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美智子皇后 [[1934년]] [[10월 20일]] - * 상위항목 : [[아키히토/가족관계]], [[일본 황실]], [[왕비]], [[장녀]] [[아키히토]] 덴노의 황후. 미혼 시절의 이름은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 [[1934년]] [[10월 20일]]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태어났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5.jpg]] 결혼하기 얼마 전으로 추정되는 1959년 1월, 코[[후리소데]](小振袖)[*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 중에서 가장 소매가 짧은 것인데, 소매 길이가 85cm 정도이다.]를 입고 집에서 포즈를 취한 미치코. 미치코의 친정아버지는 [[독일]]에 [[유학]]한 경험이 있어, 그 옛날에 집 또한 벽난로와 [[피아노]] 등을 들여놓고 서양식 저택으로 꾸몄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37.jpg]] 1971년 10월, 만 37세 생일을 며칠 앞둔 미치코 황태자비.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1.jpg]] 할머니가 된 미치코 황후. [목차] == 결혼 전 == 친가인 쇼다 가문은 닛신(日淸) 제분[* 창업주는 할아버지인 쇼다 데이이치로(正田貞一郞). 이후 경영은 아버지 히데사부로를 거쳐 지금은 남동생 오사무가 맡고 있다. 라면회사 닛신식품(日淸食品)과는 별개 기업이다.]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이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백작 가문으로 '''옛 [[화족]]'''이다. 아버지는 히데사부로(英三郞), 어머니는 후미코(富美子), 형제로는 오빠 이와오(巌), 여동생 안자이 에미코(安西恵美子), 남동생 오사무(修)가 있다. http://cdn-ak.f.st-hatena.com/images/fotolife/e/e-vis/20151213/20151213115256.jpg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함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2/Shoda_Michiko_1940.jpg 5살 때의 쇼다 미치코.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3.jpg]] 결혼 전, 친정 가족들과 함께. [[가톨릭]] 집안이어서인지, [[가톨릭]]계 학교인 후타바(雙葉) 여학원[*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후타바 여학원을 다녔고,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도 후타바 여학원을 졸업했다.](유치원, 초등학교)[* 초등학교 시절에는 전쟁 때문에 피난하느라 전학을 몇 번씩 다녔다.]과 [[성심여자대학교|세이신(聖心) 여학원]](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성심여자대학교|세이신 여학원]]은 옛 구니노미야 저택 부지에 세워졌다. 즉 시어머니 [[고준황후]]가 어린 시절을 보낸 터에서, 며느리 미치코 황후가 학창시절을 보낸 것. 이 이야기만 들으면 '고부 간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착각에 빠지지만…]을 졸업했다. 미치코는 '''미모가 빼어났고, 공부, 음악, 미술, 운동 등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으며,'''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까지 역임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동경을 한몸에 받았다. ~~[[엄친딸]]~~ 1957년 3월에는 '''세이신 여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졸업 후 미치코는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싶었으나, 양친의 뜻에 따라 신부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쇼다 미치코는 장래가 기대되는 규수였다. ~~마치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의 [[오가사와라 사치코]]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과 결혼 ==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ten.jpg]] 연애하던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가 은근 [[노안|나이 들어 보인다]].~~ 세이신 여대를 졸업한 해, 미치코는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아키히토]] 황태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전통에 따르면 그동안 황실의 신붓감은 황족 내지는 [[화족]]. 특히 미래의 황후, 황태자비가 될 여성은 황족이나 화족 중에서도 오직 5개의 공작 가문([[고셋케]]) 출신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쇼다 가문에서는 이미 미치코의 신랑감으로 어느 법조계 청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쇼다 가문은 황태자의 청혼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몇 달 동안 미치코를 [[미국]]과 [[유럽]]으로 여행보냈다. [[1958년]] [[10월 20일]], 미치코는 [[미국]] 여행 도중에 만 24세의 생일을 맞았다. 그날 미치코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여기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하며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이렇게 쇼다 가문도 미치코 본인도 괴로워했으나, [[아키히토]] 황태자의 '''끈질긴 청혼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사실 말이 '청혼'이지, 황실의 청혼을 감히 끝까지 거부할 수 없다. 미치코 황후의 아버지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이며 [[마사코 황태자비]]의 아버지는 고위 [[외교관]]이어서, 청혼을 계속 거부하기에도 참 난처한 입장이었다. 실제 황실의 청혼을 연이어 거절했을 때 미치코 황후의 친정 쇼다 가문에도,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 오와다 가문에도, 감히 황족의 청혼을 거절한다며 [[편지]]와 [[전화]] 등으로 [[우익]]들의 괴롭힘이 연달아 이어졌다. 억지로 시집온 후의 삶은(…). 단 [[키코 비]]는 시어머니ㆍ형님과 반대로, 자신이 원하여 황실로 시집왔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fumi.jpg]] 결혼을 앞두고, 친정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후미코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미치코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다. [[화족]] 가문 출신인 후미코는, '그들'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미치코는 몇 달 동안 황실의 일원이 되는 데 필요한 교육[* [[일본 황실]]의 비(妃)가 되는 여성들이 받는 교육. 