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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惠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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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강제 유학길을 오르는 나이 14세 이전. 히노데(日出) 심상소학교 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얼굴이 정말로 할아버지를 닮았다[1]
성장 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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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
목차
1 소개
덕혜옹주(德惠翁主) 또는 이덕혜[3]는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고종황제의 고명딸로,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춘기(梁春基)이다. 양씨는 본래 궁녀였다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되었다. 양씨의 친정 오빠는 백정으로,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궐에 출입하는 귀한 신분으로 벼락출세했다.
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 '덕혜'는 1921년에 순종황제가 내려준 작호인데,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서[4]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 올릴 때 '이덕혜'가 성명으로 올라갔다.
흔히 이 덕혜옹주를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짜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4녀인 덕온공주[5]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적자면 공주는 임금의 정처인 왕비의 여식(적녀), 옹주는 첩인 후궁의 여식(서녀)을 가리키는 말이다.[6] 따라서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아닌 마지막 황녀로 보는 게 더 적합하다. 다만 이것은 지위에 따른 명칭 상의 문제고, 통상적인 황제나 왕의 딸이라는 개념에서는 마지막 공주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이러한 개념에서라면, 덕혜옹주는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으므로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맞다.
2 유년기
고종황제가 60세일 때 얻은 늦둥이라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고종이 어린 덕혜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변 유모상궁(후술되는 변복동 여사)이 어린 덕혜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면 고종은 덕혜가 놀라거나 울까봐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주상 전하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
덕수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덕수궁의 꽃' 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덕혜옹주가 조금 자라자, 고종황제는 덕수궁 즉조당에 유치원을 만들기까지 했다. 함께 다닌 원생들은 덕혜옹주와 또래인 양반가의 딸들이었는데, 덕혜옹주가 제일 어렸지만 모두 덕혜옹주에게 극존칭을 사용했으며, 항상 시중을 들 궁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이었다.
그런데 덕혜옹주가 점점 성장하는데도, 일제는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려주지 않았다. 이에 고종황제가 직접 나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덕수궁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덕혜옹주를 보여주며 "이 아이가 내 딸이다" 라고 소개, 결국 황적에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7][8] 참고로 이 유치원의 보모는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라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유치원 졸업 후, 덕혜옹주는 일본인 학교인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도 신분고하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모양이다. 외삼촌인 양 상관이 덕수궁에 입궐할 때마다 "양 상관이가 온다"며 하대하고, "아기씨의 외가는 어디입니까?" 라고 묻는 궁인들의 질문에 생모 귀인 양씨의 친정이 아니라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인 죽동(안국동)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자녀는 생모가 누구던 간에 모두 왕비의 자녀이기도 하였으므로, 자신은 조선의 황녀라고 의식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가 덕혜옹주를 이왕가의 호적에 올려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어딘가에서는 "고종황제가 순헌황귀비 사후에 여러 궁인들을 후궁으로 삼았으나, 일제는 일부일처제 국가라서 후궁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연히 후궁 소생들을 황실의 호적에 올리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신뢰성이 없다. 역시 동아시아의 왕실인 일본 왕실부터가 후궁을 잔뜩 들이는 관습이 있었고, 덕혜옹주가 태어날 때 일왕인 메이지 일왕부터가 고메이 일왕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소생이다. 게다가 메이지 일왕 역시 후궁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정실인 쇼켄황후(昭憲皇后)[9]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1명도 없고, 후계자인 다이쇼 일왕를 비롯한 5남 10녀를 모조리 후궁들의 몸에서 보았다.
후궁을 하나도 들이지 않은 최초의 일왕은 다이쇼 일왕으로, 데이메이 황후가 아들만 4명을 낳았기 때문에, 굳이 측실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쇼와 일왕 역시 아내 고준황후가 결혼 후 딸만 줄줄이 4명을 낳자,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는 신하들의 압박을 뿌리쳤고, 그 정성이 닿았는지 고준황후는 1933년에야 간신히 다섯째 아이로 그토록 바라던 아들 아키히토를 낳았다.[10], 이에 비하면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주장이 차라리 더 신뢰성이 있다.
3 일본행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한 고종황제는 덕혜옹주가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황제가 세상을 뜬 후 약혼은 깨지고,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서 일본 황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11]에 편입되었다.
