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항목: [[아키히토/가족관계]], [[왕자]], [[차남]] ||<table align=center><:>http://ef81hokutosei.way-nifty.com/photos/uncategorized/2012/11/28/2.jpg||<:>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3/Japanese_Crest_of_Hitachi_no_miya.svg/200px-Japanese_Crest_of_Hitachi_no_miya.svg.png || ||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 (常陸宮 正仁親王) || 히타치노미야의 문장 || * 생몰년 : [[1935년]] [[11월 28일]] ~ (현재) [목차] == 개요 == [[일본]]의 [[황족]]. [[쇼와 덴노]]와 [[고준황후]]의 차남이자 [[아키히토]] 덴노의 남동생. 어릴적 칭호는 요시노미야(義宮), 현재의 궁호는 히타치노미야(常陸宮).[* 궁호는 지명에서 따오는 게 일반적이다. 히타치(常陸)는 지금의 [[이바라키]] 현의 옛 이름.] 2014년 현재 승계서열 4위. == 성장 == http://www.yuko2ch.net/mako/imgbbs3jik/img-box/img20070925014444.jpg 어린시절 1935년 11월,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차남이자 6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아키히토]] 덴노와는 2살 터울. 덴노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결혼 전까지는 [[칭호]]인 요시노미야(義宮)로 호칭했다. 1939년 만 4살 때 그 시절의 관례에 따라 궁궐을 나와 따로 양육되었다. 이 무렵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는 "[[영국]] 왕실에서는 자녀를 직접 키우는데, [[일본]]은 왜 이래야만 하는가?!"라며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1959년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로 화제를 모으며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온 [[쇼다 미치코]]는, 관례를 깨고 2남 1녀를 직접 키우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아이들을 친부모 곁에서 길렀다.]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았고, 몸이 허약했다. 패전 후에는 마사히토 친왕 자신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만화 캐릭터의 이름인 '카세이(火星) 쨩'이라는 애칭으로 국민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고, 형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새로운 '열린 황실'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잡았다. http://www.visit.city-tokyo-nakano.jp/wp-content/uploads/2013/10/2d7e9358021c6cdfe359e5d04b9d6c57-202x249.jpg 이게 카세이 짱 1958년 [[가쿠슈인]] 대학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했고[* [[히로히토]] 덴노의 2남 5녀 가운데서 유일한 학사학위 보유자이다. [[아키히토]] 덴노는 대학 시절 1년간 외유했던 것 때문에 동기들과 함께 졸업할 수 없게 되자, 학교 수업만 듣고 졸업은 하지 않았다. ~~왕 노릇하는데 졸업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여자 가쿠슈인, 셋째 누나 [[다카츠카사 카즈코]]는 가쿠슈인 [[여고|여자 고등과]]만을 졸업했다. 넷째 누나 [[이케다 아츠코]]는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現 가쿠슈인 여대) 가정생활과를 졸업했고, 여동생 [[시마즈 타카코]]는 가쿠슈인 대학 [[영문과]]를 다니던 중 결혼 관계로 중퇴했다. 둘째 누나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공주는 생후 6개월 만에 요절.], [[도쿄대학]] [[대학원]] 연구생으로 지내며 동물학을 전공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 명예박사, 미네소타 대학 명예박사 등의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독일]] 암 학회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 결혼 == [[1964년]] [[9월 30일]] 지금의 아내인 쓰가루 하나코(津輕華子)와 결혼했으며,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친왕가인 히타치노미야(常陸宮) 궁가를 창설했다. http://fimg.freeml.com/data/photo/70/43/7587043/l_0157bc7373be53b6b29c446bd73576ce348aed6c.jpg 특히 히타치노미야 궁가는 전후(戰後) 처음 창설된 궁가인데다, 결혼 다음날인 10월 1일에는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되고, 10월 10일에는 [[1964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만큼, 전후 부흥을 실감케 하며 당시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식을 올렸다. 그러나 하나코 친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마사히토 친왕이 무정자증~~[[고자]]~~이라는 소문이 거의 정설.] 특히 평민[* 말이 평민이지 대 재벌가의 딸이며 외가는 옛 [[화족]] 가문.] 출신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했던 어머니 [[나가코 황후]]를 비롯한 황족 및 구황족 인사들은, 이번만큼은 [[화족]] 가문의 딸을 뽑아서 결혼시켰는데도 자식이 없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을 듯. http://www.kunaicho.go.jp/activity/activity/04/img/hitachi-kaiken-h17-02.jpg 황실전범 상 [[양자]]를 들일 수도 없는 처지라서, 히타치노미야 부부의 애견에 대한 정은 각별하다. 이후 [[암]] 연구를 계속하여, 1969년부터 재단법인 일본 암연구회 암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2001년 1월부터는 암연구회 명예총재로 있다. == 기타 == * 가뜩이나 내성적인 성격에 자식도 없어서 [[일본 황실]]의 마이너한 존재. 조카 [[후미히토]] 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승계서열이 밀렸던 사촌동생 ~~이슈메이커~~[[토모히토]](寬仁) 친왕[* 2012년 암으로 사망. 자유분방한 성격의 영향인지 언론노출이 꽤 잦은 편이었고, 구설수에 오른 적도 많았다. 특히 여성 덴노 논의에 강력히 반대하며, "[[첩]]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 남성으로 황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도 딸만 둘이었다.~~]보다도 존재감이 없었을 정도. * 온화한 성격으로 점심시간에 [[궁녀]]가 냅킨을 준비하는 것을 잊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궁녀가 미안해할까봐 지적하지 않고 조용히 무릎에 손수건을 얹고 식사했다고 한다. * 마사히토 친왕은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가져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또한 형수 [[미치코 황태자비]]에게도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미치코 황후]]의 친정 쇼다(正田) 가문은 [[가톨릭]] 집안이고, 그래서인지 [[미치코 황후]]는 가톨릭계 여학교인 후타바(雙葉) 여학원(초등학교)와 [[성심여자대학교|세이신(聖心) 여학원]](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했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당연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을 시어른들에게 들켜, 안 그래도 호된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던 [[미치코 황태자비]]만 또 꼬투리를 잡혀 호되게 꾸중을 들은 일이 있다. [[분류:일본 황실]] 마사히토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