역대 황실 신붓감들 중에서 이 교육을 제일 어려워한 사람은 [[마사코 황태자비]]였다. 오랜 기간 외국, 그것도 [[다신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유일신교]]) 문화권에서 성장한 [[오와다 마사코]]는 [[신토]] 등 일본의 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영어]]로 된 책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교육과정 및 과목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받은 것보다 훨씬 단축된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노처녀인 [[오와다 마사코]]를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켜 후손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을 받았다. 그리고 혼수. "결혼 비용을 여행하는데 다 써버렸어요. 가방 하나만 들고 가더라도 저를 받아주실 수 있다면…"이라는 미치코의 말에 [[아키히토]] 황태자가 "OK"라고 한 것과 달리, 쇼다 가문은 [[약팔이|'''억지로 딸을 시집보내면서 어마어마한 혼수까지''']] 준비해야 했다. 무려 6t 트럭 3대 분량으로, 당시 금액으로 약 3,000만 엔이며 현재 시세로는 약 3억 엔. 재벌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기둥 뿌리를 뽑아도 모자랐을 것이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4.jpg]] 1959년 1월 14일, 결혼을 앞두고 황실에 인사드리러 궁성을 방문한 미치코와 친정 부모. 소매가 땅에 닿을 듯 치렁치렁한 [[후리소데]]를 입은 미치코와, 짧은 소매의 [[토메소데]]를 입은 후미코가 대조된다. 미치코의 키는 161cm로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으나[* 1950~60년대 초기 [[미스코리아]]의 키가 162cm 정도였다. 2010년대의 미스코리아의 키는 대략 175cm 정도 된다. 그때도 미스코리아에서는 키가 큰 여성을 선호했다. 1970년대 아시아 패션 [[모델]]들이 남성 180cm 전후, 여성 165cm 전후를 키가 커서 옷발이 잘 받는다고 했다.], 미치코보다 옛날 사람인 히데사부로와 후미코의 키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emiko.jpg]] 시집가는 날 아침, 여동생 에미코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미치코. 에미코는 언니 미치코보다 더 키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미치코가 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있긴 하지만~~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거인이었을 듯. 사진상으로 보면 에미코의 키가 173cm 내외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하게 큰 키다. '''1959년 4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평민 출신의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다 하여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 크게 일었으며, 두 사람이 만난 계기가 된 [[테니스]] 또한 크게 유행했으며,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황실의 결혼식을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흑백 텔레비전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 결혼 과정의 진실 == 세간에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이기만 한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치밀한 계획'''이 뒷이야기로 숨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전락했고, [[국가신토|신으로 숭배]]되어 오던 [[덴노]] 일가는 [[인간선언]]을 했으며, 황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상징'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황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로는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후,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하츠코와 동갑이며 나가코 황후의 막내딸인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라는 규수가 거론되고 있었다. 하츠코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방계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永久) 왕, 어머니는 [[화족]] 출신인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 할머니는 [[메이지 덴노]]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이었다. 즉 철저하게 황족&[[화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구시대적인 규수였다. 새롭게 바뀌어야 할 황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규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파 인사들은 일류 [[여자대학교]]의 우등생들을 중심으로, 하츠코와 반대되는 유형의 규수들을 은밀하게 물색했다. 그 가운데 미치코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파 인사들은 '''유복한 평민 가문 출신이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아름답고 총명한 미치코를 새로운 시대의 황태자비에 적합한 인물로 꼽았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이후 이어진 두 사람의 연애결혼과, 황실 입성 후 미치코 황태자비가 보여 준 파격적인 면모들을 생각하면, 개혁파 인사들의 작전은 대성공한 셈이다. ==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 == [[일본 황실]]에서 특정한 출신에 따라 [[황태자비]]를 결정하는 일은 천 년이나 되는 전통이었다. [[막부]]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헤이안 시대]]에 황실이 직접 통치를 하는 대신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독점하고 나라를 통치했다. [[황후]]는 후지와라 씨 출신의 여성이 독점하였다. 