이때 함께 여자 가쿠슈인에 다닌 동기들 중에는 메이지 일왕의 외손녀인 다케다노미야 아야코(竹田宮禮子) 여왕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 여왕, 사가 히로, 소마 유키카(相馬雪香)[12] 등이 있었다. 그중 유키카는 덕혜옹주를 안타깝게 여겼고,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너는 하지 않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유키카는 이 말을 한 후, 교무실로 불려가 교사들로부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4 강제 유학 시절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런데 1929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때부터 처음으로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2가지 추측이 있다. 황실의 호적에 올라간 탓에 생모와는 공식적으로는 남남이 되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자녀로서 3년 복상을 못한 것에 크게 상심했기 때문이라는 설과[13] 이 시기 즈음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일본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후지마로(山階宮藤磨) 왕[14]을 거론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아버지가 의문사한 뒤 일본 사회에서 고립된데다 평소 독살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곤 했는데[15] 이 역시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본에 온 직후에 이방자 여사가 덕혜옹주를 만났을 때 "처음 내가 본 옹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함과 영롱한 눈초리는 없었다. 나를 보고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 후 여자 가쿠슈인에 편입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영친왕, 이방자와 함께 살았다. 영친왕 부부는 아직 어리고 그동안 여러 일로 충격이 컸을 덕혜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살며 보살피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덕혜옹주를 기숙사로 보냈다고 한다.[16]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후반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등교 거부를 한다. 이후 올케 이방자 여사는 의사를 불러 덕혜옹주를 진찰하게 했는데,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덕혜옹주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으나,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여자 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영친왕 부부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덕혜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17]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그 결혼 반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이방자 여사의 기록에는 "식사도 잘 하시고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어 무사히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말은 이미 증상은 지속되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나았다는 뜻이 된다.
어쨌든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자 1931년 데이메이 황후에 의해, 데이메이 황후의 오빠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를 후견인[18]으로 두고 있던 대마도의 번주 출신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혼인하게 된다.
5 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
민족 감정 때문인지 소 다케유키[19][20]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니느니, 꼽추라느니, 덕혜옹주를 폭행했다느니 하는 소문에 시달렸다. 아예 부부가 나란히 찍은 결혼사진에서도, 다케유키는 지워버리고 덕혜옹주의 모습만 남겨 신문지상에 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 다케유키는 가쿠슈인 고등과와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초 엘리트[21]에 허우대도 멀쩡, 아니 오히려 미남으로 부부 사이도 원만한 편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신혼 초에는 각종 행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표정도 밝았다고 한다. 다만 한쪽 눈이 사시였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6 딸 마사에의 출산
결혼한 지 1년쯤 후인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사에(正惠)라는 딸이 태어났다. 소 다케유키는 아픈 아내 대신 마사에를 데리고 여러 번 조선 황족들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마사에의 양육도 다케유키가 도맡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7 병환과 이혼
그러나 마사에를 낳은 후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재발했고, 점차 부부 사이도 파탄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신병이라는 사실이 더욱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고[22] 소 다케유키가 아내의 병을 숨기기 위해서 집안에 감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일본 구 화족 축소에 따른 생활고 문제 탓이 컸다. 미군정은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을 평민으로 강등시켰고(신적강하), 그에 따른 특권 상실로 인해 생계유지가 어려웠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덕혜옹주의 병세는 계속 심해졌고, 결국 1946년에 남편에 의해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을 주선했던 데이메이 황후가 1951년에 죽었고, 1955년[23] 덕혜옹주는 이혼을 당했다. 다소 의외인 사실로, 이 이혼은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다케유키와 영친왕, 이방자 여사 세 사람의 논의 이후 결정된 합의이혼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대신 오빠 부부인 영친왕ㆍ이방자 여사와 함께 협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에 다케유키는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장남 다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24] 덕혜옹주가 귀국한 뒤 한국에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옛 아내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나 당시 정부에서 이를 거절하였기에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 레이타쿠(麗澤)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 선친들의 묘터에 함께 안장되었다.
8 딸 마사에의 자살
이혼 후 1년 후인 1956년, 갓 결혼한 새댁[25]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현해탄 (대한해협)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근거 없는 소문이다. 유서에 의하면 야마나시 현과 나가노 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26]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불명. 분명한 건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실종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처리되었다.
