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목차] == 개요 == [[몰타]]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몰타는 [[지중해]]의 한가운데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특히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이탈리아]]로 이어지는 해상운송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외부세력의 끊임없는 해상침공에 시달렸다. 이때문에 고대 [[페니키아]]부터 근대의 [[대영제국]]까지 [[유럽]]과 지중해 일대에서 힘 좀 쓴다는 세력들은 꼭 건드려 보는 장소가 되었다. 그로 인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만남 장소로, [[성서]]의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파울로스|성 바울로]]가 [[로마제국]]으로 압송되는 도중 배가 침몰해서 표류한 곳으로 언급되는 등 온갖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다.[* 출처: [[이원복]] 교수의 저서 <유럽만사 세상만사>] == 고대사 == http://3.bp.blogspot.com/_V0EJcthPaew/TOOVXd_P9-I/AAAAAAAAHnI/SsWpWxjBmOc/s1600/Malta9.jpg?width=430 지어진 지 6천 년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거석 구조물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규모도 엄청난데다 콩팥이나 나비모양의 복잡한 구조의 석실이 있는 완전한 석조 건축물이라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있다. 6천 년 전이면 [[신석기 시대]]로 아직 본격적인 인류의 4대 고대 문명이 피어나기도 전인데, 도대체 어떤 기술력으로 이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이 거석 신전을 지은 자들이 누구인지, 왜 이런 것을 지었는지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어 큰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초고대문명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떡밥]]이다. 1980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가장 오래된 타르시엔 사원은 1주일전에 예약해야 방문이 가능하다. 하자르 임 사원은 아무 때고 방문할 수 있지만 유적 내부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물론 주변에서 사진찍는 건 공짜. 덧붙여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예산을 들여서 하얀 천막을 씌워놓았다. 현대 공법이 적용되어 기상 변화에 관계없이 날아가지 않고 유적을 보호할 수 있다고. == 중세사 == [[로마 제국]]의 통치를 거쳐 5세기 로마가 붕괴한 뒤 사라센 해적들의 압박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국내 출간 서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 몰타의 이런 시달림의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어쨌거나 몰타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1522년 [[오스만 제국]] 술탄 [[술레이만 1세]](1520~1566)가 로도스 섬을 정복하자 그 섬에 자리잡고 있던 성 요한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이 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이자 [[에스파냐]] 왕인 카를로스 1세(1516~1556)가 1530년에 기사단에게 매년 [[매]](hawk)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몰타를 사실상 무상증여했다. 이 때부터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약 300년 가까이 몰타는 성 요한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 참고로 [[몰타의 매]]가 이 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자세한 건 항목을 참조. [[몰타 기사단]]은 이 곳을 거점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과거 로도스 시절을 잊지 않은 기사단원들은 사라센 선박과 [[해적]]선 모두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고 한다. 지도만 봐도 뻔하지만 이들이 자리잡은 몰타 섬은 북아프리카의 항만과 항로들을 기습하기 최적화된 곳이라서 [[오스만 제국]]의 골치를 엄청나게 썩였다. 결국 술레이만 1세는 1565년 몰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만에서 최대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지만 세 달에 걸친[* 정확히 '''3'''개월하고 '''3'''주, '''3'''일 동안 계속되었다.] 공방전 끝에 함락에 실패한다. 당시 방어 병력은 기사단원 '''5~600 명'''에 현지 징집병과 전투 직전에 고용한 용병 등을 포함한 6~8천 정도였다. 이후 스페인령 시칠리아에서 8천여 명의 지원병을 파병해주기는 했는데, 이들은 4개월쯤 지나서 도착했다.[* 사실 지원부대는 조기에 소집되었으나, 함대 손실을 우려한 스페인왕 펠리페 2세가 병력 수송을 제지했다.] 이 승리로 기사단은 명성을 단숨에 전유럽에 떨쳐, 몰타의 지명도도 덩달아(…) 올라갔다[* 더불어, 오늘날 몰타의 수도가 발레타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공방전 당시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싸운 기사단장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는 공방전 이후 기사단 요새를 복구하고 증축하는 작업까지 모두 마치고 눈을 감는데, 이 발레트라는 이름에서 발레타라는 이름이 나온 것.]. 어쨌거나 몰타 공방전 이후 성 요한 기사단에 입단하는 지망자도 늘어나고, 스페인과 교황청을 위시한 가톨릭 국가들의 기금 원조도 늘어나 기사단은 사라센 해적과 상선들을 대상으로 더욱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의 1장의 주인공 모건 블랙의 세력이 성 요한 기사단으로, 첫 번째 미션에서 위에 언급된 [[오스만 제국]]군과의 몰타 공방전이 나온다. 그리고 이후로도 몰타를 홈시티로 삼지만,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의 극을 달리므로 큰 의미는 없다. == 근대사 == [[몰타 기사단]]의 활동은 17~18세기에도 내내 계속되었다가, 19세기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가는 과정에서 기사단의 항복[* 기독교도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기사단 원칙에 따라, 오스만과의 결사항전과는 다르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을 받아냈다. 점령 직후 기사단은 몰타에서 퇴거하고, 시칠리아 왕국의 요청으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몰타를 점령하게 된다. 이후 [[빈 회의]](1814~1815)의 결과 몰타의 영국 영유가 승인되어 몰타는 영국 해외령이 되었다. 두 번째로 갈 곳을 잃은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은 결국 교황청이 받아준 로마로 망명해, 이 때부터는 무력을 이용한 사업을 포기하고 본업인 구호 사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은 지금도 로마에 본부를 두고 현존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때를 기점으로 기사단과 몰타의 역사는 갈렸다. 이후 몰타는 별 문제 없이 영국령으로 남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일약 중요성이 급증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에 원정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루트도 덩달아 중요해졌는데, 몰타의 위치가 세로로는 시칠리아-트리폴리의 [[독일군]], [[이탈리아군]]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고, 또 가로로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라는 영국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몰타를 점령하는 쪽이 자신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반대편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 때문에 추축군은 엄청난 공군력을 쏟아부어 몰타를 폭격했다. 영국은 영국대로 본토를 제외하면 최초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주둔시키는 등 계속해서 몰타의 전력을 증강했으며 그 덕분에 독일은 몰타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물론 큰 피해를 감수하고 처리할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주축이 될 [[공수부대]]가 크레타 섬에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내면서 성공 아닌 성공을 거뒀기에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해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몰타 섬이 얼마나 요충지였는지는 짤막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으로 가는 보급품의 9할에 가까운 물자가 몰타에 주둔한 영국 해군을 주축으로 한 포위망에 의해 격침당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몰타항공전]]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 현대사 == [[1964년]] [[영연방]] 내의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독립]] 40주년을 맞은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2004년]]은 [[유럽연합]]에 새로 가입한 국가 수가 가장 많은 해이기도 하다. 몰타를 포함해 무려 10개국이 이 해에 가입했다.] [[1989년]], 이 나라에서 [[냉전]]의 종말을 기정사실화한 몰타 미-소 정상회담이 열린 바 있다. [[분류:유럽사]] 몰타/역사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