이후 황후의 자격은 후지와라 씨의 후손인 5개 가문([[고셋케]])이나 황족 출신 여성으로 굳어졌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고셋케는 [[화족]]으로 편입되어 공작 가문이 되었다. 그래서 방계 황족의 신붓감은 같은 황족이나 화족이어도 조건을 충족했지만, 미래의 고귀한 황후인 황태자비는 천 년 동안 이어진 전통에 따라 [[고셋케]]나 황족 출신이어야 했다.[*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英昭皇后),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황후(昭憲皇后),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는 모두 [[고셋케]] 출신이었고,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황후]]는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앞서 서술된 이유 때문에 최초의 평민 황태자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평민 출신의 신붓감에 대한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하긴 자신들은 [[신적강하]]로 인해 수백년간 이어내려져 오던 높디높은 신분을 잃고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전락했는데, 반대로 자신들의 아래로 여기던 평민이 황족, 그것도 장래의 국모가 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듯 왕의 사랑을 받던 여성들이 출신 때문에 반감을 산 경우는, 굳이 일본이 아니라도 다른 왕조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유명한 [[희빈 장씨]]만 하더라도 양반가의 규수는 아니라도 역관 출신 거부의 딸이었는데, 이 당시 대[[재벌]]의 딸인데다가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규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황족 혹은 [[화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은 미치코 황후의 출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후는 어머니 후미코가 화족 출신이라, 친가는 평민이지만 외가로부터 화족의 피도 이어받고 있었다. 다만 쇼다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끝까지 지켜내었지만, [[희빈 장씨]]는 [[숙종(조선)|숙종]]에게 버림받았다는 차이도 있다. ~~만약 미치코가 아키히토에게 버림 받았으면 [[사약]]을 드링킹하고 비참하게 죽었을 듯?~~] 시아버지 [[쇼와 덴노]]는 '''"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감쌌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미치코를 몹시 미워하여''', 두 아랫동서 지치부노미야 세츠코(秩父宮勢津子) 비[*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아내.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이며,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이기도 하다.],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高松宮喜久子) 비[* [[다이쇼]] 덴노의 3남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로, 외가는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와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이츠코의 여동생이며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 즉 [[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으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진짜 이유는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위기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쇼다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 가문이 [[무진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등등, '''옛 황족들과 [[화족]]들이 똘똘 뭉쳐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미치코는 황실로 시집을 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게코는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 병으로 죽고 말았다[*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도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nagako1.jpg]] 결혼식 날.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 시아버지 [[쇼와 덴노]],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함께. ~~[[어서 와]], [[시월드]]는 처음이지??~~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cw.jpg]] 참고로 컬러 버전도 존재한다. ~~[[1959년]]이니 화질은 기대하지 말자~~ ==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 [[나가코 태후]]는 너무나 귀한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당시까지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소유권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게다가 [[아키히토]]는 [[나가코 태후]]가 딸만 넷 낳다가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이전까지 [[나가코 황후]]는 딸만 낳는다고 비난을 당해 왔고, 심지어 [[후궁]] 제도의 부활까지도 심각하게 거론되곤 했다. 실제로 신하들이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정하여, [[쇼와 덴노]]에게 그녀들의 사진까지 제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후궁]] 들이는 것을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고. 