9 정신병원 입원 후
덕혜옹주의 입원비를 내준 사람은 오빠 영친왕으로,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27]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한 것도 영친왕이라고 한다.[28]
10 귀국
1962년에 되어서야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29][30]의 노력 덕에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31] 김을한은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고 "고종황제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여자 가쿠슈인 재학 시절 동기들이 꽃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다. 덕혜옹주의 유모였던 변복동 여사는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는데,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하자 창덕궁에서 순정효황후가 보낸 상궁들과 함께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라 불렀고,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맞은 황실의 친척들 앞에서 옛 황실 예법을 그대로 따라 황실의 큰어른 되는 순정효황후[32]에게는 모로 꺾어 큰절을 올리고, 아랫사람 되는 이우 공의 아내 박찬주 여사[33]가 자기한테 절을 할 때는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전부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적어도 본인이 조선의 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간간히 잠깐동안 정신을 차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상인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으며, 덕혜옹주의 간병 및 간호는 유모 변복동 여사와 올케 이방자 여사의 몫이 되었다.[34] 변복동 여사는 1972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옹주만을 걱정했다.
11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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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덕혜옹주가 정신이 맑아졌을 때 썼다는 글. 기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이 글귀가 <한국사 전(傳)>과 소설 <덕혜옹주>에서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런데 이 글귀가 1983년 KBS 뉴스파노라마에 처음 공개될 무렵에는 '살고 싶어요' 부분만 공개되어서 이게 '살려 달라'는 뜻으로 왜곡이 되는 바람에 덕혜옹주가 낙선재에서 학대를 당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귀국 이후에는 다른 대한제국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1970년대 한국을 방문했던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고자 찾아온 일이 있었으나, 측근들에 의해 거절당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전처를 만나려 했던 시도였다. 그 외 덕혜옹주를 모신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정신이 간혹 맑아지면 옛 상궁들과 화투를 즐기곤 했다고 하며, 의사 표현도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때만 "싫어" 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빈소 | 홍유릉 능역에 마련된 덕혜옹주의 무덤 |
1985년 남편 다케유키가 사망했다. 4년 후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도 78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별세한다. 장례식은 4월 25일에 황실 가족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의 앞면과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묘표가 새겨졌다.
- 앞면 : 大韓德惠翁主之墓(대한 덕혜옹주지묘)
- 뒷면 : 開國五百二十一年五月二十六日生 五百九十八年四月二十一日卒 全州李后李旺載謹書(개국[37] 521년 5월 26일 생 598년 4월 21일 졸 전주 이씨 후손 이왕재 삼가 씀)
덕혜옹주가 사망하고 9일 후, 올케 이방자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우리황실사랑회 등 대표적인 황실복원, 근왕주의 단체 및 모임에서 전주이씨종친회, 혹은 남양주시에 옹주의 제향을 지낼 것을 건의했으나 전자는 말 같잖은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후자 측에서는 관할 밖의 일이란 이유로 이뤄지지 못해 우리황실사랑회가 이갑 황손[38]으로부터 일임 받아 추모제향을 지냈다. 2014년 4월 제향부터 전주이씨 종친회에 제향 업무를 이관하였다.
2015년 6월 24일 일본으로부터 덕혜옹주가 입던 한복 유품을 돌려받았다.
12 대중매체에서
1996년 8월 MBC에서 8.15 광복 특집극으로 <덕혜-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제목의 단막 드라마를 방영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연속극이 아닌 8.15 광복 특집 1일 2부작 단막극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까지는 덕혜옹주에 대한 존재감은 잘 알려지지 못했으며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리 주목도 받지 못하였다.
