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몰타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몰타는 지중해의 한가운데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특히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이탈리아로 이어지는 해상운송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외부세력의 끊임없는 해상침공에 시달렸다.
이때문에 고대 페니키아부터 근대의 대영제국까지 유럽과 지중해 일대에서 힘 좀 쓴다는 세력들은 꼭 건드려 보는 장소가 되었다. 그로 인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만남 장소로, 성서의 사도행전에서는 성 바울로가 로마제국으로 압송되는 도중 배가 침몰해서 표류한 곳으로 언급되는 등 온갖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다.[1]
2 고대사
지어진 지 6천 년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거석 구조물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규모도 엄청난데다 콩팥이나 나비모양의 복잡한 구조의 석실이 있는 완전한 석조 건축물이라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있다.
6천 년 전이면 신석기 시대로 아직 본격적인 인류의 4대 고대 문명이 피어나기도 전인데, 도대체 어떤 기술력으로 이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이 거석 신전을 지은 자들이 누구인지, 왜 이런 것을 지었는지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어 큰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초고대문명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떡밥이다.
1980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가장 오래된 타르시엔 사원은 1주일전에 예약해야 방문이 가능하다. 하자르 임 사원은 아무 때고 방문할 수 있지만 유적 내부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물론 주변에서 사진찍는 건 공짜. 덧붙여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예산을 들여서 하얀 천막을 씌워놓았다. 현대 공법이 적용되어 기상 변화에 관계없이 날아가지 않고 유적을 보호할 수 있다고.
3 중세사
로마 제국의 통치를 거쳐 5세기 로마가 붕괴한 뒤 사라센 해적들의 압박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국내 출간 서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 몰타의 이런 시달림의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어쨌거나 몰타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1522년 오스만 제국 술탄 술레이만 1세(1520~1566)가 로도스 섬을 정복하자 그 섬에 자리잡고 있던 성 요한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이 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이자 에스파냐 왕인 카를로스 1세(1516~1556)가 1530년에 기사단에게 매년 매(hawk)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몰타를 사실상 무상증여했다. 이 때부터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약 300년 가까이 몰타는 성 요한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 참고로 몰타의 매가 이 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자세한 건 항목을 참조.
몰타 기사단은 이 곳을 거점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과거 로도스 시절을 잊지 않은 기사단원들은 사라센 선박과 해적선 모두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고 한다. 지도만 봐도 뻔하지만 이들이 자리잡은 몰타 섬은 북아프리카의 항만과 항로들을 기습하기 최적화된 곳이라서 오스만 제국의 골치를 엄청나게 썩였다. 결국 술레이만 1세는 1565년 몰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만에서 최대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지만 세 달에 걸친[2] 공방전 끝에 함락에 실패한다. 당시 방어 병력은 기사단원 5~600 명에 현지 징집병과 전투 직전에 고용한 용병 등을 포함한 6~8천 정도였다. 이후 스페인령 시칠리아에서 8천여 명의 지원병을 파병해주기는 했는데, 이들은 4개월쯤 지나서 도착했다.[3] 이 승리로 기사단은 명성을 단숨에 전유럽에 떨쳐, 몰타의 지명도도 덩달아(…) 올라갔다[4]. 어쨌거나 몰타 공방전 이후 성 요한 기사단에 입단하는 지망자도 늘어나고, 스페인과 교황청을 위시한 가톨릭 국가들의 기금 원조도 늘어나 기사단은 사라센 해적과 상선들을 대상으로 더욱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의 1장의 주인공 모건 블랙의 세력이 성 요한 기사단으로, 첫 번째 미션에서 위에 언급된 오스만 제국군과의 몰타 공방전이 나온다. 그리고 이후로도 몰타를 홈시티로 삼지만,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의 극을 달리므로 큰 의미는 없다.
4 근대사
몰타 기사단의 활동은 17~18세기에도 내내 계속되었다가, 19세기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가는 과정에서 기사단의 항복[5]을 받아냈다. 점령 직후 기사단은 몰타에서 퇴거하고, 시칠리아 왕국의 요청으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몰타를 점령하게 된다. 이후 빈 회의(1814~1815)의 결과 몰타의 영국 영유가 승인되어 몰타는 영국 해외령이 되었다. 두 번째로 갈 곳을 잃은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은 결국 교황청이 받아준 로마로 망명해, 이 때부터는 무력을 이용한 사업을 포기하고 본업인 구호 사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은 지금도 로마에 본부를 두고 현존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때를 기점으로 기사단과 몰타의 역사는 갈렸다.
이후 몰타는 별 문제 없이 영국령으로 남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일약 중요성이 급증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에 원정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루트도 덩달아 중요해졌는데, 몰타의 위치가 세로로는 시칠리아-트리폴리의 독일군, 이탈리아군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고, 또 가로로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라는 영국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몰타를 점령하는 쪽이 자신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반대편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 때문에 추축군은 엄청난 공군력을 쏟아부어 몰타를 폭격했다. 영국은 영국대로 본토를 제외하면 최초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주둔시키는 등 계속해서 몰타의 전력을 증강했으며 그 덕분에 독일은 몰타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물론 큰 피해를 감수하고 처리할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주축이 될 공수부대가 크레타 섬에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내면서 성공 아닌 성공을 거뒀기에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해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몰타 섬이 얼마나 요충지였는지는 짤막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으로 가는 보급품의 9할에 가까운 물자가 몰타에 주둔한 영국 해군을 주축으로 한 포위망에 의해 격침당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몰타항공전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5 현대사
1964년 영연방 내의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독립 40주년을 맞은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6] 1989년, 이 나라에서 냉전의 종말을 기정사실화한 몰타 미-소 정상회담이 열린 바 있다.- ↑ 출처: 이원복 교수의 저서 <유럽만사 세상만사>
- ↑ 정확히 3개월하고 3주, 3일 동안 계속되었다.
- ↑ 사실 지원부대는 조기에 소집되었으나, 함대 손실을 우려한 스페인왕 펠리페 2세가 병력 수송을 제지했다.
- ↑ 더불어, 오늘날 몰타의 수도가 발레타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공방전 당시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싸운 기사단장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는 공방전 이후 기사단 요새를 복구하고 증축하는 작업까지 모두 마치고 눈을 감는데, 이 발레트라는 이름에서 발레타라는 이름이 나온 것.
- ↑ 기독교도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기사단 원칙에 따라, 오스만과의 결사항전과는 다르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
- ↑ 2004년은 유럽연합에 새로 가입한 국가 수가 가장 많은 해이기도 하다. 몰타를 포함해 무려 10개국이 이 해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