으로 나온다는 점, 그리고 배경이 1918년으로 되었을 때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이왕직 장관[* [[조선총독부]]의 명령하에 조선왕조 이씨 왕가를 감독하는 관직] '한창수' 라는 인물([[김동현(1950년)|김동현]] 분)도 등장하였는데[* [[대한제국]] 시절 실존했던 관료로 알려졌다(1862~1921).], 1919년 [[고종황제]]가 붕어하고 [[고종황제]]가 붕어한 지 5년이 지난[* 연도로 따지자면 1924년으로 추정.] 내용 중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여전히 [[총독]]으로 등장하여 시대착오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1916년에 [[일본]] 수상이 되었다가 1919년 사망하였다.]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그것도 존재하지도 못했던 시대에 아예 등장시키는 부실감~~ [* 한술 더 떠서 한창수는 덕혜옹주-소 다케유키 정략결혼 시기인 1935년에도 살아서 등장한다!!] 이건 고증 오류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 참고로 헤이코라는 여자아이는 드라마 시작 부분에서 백발의 노인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김서라가 열연함), 1996년 [[일본]] [[도쿄]]에 있는 모 대학에 들어가 그 곳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덕혜옹주의 복장을 확인하기 위해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곳 보관 감독자 역할로 배우 [[최불암]]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 [[소 다케유키]](정승호 분)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오면서 덕혜옹주를 마구 박해하였고, 그럼에도 덕혜옹주는 꿋꿋이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자존심을 지켜 왔다고 나온다. 명백한 고증오류. 2007년에는 KBS <한국사 전(傳)>을 통해 덕혜옹주의 삶이 재조명되기도 했고, 2009년에는 소설가 권비영이 덕혜옹주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을 냈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영향인지 사람들 사이의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 [[학력위조]]로 화제가 되었던 ~~[[이대]] 나온 걸로 몇십년 동안 행세하던 여자~~ 윤석화가 덕혜옹주 역으로 열연한 적이 있었다. 열연은 열연인데 내용 자체는 위에 소개된 잘못된 이야기들, 이를테면 [[소 다케유키]]가 꼽추에 [[천하의 개쌍놈]]이니 하는 것들을 총 집합한 것으로 걸러서 봐야 한다. 그런데 2010년 9월 26일 이 소설 <덕혜옹주>가 표절 문제가 제기되었다. 동명의 소설 <德惠姬>를 출간한 일본 작가 혼마 야스코(本馬恭子)가 [[한겨레신문]] 독자 투고란을 통해, "권비영의 소설은 나의 표현과 다케유키가 썼던 시의 해석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비영도 과거 인터뷰에서 "일본 소설 <德惠姬>를 많이 참고했고, 2008년에 그 책이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에 원고의 상당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고 밝혔다. 위 발언이 "그거 번역 안 되었으면 그대로 출판했다" 로 해석될 수도 있어 논란은 가속화 중. 2013년부터 70주년 특집으로 뮤지컬이 기획되었다. 주연인 덕혜, 정혜(마사에) 역을 맡은 문혜영이 직접 각본을 썼고 2015년에 [[크레용팝]] [[초아(크레용팝)|초아]]가 문혜영과 더블캐스팅이 되어 공연중이다. 초아의 연기력에 대해, 문혜영이 호평한 바가 있고, 현장 반응도 뜨겁다. 2016년에는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허진호 감독, 손예진 박해일 정상훈 주연으로 2016년 8월 개봉했다. [[덕혜옹주(영화)]] 항목 참조. == 평가 == 소설과 영화 <[[덕혜옹주(영화)|덕혜옹주]]>가 나오면서, [[대한제국]]의 황족들에 대하여 재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 비판 === 대중매체에서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이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완전히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황족들과 동일하게 대우받았고 [[신적강하]] 이전까지는 풍족하게 살았다[* 하지만 정신쇠약 증세와 조현병 증세에 시달리느라 환경의 주어짐만큼 즐기지는 못했을듯하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도 간혹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독립운동과는 아무 상관없이 숨 죽이며 살았다.[* 때문에 영화 [[덕혜옹주(영화)|덕혜옹주]]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진짜 [[독립운동가]]도 아닌 사람을 독립 운동에 앞장선 사람처럼 대놓고 왜곡한 것이 비판의 요지.] === 옹호 ===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황녀의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덕혜옹주는 13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도 떨어지고 낯선 곳, 그것도 아버지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에 가서 늘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이방자]] 여사의 기록이나 [[가쿠슈인]]의 일본 학생의 기록을 봐서는 자신도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듯하다. 덕혜옹주의 조현병이나 신경쇠약 같은 정신질환이 아무 이유없이 생긴 게 아니다. 암살을 두려워해서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름의 풍족한 생활을 했다는 것도 한 나라의 황녀로써 비판거리는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덕혜옹주에 대한 친일 논란이 없진않지만, 영친왕처럼 친일 논란이 심각하진 않다. 덕혜옹주는 독살 공포 등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심했고 이혼과 정신병 등 불행한 삶을 보낸 것에 비해 영친왕은 유복한 생활을 누리고 신적강하 이후에는 외국의 지원에 의존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인듯. 덕혜옹주가 일본 황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에도 어렵다. 그랬다면 [[소 다케유키]]를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 다케유키에게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력이 약한 대마도 도주 후손의 백작은 한 나라 황녀의 신랑감으로서는 다소 떨어졌다. 실제로도 당시 사람들은 덕혜옹주의 신랑감을 황족 중에서 정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류:대한제국의 황족]]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다른 뜻1 (원본 보기) 덕혜옹주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