당시 덕혜옹주 배역은 배우 이혜숙이 맡았으며, 고종 배역은 배우 故 이낙훈이 맡았고, 영친왕[39] 역은 김홍석이 맡았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덕혜옹주 역을 아역 배우 전유경과 김민정이 각각 따로 연기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공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인 여자아이라는 '헤이코' 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옥에 티가 있다. 첫 번째로 덕혜옹주의 약혼자 이름이 김장한이 아닌 '김재영(전광렬 분)'으로 나온다는 점, 그리고 배경이 1918년으로 되었을 때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이왕직 장관[40] '한창수' 라는 인물(김동현 분)도 등장하였는데[41], 1919년 고종황제가 붕어하고 고종황제가 붕어한 지 5년이 지난[42] 내용 중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여전히 총독으로 등장하여 시대착오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43]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그것도 존재하지도 못했던 시대에 아예 등장시키는 부실감 [44] 이건 고증 오류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
참고로 헤이코라는 여자아이는 드라마 시작 부분에서 백발의 노인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김서라가 열연함), 1996년 일본 도쿄에 있는 모 대학에 들어가 그 곳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덕혜옹주의 복장을 확인하기 위해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곳 보관 감독자 역할로 배우 최불암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 소 다케유키(정승호 분)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오면서 덕혜옹주를 마구 박해하였고, 그럼에도 덕혜옹주는 꿋꿋이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자존심을 지켜 왔다고 나온다. 명백한 고증오류.
2007년에는 KBS <한국사 전(傳)>을 통해 덕혜옹주의 삶이 재조명되기도 했고, 2009년에는 소설가 권비영이 덕혜옹주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을 냈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영향인지 사람들 사이의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
학력위조로 화제가 되었던 이대 나온 걸로 몇십년 동안 행세하던 여자 윤석화가 덕혜옹주 역으로 열연한 적이 있었다. 열연은 열연인데 내용 자체는 위에 소개된 잘못된 이야기들, 이를테면 소 다케유키가 꼽추에 천하의 개쌍놈이니 하는 것들을 총 집합한 것으로 걸러서 봐야 한다.
그런데 2010년 9월 26일 이 소설 <덕혜옹주>가 표절 문제가 제기되었다. 동명의 소설 <德惠姬>를 출간한 일본 작가 혼마 야스코(本馬恭子)가 한겨레신문 독자 투고란을 통해, "권비영의 소설은 나의 표현과 다케유키가 썼던 시의 해석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비영도 과거 인터뷰에서 "일본 소설 <德惠姬>를 많이 참고했고, 2008년에 그 책이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에 원고의 상당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고 밝혔다. 위 발언이 "그거 번역 안 되었으면 그대로 출판했다" 로 해석될 수도 있어 논란은 가속화 중.
2013년부터 70주년 특집으로 뮤지컬이 기획되었다. 주연인 덕혜, 정혜(마사에) 역을 맡은 문혜영이 직접 각본을 썼고 2015년에 크레용팝 초아가 문혜영과 더블캐스팅이 되어 공연중이다. 초아의 연기력에 대해, 문혜영이 호평한 바가 있고, 현장 반응도 뜨겁다.
2016년에는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허진호 감독, 손예진 박해일 정상훈 주연으로 2016년 8월 개봉했다. 덕혜옹주(영화) 항목 참조.
13 평가
소설과 영화 <덕혜옹주>가 나오면서, 대한제국의 황족들에 대하여 재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13.1 비판
대중매체에서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이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완전히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황족들과 동일하게 대우받았고 신적강하 이전까지는 풍족하게 살았다[45]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도 간혹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독립운동과는 아무 상관없이 숨 죽이며 살았다.[46]
13.2 옹호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황녀의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덕혜옹주는 13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도 떨어지고 낯선 곳, 그것도 아버지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에 가서 늘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이방자 여사의 기록이나 가쿠슈인의 일본 학생의 기록을 봐서는 자신도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듯하다. 덕혜옹주의 조현병이나 신경쇠약 같은 정신질환이 아무 이유없이 생긴 게 아니다. 암살을 두려워해서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름의 풍족한 생활을 했다는 것도 한 나라의 황녀로써 비판거리는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덕혜옹주에 대한 친일 논란이 없진않지만, 영친왕처럼 친일 논란이 심각하진 않다. 덕혜옹주는 독살 공포 등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심했고 이혼과 정신병 등 불행한 삶을 보낸 것에 비해 영친왕은 유복한 생활을 누리고 신적강하 이후에는 외국의 지원에 의존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인듯.