후에 두 아들 [[아키히토]]와 [[마사히토]]가 태어나, 간신히 [[후궁]] 제도의 부활 여론이 잠잠해졌다], 아니면 딸들의 불행한 삶과 죽음에 대한 화풀이였는지[* [[쇼와 덴노]]와 [[나가코 태후]]의 자녀들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는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병에 걸리는 등,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정말 죽기 직전까지도 [[나가코 태후]]는 계속 미치코 황후를 인정하지 않고 괴롭혔다'''. == 평민 출신 황태자비의 파격 == 미치코 황태자비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면서도, 황실 생활의 여러 면에서 천년 동안 전해져 온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가정적',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궁성 내의 산전(産殿) 대신에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했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신하들에게 양육을 맡기는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직접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여 길렀다.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직접 수유를 했지만 [[유모]]도 두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고. 또한 가족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했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yori.jpg]] 1961년, 동궁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요리]]를 하는 미치코 황태자비.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녀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국]]의 [[소아과]] [[의사]]인 Benjamin Spock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름의 육아 지침을 세웠다. 공무(公務)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를 맡길 때면 이 지침대로 돌보게 했다. 이는 '''나루 짱[* 맏이 [[나루히토]] 황태자의 이름에서 딴 것.]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샀으며,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훗날 차남 부부가 낳은 두 손녀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old1.jpg]] 딸 [[사야코 공주]]와 함께. [[사야코 공주]]가 1969년생이니 197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old2.jpg]]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곱다~~ http://www.laura.jp/yuo/1c572536.jpg 남편 [[아키히토]] 덴노와도 금슬이 좋다고 한다. ~~아들 [[나루히토]] 황태자도 그렇고, 예상보다 애처가들이 많다~~ 사실 황실에서 시집살이하면서 온갖 푸대접을 받았음에도 남편을 내조했다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old3.jpg]] [[테니스]]를 통해서 처음 만난 것 때문인지, 지금도 남편 [[아키히토]] 덴노와 [[테니스]]를 치기도 한다고. ~~사진만 보면 근처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는 옆집 노부부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오산이다~~ == 자녀 == 이제 [[일본]]에 [[화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남 1녀 모두 일반인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화족]]들은 [[신적강하]]로 공식적으로 지위가 무효화되었기에, 현대 일본에 [[화족]]은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1959년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올 때 옛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그 난리를 떨었으니,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항간에 차남과 장녀는 미치코 황후의 친자가 아니라, 숨겨둔 [[첩]]의 자녀라는 소문도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서자]]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황실전범상 [[후미히토|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황족이 아니다~~ 2014년에 들어서, 세 자녀들에 대한 각종 논란이 심각할 정도로 많아졌다. *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 : 1960년 2월 23일 출생. 1993년 6월 9일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와 결혼, 2001년 12월 1일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 1965년 11월 30일 출생. 1990년 6월 29일, [[가쿠슈인]] 대학에서 만난 1년 후배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하여 2녀 1남을 낳았다. 자세한 사항은 [[후미히토]] 항목을 참조. * 장녀 [[구로다 사야코]] : 1969년 4월 18일 출생. 2005년 11월 15일,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의 오랜 친구이자 [[도쿄]]도청 직원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했다. 결혼 후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다. == [[가해자가 된 피해자]]? == ===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 === 무엇보다 '''[[아들]]을 낳지 못해서''' 사이가 좋지 않다. 황태자 부부는 결혼 후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 반면, 먼저 결혼한 차남 부부에게서는 금방 두 [[마코 공주|공]][[카코 공주|주]]가 태어나 황실과 국민들로부터 갖은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황태자 부부는 점점 가족들과의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해졌고, 결혼한 지 8년 만에야 어렵게 아기를 낳았지만 딸이었다. 