덕혜옹주가 일본 황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에도 어렵다. 그랬다면 소 다케유키를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 다케유키에게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력이 약한 대마도 도주 후손의 백작은 한 나라 황녀의 신랑감으로서는 다소 떨어졌다. 실제로도 당시 사람들은 덕혜옹주의 신랑감을 황족 중에서 정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당시에는 아버지가 환갑일 때 낳은 자식은 아버지를 꼭 빼닮는다는 속설을 상기하며 고종황제가 "과연 사실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 ↑ 이 결혼사진에서 덕혜옹주는 평소 모습과 상당히 다르게 나왔는데, 결혼식 전에 많이 울어서 얼굴이 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케 이방자 비가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이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진 때문에 덕혜옹주가 엄청난 추녀였다는 오해도 있는 듯.
- ↑ 구한국 시절 때 받은 '덕혜'라는 이름 외에는 덕혜옹주의 본명이 기록(호적)에 없어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덕혜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다룬 여러 매체에서도 '황녀 이덕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 ↑ 한국 측의 기록에는 그냥 '아기씨', ;복녕당 애기씨', 일본 측의 기록에는 姬로만 되어 있다.
- ↑ 23세로 요절
- ↑ 그밖에 세자의 적녀는 군주, 서녀는 현주라고 했다.
- ↑ 이후 데라우치가 관저로 돌아가서 측근들에게 '오늘은 멋지게 한 방 먹었다'라고 했다고.
- ↑ 훗날의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생각해 보면, 황적에 올리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오빠 영친왕이 '황족은 일본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 유학을 간 선례가 있었으니 말이다.
- ↑ 화족 이치죠 가문의 딸.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결혼하면서 하루코(美子)로 개명.
- ↑ 만약 쇼와 일왕이 이때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면 오늘날 일본 황실의 후계자(=남자) 부족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긴 하다.
- ↑ 현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가쿠슈인 여자대학교의 전신
- ↑ '일본 헌정의 신'이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의 딸.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저서 <德惠姬>에 소개된 유키카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유키오는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 ↑ 이왕직에서는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왕공족이 아닌 귀인 양씨를 위한 상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해, 덕혜옹주는 3년상이 끝난 후에 입는 천담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한 후 이틀 만에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
- ↑ 데이메이 황후의 형부 야마시나노미야 키쿠마로(山階宮菊麿) 왕의 아들. 키쿠마로 왕은 데이메이 황후의 동복언니 쿠죠 노리코 (九條範子)와 결혼했으나, 노리코 비는 2남 1녀를 남기고 사망했다. 키쿠마로 왕은 시마즈 히사코(島津常子)를 후처로 맞이하여 3남을 더 낳았는데, 히사코 비의 첫 아들이 후지마로 왕이다. 후지마로 왕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거론되었으나 신적강하를 신청하여 츠쿠바 (筑波)라는 성씨를 창씨, 황족에서 화족 츠쿠바 후지마로 후작이 되었으며, 모리 키요코(毛利喜代子)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 ↑ 보온병을 갖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보면 "독살을 당할까봐 무서워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 참고로 영친왕은 자신에 이어 어린 여동생이 볼모로 끌려온 데 대해 매우 불쾌해 하고 있었는데, 오라비 내외가 데리고 있는 것조차 거부당한 것에 심하게 화가 나서 오랫동안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 ↑ 영화 덕혜옹주의 등장인물인 한택수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당시 이왕직 장관으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다만 한창수는 한택수와 달리 해방되기 한참 전에 죽었다. 참고로 이런 한창수에게 당당하게 박찬주 여사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며 빅 엿을 날린 게 이우 공이다.
- ↑ 소 다케유키는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 ↑ 그에 대한 글.
- ↑ 댓글 중에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의견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동정심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켰을 뿐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시길. 다만 소 다케유키의 인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건 간에 좋은 평가를 내리는 편이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순정남이고 동정심에서라도 남편의 도리를 다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훌륭한 것이니.
- ↑ 중학교까지는 대마도에서 다녔다.
- ↑ 혼마 야스코에 의하면, 다케유키를 비롯한 덕혜옹주의 주변인들이 정신장애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한다. 다케유키는 치료를 시도하려 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신분상의 이유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정신과 의사가 아닌 안마사 등을 불러 긴장을 풀어주는 정도의 시도를 하는 것에만 그쳤던 모양이다.