그래서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장래에 [[여왕|여성 덴노]]로 즉위시키자는 논의도 활발했지만, 5년 후 차남 부부가 [[히사히토|아들]]을 낳는 바람에(…) ~~[[망했어요]]~~ 이 외에도, 오랜 기간 외국에서 성장하여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활달한 [[마사코 황태자비]]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황실]]과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녀는 왕실 [[외교]], 국제교류, 해외 순방 등등 '''[[외교관]]이었던 전직을 살려 활동하고 싶었으나[* [[나루히토]] 황태자의 끈질긴 청혼에도 황실로 시집오기를 망설였던 [[오와다 마사코]]에게, 황실 측에서는 "황실의 일원이 되어서도 해외순방이나 국제교류 등의 활동을 하며, [[외교관]] 시절처럼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물론 시집온 후로는…]] ], 시부모는 [[아들]] [[출산]]에 전념할 것만을 강권'''하였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마사코 황태자비]]의 방문을 요청해도 궁내청에서는 [[나루히토]] 황태자만 보내거나, 차남 부부 내지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는 솔직하며 아첨하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랫동서 [[키코 비]]에 비해 시부모 및 시가 식구들에게 사근사근하고 애교있게 굴지 못한다고 한다. [[아키히토]] 덴노의 [[가쿠슈인]] 동창으로 절친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 '긴부라 사건(銀ブラ事件)'의 주인공. [[가쿠슈인]] 고등과 3학년이던 1952년 초에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시종들 몰래 [[긴자]]로 놀러 나갔다가, 잠시지만 '''황태자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들킨 뒤에 동궁대부(東宮大夫)와 경찰에게 엄청나게 깨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하시모토 류타로]] 前 총리는 그의 사촌동생.]는 이에 대하여 '''"[[마사코 황태자비]]가 [[키코 비]]처럼 약삭빠르고 상냥하며 시부모에게 순종했다면, 가족 문제는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작은며느리 [[키코 비]] ===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iki.jpg]] 작은며느리 [[키코 비]]와 함께.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시부모와 수월하게 지낸다'''고 한다. 남편 [[후미히토]] 친왕, 시누이 [[구로다 사야코]]와 같은 학교인 [[가쿠슈인]]을 다닌 덕분에 시집오기 전부터 황실 가족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고, 시집와서도 적응이 빨랐던 것이다. 미치코 황후는 그녀를 '키코 짱(ちゃん)'이라 부르며 귀여워했고,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를 [[임신]]하고 [[출산]]할 때도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남 부부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자주 덴노 부부를 방문하면서 더욱 친밀해졌다. 게다가 결국에는 황실 역사상 40여 년 만의 '''[[히사히토|아들]]까지 낳았으니…''' 그러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가 '''마냥 화기애애할 수만은 없는지,''' [[키코 비]]와 친정어머니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가 결혼 전 미치코 황후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꾸중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키코 비]]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하지만 집안에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 시종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키코 비]]의 사진들을 보면, 젊은 시절까지는 해맑고 순수하던 미소[* 일명 '키코 짱 스마일'이라고도 한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이상하고 억지스러운 미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히사히토]] 친왕의 출산 역시, (차남 내외도 야망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일단은 덴노 부부가 [[강요받고 있는 거다|'''강요'''한 거라고 한다.]] 2003년 6월,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황태자 부부가 둘째를 낳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바 있고, 같은 해 12월의 기자회견에서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황실의 번창을 생각한다면 차남 부부가 셋째를 낳기 바랍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고려한다면 이제 빨리 셋째를 낳아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의견이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강요했음에도, [[히사히토]] 친왕이 암묵적으로 황태손으로 여겨지긴 해도 공식적으로는 황태손의 지위에 있지는 않다보니[* 황실재정 관련 법률인 <황실경제법>에 따르면, 4조에서 [[덴노]]와 황태자 일가가 속한 직궁가에는 '내정비', 6조에서는 기타 황족들에게 그보다 단계가 낮은 '황족비'를 따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황태자 일가보다 생활비를 적게 받도록 되어 있다. [[히사히토]]는 덴노의 친손자이긴 해도 황태자의 아들이 아니라서, 원칙적으로는 방계 황족이다.], 외동딸만 있는 황태자 일가보다 세 자녀가 있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생활비가 더 적다. 그래서 [[키코 비]]가 그 스트레스를 시종들에게 푼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 자녀 교육문제설 == 장녀이자 막내인 [[사야코 공주]]는 미치코 황후에게 의지가 되는 소중한 딸이었으나, 시집간 후에 평민 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몰래 세금을 타 쓴다는 소문이 있다(2014년경부터). 그렇다 보니 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거나, [[사야코 공주]]가 서녀라는 등 별별 소문이 돌고 있다. 또한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와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미치코 황후가 가운데서 중재를 못 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마음고생 하는 건 필수인 듯~~ 사실 [[후미히토]] 친왕은 어렸을 때부터 장난끼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단순히 말썽꾸러기 수준이 아니라, 대학생 시절에 [[가와시마 키코]]를 비롯해 많은 여자들을 거느렸다거나[*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가쿠슈인]] 대학 시절 [[테니스]], 자연문화연구회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며 교제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이 동아리이지 실제로는 [[후미히토]] 친왕의 [[하렘]]이었다고 한다. [[후미히토]] 친왕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꼬붕(…)을 시켜 동아리에 데려오도록 했고, 그렇게 모인 여학생들 중 끝까지 [[후미히토]] 친왕의 곁에 남은 여학생이 [[가와시마 키코]]였다는 것.], 결혼하기도 전에 [[키코 비]]를 여러 번 낙태시켰다거나, 결혼 후에는 해외 순방에서 [[태국]] 여자와 바람을 피웠는데 이미 사생아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난봉꾼으로 유명하다. 