- ↑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1955년으로 되어 있다. 다케유키도 이에 대해 특별히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 사실 이 때문에 더 비판받는 측면도 있긴 하다. 하지만 다케유키의 입장에서 보면 그도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고, 게다가 정신질환을 앓는 아내를 수십년에 걸쳐 감당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 ↑ 다케유키가 재혼할 즈음, 1살 위의 스즈키 노보루 (鈴木昇)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분가. 노보루는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의 중학교 교사였으며, 결혼 후 처가의 성씨를 따라 소 노보루가 되었다. 이는 장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였다고 한다.
- ↑ 정확히는 카이고마가타케 산.
- ↑ 현재 시가로 약 30만 엔 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보면 된다. 참고로 대졸 초임 평균연봉이 6,500엔 하던 시절이니 당시로서도 상당히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
- ↑ 이게 대단한 것이, 현재의 시가로 계산해도 엄청난 금액을 내 준 거지만, 이 당시는 영친왕은 더 이상 왕공족이 아니어서 예전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신적강하나 이승만 정권의 황실재산 강제 국유화 등으로 인해 이때부터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한 시점이었기에, 원래 살았던 이왕가 저택마저 헐값으로 내놓는 지경에 이르는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집세를 핑계로 참의원에서 공건물을 빌렸다고 서류에 쓰고 돈을 줄 정도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이복 여동생을 위해 거액의 병원비를 내 주고 있었던 거다. 더군다나 이 시대가 가족이라 해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면 영친왕이 나름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 ↑ 시아주버님이 될 뻔했던 분. 김을한의 아내 민덕임은,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함께 덕수궁 유치원을 다닌 친구이기도 하다.
- ↑ 영화에서는 김장한이 직접 모셔오는 것으로 나온다.
- ↑ 정말 어렵게 돌아왔다. (덕혜옹주와 같은 전주 이씨지만 한낱 양녕대군 서자의 후손인, 그러면서도 자칭 프린스) 이승만 대통령은 공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황족들이 귀국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전부 묵살했다. 게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다이쇼 덴노의 직계자손들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 전원이 평민으로 격하되어 일본에서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귀국이 이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난 박정희 대통령 때인데,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가혹한 삶을 살던 조선 황족들을 동정하는 편이었고, 어차피 대한민국이 확실하게 국가로 자리잡은 상황이라 그들이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기에 영친왕을 비롯한 생존 황족들 중에 아예 일본인이 된 이건을 제외한 나머지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 ↑ 이복오빠 순종황제의 아내이므로 덕혜옹주에게는 손위올케에 해당한다.
- ↑ 이우가 덕혜옹주의 또 다른 이복오빠 의친왕의 아들이므로 조카며느리에 해당.
- ↑ 오빠 영친왕은 귀국 당시에는 이미 말도 못 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어 있었고, 1970년에 사망했다.
- ↑ 순종황제 사후 명목상 이왕(李王)의 자리를 계승해 황실 가족들은 '왕전하' 라 불렀다.
- ↑ 영친왕의 아들. 즉 덕혜옹주의 조카다.
- ↑ 서력기원이 아닌, 대한제국 이전 잠시 쓰였던 연호 '개국(開國,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서기 1392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을 사용했다.
- ↑ 의친왕의 9남. 호적명은 해룡이며, 도미하여 미국에서 거주. 국내에 몇 번 귀국하여 남긴 인터뷰, 방송 출연 등이 있다. 사적으로는 덕혜옹주와 고모/조카의 관계가 된다. 2014년 별세.
- ↑ 해당 드라마에서는 영왕이라고 한다.
- ↑ 조선총독부의 명령하에 조선왕조 이씨 왕가를 감독하는 관직
- ↑ 대한제국 시절 실존했던 관료로 알려졌다(1862~1921).
- ↑ 연도로 따지자면 1924년으로 추정.
- ↑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1916년에 일본 수상이 되었다가 1919년 사망하였다.
- ↑ 한술 더 떠서 한창수는 덕혜옹주-소 다케유키 정략결혼 시기인 1935년에도 살아서 등장한다!!
- ↑ 하지만 정신쇠약 증세와 조현병 증세에 시달리느라 환경의 주어짐만큼 즐기지는 못했을듯하다
- ↑ 때문에 영화 덕혜옹주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진짜 독립운동가도 아닌 사람을 독립 운동에 앞장선 사람처럼 대놓고 왜곡한 것이 비판의 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