얌전한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엄격했던 것과 달리, [[후미히토]] 친왕에게는 미치코 황후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아, 서자라는 소문이 있다.[* 근데 어느 국가 왕실을 막론하고, 차기 국왕이 될 후계자는 엄격히 키우고, 그외의 자녀는 비교적 자유롭게 키우는 편이긴 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시대 때 태종은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에게는 엄격한(?) 편이었으나, 당시 왕위계승권에서 멀어져 있던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세종대왕]]) 등의 다른 자녀들은 보다 자유롭게 키웠다고 한다.] 하지만 미치코 황후의 세 자녀들 중 후미히토 친왕이 미치코 황후를 제일 닮았다는 평도 있다. http://livedoor.blogimg.jp/royalfamily_picture/imgs/a/e/ae43af63.jpg 어쨌든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는 평판이 좋긴 하지만 황위 계승 문제를 비롯해서, 미치코 황후의 세 자녀 모두 각종 논란이 심각한데, 그게 다 미치코 황후의 잘못된 [[육아]] 방식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저 위에서 언급된 <나루 짱 헌법>이라는 책은, 당시에는 인기가 많았지만 나중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되면서 지금은 잊힌 책이 된지 오래다. 정말 옛날 이야기 중 미치코 황후를 음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실 [[나루히토]] 친왕은 [[아키히토]] 황태자의 아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다!!"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부부의 결혼이 1959년 4월의 일이고, [[나루히토]] 친왕이 1960년 2월생, 즉 결혼하자마자 생긴 아이라서 이런 소문이 돈 듯하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루머 중 하나. == 세 손녀들과의 관계 == 미치코 황후도 그렇고 덴노 부부는 맏손녀인 [[마코 공주]]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크다고 한다. 둘째 손녀인 [[카코 공주]]를 [[키코 비]]가 임신했을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가 결혼한 지 1년만이었고, 그 때문에 키코 비는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高円宮久子) 비[*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부인. [[노리히토]] 친왕은 [[나루히토]] 황태자와 친밀했으나, 2002년 갑자기 사망했다.]로부터 "큰며느리가 임신하기도 전에 작은며느리가 계속 임신하다니, 황실 내 서열을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랍니다" 라고 한 소리 들은 적이 있었다. 미치코 황후가 [[키코 비]]의 임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소문은 없지만, [[카코 공주]]가 지금과 달리 어렸을 때는 굉장히 조용한 성격이었던 걸로 봐서는, [[카코 공주]]의 탄생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을 듯.[* [[키코 비]]도 딸만 둘을 낳아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작은며느리라서, 큰며느리인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는 덜했지만.] 셋째 손녀인 [[아이코 공주]] 역시 사이가 어떻다든지 하는 말은 없지만, [[아이코 공주]]의 어머니인 [[마사코 황태자비]]와의 관계도 그렇고, [[히사히토]]만을 편애하는 걸 봐서는 그다지 화목한 관계는 아닌 듯하다.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 황태자비|마사코]]>라는 책에 의하면,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기뻐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다시 임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 특이 사항 == * 세이신 여대 재학 시절, [[미시마 유키오]]와 선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유키오와 미치코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유키오는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인 스기야마 요코(衫山瑤子)와 결혼했다. *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퇴위 의사를 내비친 대국민 영상 메시지를 발표하기 전에 두 아들([[나루히토]], [[후미히토]])과 상의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765540|#]] * 미치코 황후가 황후가 된 지금은 이미지가 무척 좋지만, [[황태자비]] 시절에는 지금의 며느리들([[마사코 황태자비]], [[키코 비]])처럼 이미지가 무척 안 좋았다. 상술했던 내용처럼 [[나루히토]] 친왕이 아키히토 일왕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미치코 황후가 시집오자마자 큰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죽은 것을 두고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는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의 며느리들처럼 아랫동서 히타치노미야 하나코(常陸宮華子)[* 평민 출신인 형님 미치코 황후와 달리, 옛 [[화족]] 가문 출신이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미워한 [[고준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다. 단 하나코 비는 (남편 [[마사히토]] 친왕 쪽의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 비와의 신경전도 꽤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지가 무척 좋은 걸 보면, [[마사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되거나, [[히사히토]] 친왕이 덴노가 되어 [[키코 비]]가 덴노의 어머니가 된다면 이들의 이미지도 바뀔지도 모른다. [[분류:일본 황실]] 미치코 황후 문서로 돌아갑니다.